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잡아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0
솔 벨로우 지음, 양현미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구판절판


"저는 이런 말도 들어봤습니다." 윌헬름이 한마디 했다. "사람의 가치는 그가 사랑하는 것에 의해 정해진다는 말이요."-21쪽

누군가 말했듯이, 그리고 윌헬름도 동의하듯이, 로스앤젤레스는 전국의 모든 느슨한 것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마치 미 대륙이 한쪽으로 기울어져서, 나사가 단단히 조여져 있지 않은 것들은 전부 다 캘리포니아 남부로 쏟아져 내려온 것처럼 말이다. 윌헬름 또한 그런 느슨한 것들 중 하나였다. -28쪽

이 사건에 관한 이야기는 워낙 길고 복잡한 데다 여러 가지 버전이 존재한다. 사건의 진상은 누구도 들은 바가 없다. 윌헬름은 처음엔 자화자찬을 하느라 거짓말을 했지만, 나중에는 스스로에 대한 동정심에서 거짓말을 했다. -29쪽

아무도 만족할 줄을 모른다. 윌헬름은 성공한 사람들의 냉소주의를 보면 특히 가슴이 서늘해지곤 했다. 냉소중의는 모든 사람의 일용한 양식이 되어 버린 것 같다. 빈정거림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 심지어는 필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31쪽

윌헬름은 자신의 고통을 덜어 보려고 말을 시작했다가, 오히려 동정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심문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90쪽

단지 기능주의적으로 설명하자면, 사람들은 뭔가를 쏘아 죽이려고 객장에 가는 거야. 그들은 말하지. '나는 한 방 터뜨리러 간다'고. 그런 표현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야. 단지 진짜로 사람을 죽일 용기가 없기 때문에 상징물을 대신 내세운 것이지. 돈이라는 상징물을. 사람들은 환상 속에서 한 방 터뜨리는 거지. 그러나 숫자 세기는 항상 가학적인 행위야. 때리는 것처럼. 그래서 성서에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세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거라네. 그들은 그 행위가 가학적이라는 것을 알았거든.-118쪽

살인자는 살인을 저지를 때마다 자기 내부에서 사기 치고 속이는 영혼을 죽이길 원하지. 그러면 그의 적은 누구일까? 바로 그 자신이야. 그러면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역시 그 자신이지. 그러므로 모든 자살은 살인이고 모든 살인은 자살이야. 둘 다 동질적인 하나의 현상이지.-121~122쪽

내 시에서 중요한 착상은 합체와 해체야. 둘 사이에는 중간 지대가 없어. 기계주의는 해체야. 돈도 물론 해체지(중략) 인간은 창조도 하지만 파괴도 한다네. 중립은 없어......-131쪽

사람마다 각자 알고 있는 뭔가가 있는 것 같다. 탬킨 박사님 같은 사람조차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지만, 과연 몇 사람이나 그렇게 할 수 있을까?-133쪽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고안한 독자의 언어를 사용하며, 자기 고유의 생각과 독특한 방식을 가지고 있다. 물 한 잔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하느님이 천상과 지상을 창조한 일로 거슬러 올라가 이브의 사과, 아브라함, 모세와 예수, 로마, 중세, 화약, 미국 독립전쟁을 읊은 다음 뉴턴으로 되돌아갔다가 아인슈타인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나서는 전쟁과 레닌, 히틀러까지 언급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검토하고 똑바로 재정리한 다음에야 비로소 물 한 잔에 관한 이야기를 진행시킬 수 있다. "쓰러질 것 같아요. 제발 물 좀 주세요." 이렇게 해서 의사소통이 되었다면 당신은 그나마 다행이다. (이어서)-143쪽

(이어서) 이런 일은 우리가 만나는 사람마나 언제나 되풀이, 또 되풀이되고 있다. 이리저리 해석하고 또 해석하고, 설명하고 또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남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남에게 이해받지 못하거나, 제정신인 사람과 미친 사람을 분간하지 못하거나,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구별하지 못하거나, 젊은이와 늙은이를 가려내지 못하거나, 병든 사람과 건강한 사람을 식별하지 못하는 것은 지옥에서 벌을 받는 것과 같다. 아버지는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니고, 아들은 더 이상 아들이 아니다. 낮에는 자기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고 밤에는 자기 자신과 이치를 따져야 한다. 뉴욕 같은 도시에서 대화할 상대가 달리 또 누가 있겠는가?-143쪽

그러다가 사라들의 코와 눈과 이를 기형적으로 만들고 조각조각 나누어서 괴물로 보이게 만드는 그 어둠의 터널 속에서, 급한 움직임과 열기와 어둠 속에서, 윌헬름은 불완전하고 기괴해 보이는 인간들에 대한 범인간적인 애정이 갑작스럽게 복받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 인간들을 사랑했다. 그들 모두를 하나같이 정열적으로 사랑했다. 그들은 그의 형제이고 자매였다. 그 자신도 불완전한 기형이었지만, 이 불타는 사랑으로 그들과 결합되어 있다면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걸어가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자신과 그들 모두를 축복하면서 "오, 내 형제들이여, 내 형제자매들이여."라고.-145쪽

그날 오후 그의 가슴속에 이런 애정 어린 친절이 충만해졌지만 그는 이를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것이 결국 무슨 소용이 있는가? 사람들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고, 이따금 그 능력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그처럼 본의 아닌 감정을 갖게 된다. 이것은 지하철에서 으레 일어나는 일 중의 하나이다. 마치 이유 없이 성기가 발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145쪽

간혹 사람들이 어떻게 병적인 죄의식에서 자신을 해방시켜 본능을 따르는지 자네에게 보여 주고 싶었네. 여자는 남자를 죄의식으로 병들게 해서 불구로 만드는 재주를 타고나지. 이것은 아주 특별한 해체 행위야. 여자는 남자를 저주하여 남자구실을 못 하게 만들지. 마치 '내가 허락해 주지 않는 한, 너는 절대로 사내가 못 돼.'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166쪽

자네에게 고통과 결혼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어. 그런 사람들이 좀 있거든. 그들은 고통과 결혼해서 꼭 부부처럼 함께 먹고 자고 하지. 그러다가 즐거움을 알게 되면 자기가 간통을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가 된다니까. -167쪽

"그 사람들은 살고 싶지 않은 거야. 아니면 왜 이렇게 전쟁이 많겠어? 내가 좀 더 말해 볼까. 죽어가는 사람의 사랑은 한 가지 목적밖에 없어.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네도 같이 죽자는 거야. 왜냐하면 그들이 자네를 사랑하기 때문이지. 그러니 착각하지 말게."-169쪽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벽에 나란히 붙어 서서 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죽은 사람을 보기 위해 관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는 행렬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그도 그 행렬에 끼어 천천히 천천히, 한 발 한 발 움직였다. 그는 가슴에서 뛰는 고동 소리가 불안하고 무겁고 무서웠지만, 관으로 다가가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멈춰 서서 죽은 사람을 내려다보았을 때는 뭔가 풍요로운 느낌도 받았다. 죽은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 그는 호흡을 멈추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은 부어오르고, 눈은 눈물이 맺혀 커다랗게 빛났다. -196쪽

그의 눈썹은 마치 마지막으로 깊은 생각에 잠긴 듯이 치켜 올라가 있었다. 온갖 방해가 다 끝나고 살이 썩어 가는 지금에서야, 생애의 마지막 생각에 빠져있는 것 같았다. 명상에 잠긴 듯한 망자의 표정에 충격을 받은 윌헬름은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196~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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