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레라 시대의 사랑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7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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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페르미나 다사가 학교에 가는 도중에 발견할 수 있도록 미리 정해진 장소에 편지를 숨겨놓은 다음, 한숨도 자지 못한 채 간밤의 사랑으로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모습으로 종종 출근하곤 했다. 반면에 그녀는 아버지의 경계의 눈초리와 수녀들의 심술궂은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화장실에 틀어박히거나 수업 시간에 필기를 하는 척하면서 간신히 학교 공책의 반 페이지만을 채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편지를 짧게 쓰는 것이 시간이 없거나 누군가에게서 급습을 받을 위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성격이기도 했다. 그녀의 편지는 그 어떤 감정의 위험도 피했으며, 단지 항해 일지를 쓰듯이 성실하게 자신의 일상적인 일들을 이야기하는 데 그쳤다. 사실 그녀에게 있어 그 편지들은 심심풀이용으로, 자기 손은 불에 넣지 않으면서 뜨거운 불길을 유지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반면에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한 줄 한 줄마다 자신을 불태우고 있었다. 자신의 광기를 그녀에게 전염시키고 싶어 어쩔 줄 모르던 그는 바늘 끝으로 동백꽃잎에 세밀하게 새긴 시를 보내곤 했다. 편지 안에 한 줌의 머리카락을 넣을 용기를 낸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그였다. 그러나 그는 그토록 갈구하던 페르미나 다사의 땋은 머리카락 한 움큼은 받지 못했다.(124~125p)

자존심 때문이라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마지막 말을 삼켜버릴 수 있는 고집 세고 콧대 높은 여자, '페르미나 다사'. 그녀의 13세 모습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소설은 깡마르고 서정적이며 사랑을 위해 온전히 미칠 수 있는 어설프고 고집스런 한 남자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일생을 그리고 있다.

재봉틀을 돌리고 있던 그녀를 처음 만난 아주 짧은 한 순간. 그의 나이 17세에 하나의 깊고 선명한 점으로 각인된 이 순간이 그토록 긴 사랑의 여정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53년 7개월 11일의 밤과 낮이 지난 때에야 알게 된다는...

작가 마르케스가 부리는 언어의 마술을 제대로 느끼려면 지나치게 글에 몰입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진지하다가도 일순 가벼워지고, 이글이글 불타오르던 사랑의 정열과 고통도 그의 냉소적이고 직선적인 표현 앞에선 한 순간에 우스꽝스러워지고 만다. 너무 차갑지만 않게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면 글이 요리하고 있는 상황을 아주 잘 파악할 수 있을 것.

나는 주로 버스를 타고 출퇴근 하는 시간을 이용해 책을 읽는데, 이 책을 읽는 동안은 버스 한 구석에서 시종 입꼬리를 실룩거리고 킥킥 대는, 점잖지 못한 나를 주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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