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탄 화물선이 침몰했다. 가족은 모두 죽고 나는 가까스로 구명보트에 의지해 태평양을 표류한다. 내가 가진 것이라곤 구명보트와 약간의 구급식량, 조명탄과 구명조끼, 밧줄, 낚시 도구, 메모지와 볼펜, 호루라기, 빗물받이, 바다 그리고 벵골 호랑이 한 마리.

'피신 몰리토 파텔'이라는 이름의 16세 인도 소년은, 아버지가 운영하던 동물원을 정리하고 가족이 모두 캐나다로 이주하기 위해 올라탄 화물선의 침몰과 함께 인생에서 지울 수 없는 길고 지루한 표류를 시작한다. 227번의 밤과 낮이 바뀌는 동안 '생존'을 위한 그의 투쟁은, 먹고 살기 위한 노력과 동시에 거대한 몸집의 맹수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노력, 두 가지로 정리된다.

심심찮게 마주치는 상어떼와 때때로 불어닥치는 폭풍우, 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벵골 호랑이 사이에서 피신 몰리토 파텔, 즉 파이, 그는 말한다. 절망은 호랑이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이라고. 생명을 패배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공포심이라고.

공포심에 대해 한마디 해야겠다. 공포심만이 생명을 패배시킬 수 있다. 그것은 명민하고 배반 잘하는 적이다. 관대함도 없고, 법이나 관습을 존중하지도 않으며, 자비심을 보이지도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에 접근해, 쉽게 약점을 찾아낸다. 공포심은 우리 마음에서 시작된다. 언제나. 우리는 잠시 차분하고 안정되고 행복을 느낀다. 그러다가 가벼운 의심으로 변장한 공포심이 스파이처럼 어물쩍 마음에 들어선다. 의심은 불신을 만나고, 불신은 그것을 밀어내려 애쓴다. 하지만 불신은 무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보병과 다름없다. 의심은 간단히 불신을 해치운다. 우리는 초조해진다. 이성이 우리를 위해 싸우러 온다. 우리는 안심한다. 이성은 최신 병기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뛰어난 기술과 부인할 수 없는 여러 번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이성은 나자빠진다. 우리는 힘이 빠지고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초조감에 끔찍해진다.

이렇게 공포심은 우리 몸에 깃들고, 몸은 무서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이미 인식한다. 벌써 폐는 새처럼 날아갔고, 창자는 뱀처럼 스멀스멀 빠져나갔다. 이제 혀가 주머니쥐처럼 축 늘어지고, 턱은 그 자리에서 덜컹댄다. 귀는 들리지 않는다. 근육이 말라리아에 걸린 사람처럼 떨리고, 무릎은 춤추듯 흔들린다. 심장은 지나치게 경직된 반면 괄약근은 지나치게 이완된다. 몸의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다. 모든 부분이 서로 떨어진다. 눈만 제대로 작용한다. 눈은 언제나 공포심에 쏠려 있다.

곧 우리는 무모한 결정을 내린다. 마직막 연합군인 희망과 신뢰를 버린다. 이제 스스로 배패한 것이다. 인상에 불과한 공포심이 승리를 거둔다.

이것은 말로 옮기기가 어렵다. 근본을 흔드는 공포, 생명의 끝에 다가서서 느끼는 진짜 공포는 욕창처럼 기억에 둥지를 튼다. 그것은 모든 것을 썩게 한다. 그것에 대한 말까지도 썩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힘껏 싸워야 한다. 거기에 말의 빛이 비추도록 열심히 싸워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피하려 하고 심지어는 잊으려 하는 고요한 어둠으로 다가오면 우리는 더 심한 공포의 공격에 노출된다. 우리를 패배시킨 적과 진정으로 싸우지 않았으므로. (p203~204)

피신의 말처럼, 벵골 호랑이와 구명보트에서의 동거는 누가 봐도 최악의 상황이지만, 이 책 <파이 이야기>는 상황을 심각하게 구석으로 몰아붙이거나 긴박하게 위기와 절정의 파도를 넘나들지 않는다. 극적인 반전도 없다. 책을 잃는 동안 마치 물 위에 떠 출렁이는 부표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작가 얀 마텔의 무심한 듯 유머와 솔직함이 잘 버무려진 화법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도착할 때까지도 섣부른 판단을 금하게 만들고, 400페이지에 달하는 꽤 많은 텍스트는 어느 하나도 놓치지 못하게 읽는 사람을 바짝 긴장시키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애써 가르치려 들지는 않지만 때때로 허술한 뒷통수를 내려치는 인생에 대한 관점도 무척 인상 싶다.

책의 끝 부분에는 기사회생으로 멕시코 해안에 닿은 파이를 만나기 위해 파견된 일본 조사관과의 대화가 녹취를 정리한 형식으로 기술되고 있다. 227일간 파이가 겪었던 사실들, 작은 구명보트에서 호랑이와의 동거, 바다 위에서 발견한 식인섬, 이 모든 불가사의로부터 살아남은 파이를 도무지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에게 던지는 파이의 짧은 말은 나를 충분히 긴장시켰다.

"호랑이는 존재해요. 구명보트도 존재하고, 바다도 존재해요. 당신의 좁고 제한된 경험에 그 셋이 다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당신은 거기서 벌어진 일을 믿지 않으려는 거예요." (p307)

좁고 제한된 경험에 그들이 다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믿지 않으려 한다는 말. 어쩌면 내가 외면하는 것들은 나의 좁고 제한된 경험을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여튼, <파이 이야기>는 최악의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 남느냐에 조바심 내기 보다는, 어떻게 함께 살아내는 지에 더 관심이 가는 묘한 책이다. 한 가지 기억할 것은, 파이의 충고대로라면, 결국, 쫄지 않으면 우리는 이기는 거다. 공포심만으로 패배하지 말자,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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