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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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다, 라고 말하기에는 그의 작품 중 <The Human Stain>과 <Portnoy's Complaint>를 영어로 띄엄띄엄 읽은 게 전부였다. 오히려 다른 작가들의 작품론이나 에세이를 읽으면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그의 작품 성향과 영향력을 먼저 접하게 되었으니 이거 순서가 완전히 뒤집힌 꼴이었다. 원서를 척척 읽어내지 못하는 비루한 영어 실력 탓을 먼저 해야겠으나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건 내가 제대로 작품을 읽어보지도 못한 채 필립 로스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Portnoy's Complaint>의 경우는 예전에 번역되어 나오기도 한 모양이었지만 지금은 찾을 수가 없고, 그러니 한국어로 된 그의 책은 전무한 상태였다.  

아마도(거의 99% 그렇게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노벨문학상 특수를 노린 발빠른 출간이 아니었을까 싶지만 목적이야 어찌 되었든 필립 로스의 작품이 번역, 출간된 일은 두 팔 들어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반도 제대로 읽지 못한 원서에서 받은 인상과 느낌은 불확실한 것이었고, 군데군데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번역서를 통해 그 구멍을 조금이나마 메워나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Everyman. 이것은 책의 제목이기도 하고, 소설 속 주인공 아버지의 보석가게 이름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한 남자의 하관식에서 시작해 그의 삶이 죽음에 이르는 시간동안 일어나는 몇 가지 사건으로 이루어진다. 지독하게 평범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지독하게 고통스럽다. 저물어가는 한 남자의 삶에 대해, 그 남자가 가질 법한 고뇌와 시시각각 달라지는 심리상태에 대해, 어느 순간 살아간다는 게 죽어가는 게 되어버리는 시간의 잔인함에 대해 이렇듯 써내려갈 수 있다니. 놀라운 사건이랄 게 없는 이야기는 죽음을 향해 있기에 서늘한 공포체험이 된다. 삶은 또는 죽음은 그런 거야, 라고 지독하게 평범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공포는 극대화되고 돌연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다.   

"먼저 어머니가 돌아가셨죠." 남자가 말했다. "여섯 달 뒤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 여덟 달 뒤에는 또 하나뿐인 누나가 죽더군요. 일 년 뒤에는 결혼생활이 망가져 아내가 모두 갖고 나가버렸습니다. 그러자 누가 나한테 다가와 이렇게 말할 거라는 상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네 오른팔도 자를 거다. 그걸 견딜 수 있을 것 같냐?' 그렇게 그들은 내 오른팔을 자릅니다. 그들은 나중에 다시 와서 말합니다. '이제 왼팔을 자르겠다.' 왼팔도 자르고 난 뒤 어느 날 그들이 돌아와서 말합니다. '이제 끝내고 싶으냐? 이걸로 충분하냐? 아니면 계속 네 다리도 잘라나갈까?' 나는 그동안 내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언제, 도대체 언제 끝을 내야 할까? 언제 가스를 켜고 머리를 오븐에 박아야 할까? 언제쯤 이만하면 됐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그렇게 십 년 동안 슬픔을 안고 살았습니다. 꼬박 십 년이 걸리더군요. 그래서 슬픔은 마침내 끝이 났는데, 이제 이놈의 병이 시작되더군요." – 74쪽  

죽음과 삶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정점에 다다랐을 때 평화롭게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 여운을 이겨내기 힘들어서 다시 소설의 처음으로 돌아가 그의 하관식에서 가족들이 하는 이야기를 다시 읽는다. 비로소 조금 안심이 된다. 뭐랄까, 살아남은 자들의 삶이 있고, 그들 역시 언젠가 죽음을 맞겠지만 그 후로도 살아남은 자들의 삶이 계속 이어질 거라는 데에서 나는 그만 안심한다. 에브리맨 속에서 썸바디를 찾거나 혹 내가 그 썸바디가 되기를 바라는 삶이 종결된 후에도 남아 있어 줄 에브리맨들이 나를 위로한다. 그렇게 삶은 계속될 거라는 위안이다. 어쩌면.  

소설 속에서 그가 인용한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 일을 하러 간다'는 말 그대로 작품을 쓰는 듯한 작가다. 그의 다른 작품들도 번역되길 바란다. 어쨌든 이 한 편으로 필립 로스를 좋아해, 란 말이 좀 덜 민망해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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