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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책들의 도시 1
발터 뫼르스 지음, 두행숙 옮김 / 들녘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대부의 유언장에 적혀 있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다만 그의 글이 희대의 걸작임에는 분명한, 어느 시인을 찾아 '부흐하임'이라는 책의 도시로 떠난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 그는 공룡이며, 아직 책을 낸 적은 없지만 엄연히 작가의 길을 걷고 있는, 하지만 '오름'을 믿지 않는 話者이다.
오름? 오름은, 한 마디로 완벽한 글을 접했을 때 느끼게 되는 온 몸의 마비와 같다.
원고는 마치 화가의 손으로 그려진 것 같았다. 글자 하나하나가 탁월한 예술품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기호들은 종이 위에서 마치 발레를 하듯 매혹적인 윤무를 펼치고 있었다. (중략)
너무도 진지하게 파들어가면서도 동시에 쾌활하게 쓰여 있어서 나는 몇 구절밖에 읽지 않고도 열광하며 기뻐 어쩔 줄 모르는 상태에 빠졌다. 마치 어느 아름다운 공룡 처녀와 함께 춤을 추는 듯한 기분이었고, 포도주를 몇 잔 마셔서 얼떨떨해졌거나 천상의 음악소리에 취한 듯한 기분이었다. 내 머릿 속은 마치 저절로 빙빙 도는 것 같았다. 별똥별들처럼 불꽃을 튀기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내 머릿속으로 우박처럼 쏟아져 들어오더니 뇌피질 속에서 쉬익쉬익 타오르고 있었다. 그때부터 머릿속이 킥킥거리더니 점점 나를 웃게 만들고 나로 하여금 큰 소리로 그걸 인정하거나 답변을 하도록 자극했다. (중략) 나는 좁은 길을 걸어가다가 이따금 어깨를 으스대는가 하면 큰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편지를 손에 들고 마구 흔들어대거나 또 이따금 히스테리 환자처럼 마구 웃어대거나 열광해서 발을 마구 구르기도 했다. (중략) 어쩌면 나는 정말이지 주인공이 광기에 빠져드는 연극을 한번 해본 건지도 몰랐다. (1권 본문 38~41p)
이렇게 원고를 보다 자신도 모르게 울다 웃고, 숨을 헐떡이고 입술을 꽉 깨물고, 무릎을 치며 비명을 지르는 일이 바로 '오름'에 도달한 상태이다.
주인공은 이 단 한번의 오름으로 그 글을 쓴 시인을 찾아 장장 2권, 750페이지에 달하는, 여정과 모험, 생명의 위협과 기이한 만남, 의문의 실마리와 그 종말까지를 고스란히 옮겨주고 있다.
부흐하임은 Buch(책) Heim(고향)이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 갖가지 책들과 책에 관련된 사람들-작가, 출판업자, 고서점, 상인, 책 사냥꾼-이 모여 사는 '책 동네'이다.
여기에는 바로 '꿈꾸는 책들'이 있었다. 그 도시에서는 고서적들을 그렇게 불렀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장사꾼들의 눈에는 제대로 살아 있는 것도 그렇다고 제대로 죽은 것도 아니고 그 중간인 잠에 빠져 있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책들은 사실상 과거에 존재했다가 이제는 소멸을 앞두고 있었으며, 그래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부흐하임의 모든 책 서가들과 상자들, 지하실들, 지하무덤들 속에는 그렇게 졸고 있는 책들이 백만 권, 아니 수백만 권에 달했다. 오직 무언가를 찾는 수집가의 손에 의해 어떤 책이 발견되어 그 책장이 넘겨질 때만, 그것을 구입해서 거기에서 들고 나갈 때에만 그 책은 새로이 잠에서 깨어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모든 책들이 꿈꾸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1권 본문 49~50p)
부흐하임에서 미텐메츠는 흉악한 음모에 빠져 지하도시로 추방되는데, 여기서 그는 지하도시에서 거대한 도서관을 운영하며 꿈꾸는 책들을 돌보고 있는 '부흐링' 족과, 죽었다고 알려진 전설의 책 사냥꾼 '레겐샤인', 결국 이 책이 찾고 있던 잃어버린 시인이자 그림자 제왕으로 불리는 '호문콜로스'를 차례로 만난다.
그림자 제왕은 촛불 아래로 걸어왔다. 오, 내 친구들이여, 그때 처음으로 그의 형상을 보았다. 입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튀어나오면서 나는 뒤로 멏 결음 물러났다. 그 방 안에 있던 살아 있는 책들도 역시 그의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자 뒤로 피했다.
거기에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종이로 된 형체가 서 있었다. 그가 한때는 인간이었음을 상기시키는 유일한 표식은 그의 몸의 형태였다. 팔과 다리들, 몸통, 머리, 심지어 얼굴까지 모든 게 다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아주 오래된 색 바랜 종이들을 무수히 첩첩 쌓아서 조합해놓은 형체였다. (중략) 만약 돌이나 청동으로 만든 조각상이 갑자기 생명을 얻어 깨어났다고 해도, 지금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이 종이로 만든 거대한 인조 인간처럼 나를 경악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권 본문 218p)
호문콜로스, 그는 한때 쓰는 족족 '오름'의 책이 되어버리는 마법의 손을 가진 시인이자 작가였다. 그러나 책 출판을 위해 부흐하임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부흐하임의 보이지 않는 권력자인 '스마이크'에게 걸려들어,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지하세계에 갇혀 책 사냥꾼들을 사냥하는 괴물이 되어 버렸다. 그 거대함과 대적할 수 없는 무력으로 곧 지하세계를 자신의 나와바리로 만들지만, 호문콜로스는 지상의 따사로운 햇살을 느끼며 거리를 여유롭게 거니는 예전의 자신을 결코 잊지 않았다. 이미 너무 오랫동안 지하도시를 벗어나지 못해서도 아니고, 자신의 현재 모습을 남에게 보이는 것이 싫어서도 아니다. 그의 몸은 종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햇빛을 받으면 타버리고 말아 지상은 곧 죽음이란 등식이 성립되기 때문에, 한번도 햇살과 바람, 물의 소리를 잊지 못하면서도 그것들이 존재하는 지하 저 위를 넘어다볼 용기조차 없었던, 슬픈 그.
말하지 않아도 그리운 것은, 말로 밖에 내어버리면 더이상 간직하고 있지 못하고 터뜨리고 말게 된다. 호문콜로스 역시 미텐메츠에게서 용기를 얻어 그의 존재를 되찾기 위해 미텐메츠와 지상으로 올라가게 되는데...
* 뱀발
1권은 솔직히 좀 지루했지만, 2권은 숟가락을 들고 책장을 넘길 정도로 흥미가 진진하다. 미텐메츠와 호문콜로스의 만남에서부터 책은 급격히 흥미로워지는데, '책의 도시'라는 제목에 걸맞게, 처음부터 끝까지 '책'이 빠지지 않고, 책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 모든 사건을 꾸미는 이 등 그 어떤 존재도 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책을 통해 잃고 얻는 것들이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것도 놓칠 수 없는 재미이다. 제대로 된 '책에 관한 책'인 것.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잠깐, 나도 오름을 느낀 게 아닌가 싶은 착각에 빠졌다. 기쁨과 슬픔이 묘하게 공존하며, 뭔가 놓친 구절이 있지는 않을까 처음부터 다시 찬찬이 읽어볼까, 하는 등등의 아쉬움과 조바심까지 들었으니 말이다.
생각해 보면, 내게 '오름'을 관통하게 해 준 책이 딱 두 권 있다. 물론 오름의 경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누구에게라도 "나 이 책 읽고 제대로 완전히 찌르르~했소."라고 말할 수 있는 책.
그 하나가 신경숙의 <깊은 슬픔>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내 기억으로는 3개월 정도 아픔의 바다에서 죽도록 허우적대며 내 감정과 고군분투했었다. 다시 읽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책이었다.
그리고 하나는 칼릴지브란의 <예언자>. 이 책은 중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방학 선물로 주신 거였는데, 역시 방학 내내 이 책의 여운에 젖어 혼자 기쁘다가 슬프다가, 뭔가 대단한 세상의 이치를 발견한 것처럼 까불어대다가, 인생 별 거 없다는 허무주의에 빠졌다가, 혼자 어린 마음에 분주한 감상의 사치를 즐겼었다.
묘한 것은, 이 두 책이 모두 지금 내 수중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 저기 빌려주다, 나에게로 돌아오지 못한 책이 되어버렸다.
이 책에서는 꿈꾸는 책들과 살아 있는 책들, 그리고 결국 꿈에서 깨어나는 책들이 존재하는데, 살아 있는 책들은 꿈꾸는 책들과 달라, 기거나 걸어서 이동하고, 호문콜로스를 추종하고, 다른 존재를 위협하거나 죽이기도 하며, 먹이를 두고 서로 싸우는, 지극히 사고가 가능한 책들이다. 다만 그들이 말을 한다는 구절은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었으나, 내 책장의 책들이 꿈에서 깨어난다면, 내게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어이~ 나는 언제 마저 읽어줄 생각인 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