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더 귀하다 - 아픔의 최전선에서 어느 소방관이 마주한 것들
백경 지음 / 다산북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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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장 리듬 분석지를 출력해서 구간별로 잘라낸 뒤 A4용지 여섯 장에 차례로 정리했다. 첫 장은 서머리summary, 요약본이다. 처음 심장 리듬을 분석한 순간부터 병원에 도착해 제세동기 패치를 몸에서 떼어낼 때까지의 과정이 시간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다. 용지 여백에 인적 사항과 현장 상황을 간단명료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길게 소설처럼 적어봐야 달라지는 게 없기 때문이었다. 메마른 죽음은 그렇듯 낭만이 증발한 문장이라야 가치를 인정받는다. 두 번째 장은 이니셜initial, 최초 리듬, 세 번째부터 다섯 번째 장은 가슴압박 및 이송 중 리듬이다. 그래프는 홀로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던 심장이 기계의 전원이 꺼지기도 전에 잠잠해진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마지막 여섯 번째, 병원 도착 전 리듬까지 정리를 마친 뒤 A4용지를 스캔해서 PDF 파일로 만들었다. 깔끔해서 보기 좋았다. “

12층 아파트에서 스스로 몸을 던진 12살 소녀를 수습하면서 소방대원인 작가가 진행한 업무보고서다. 이 깔끔하고 보기 좋았다는 보고서의 그 어디에도 소녀의 마음을몰아댔던 고민과 눈물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12살 아이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흔적 치고는 너무나 차갑고 딱딱하다.

매일 누군가의 죽음을 만나야 하는 일, 심지어 그 죽음의 과정을 복기하고 냉정하게 기술하기 위해서는 결코 따뜻하고 말랑거리는 심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을듯. 특히나 타인의 죽음을 그저 의미없이 관망하거나 심지어 그들의 죽음을 기다리는 듯 보이는 인간들의 존재를 목격할 때마다 저자는 분노하고 좌절한다.

비루하고 처절한 삶을 꾸역꾸역 이어가면서도 ’미안하다‘ ’감사하다‘를 입에 달고사는 사람들과 혹은 그런 사람들의 죽음 마저도 어느 순간 무감각해져버리는 것이 아닐까 고민하던 작가에게 심폐소생술 같은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 책을 쓰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 않았던 작가가 우연히 틀었던 수도꼭지가 잠기지 않아 콸콸 물이 쏟아지는 것을 보고 갑자기 펑펑 울었다는 책의 마지막 이야기에서 그저 찡했다.

“ 처음 심폐소생술을 한 날 손바닥 아래서 노인의 복장뼈가 박살 나던 감각이 떠올랐다. 나일론 줄로 목을 매고 죽은 남자를 바닥으로 끌어 내릴 때 맡은, 죽는 순간까지 살고 싶어 했던 사람의 진한 땀 냄새가 떠올랐다. 까마득한 동공 안에 세상의 한 줌 빛이라도 더 담아가려 했던 어린아이의 눈동자도 생각났다. 아이의 조막만 한 눈꺼풀을 열었다 닫는 순간 손끝을 적신 한기가 아직 생생했다. 그제야 외할머니의 죽음을 두고 울 수 없었던 이유를 알았다. 그건 내가 수도꼭지를 꼭꼭 잠가두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야만 구급차를 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고장 난 수도꼭지 앞에서, 나는 오래도록 울었다. ”

늘 우리를 경직되고 얼어붙게 만드는 상황은 있게 마련이다. 다만 그 냉기에 압도되어 내 심장까지 꽁꽁 얼음장처럼 변하게 놔둘 것인가 아닌가는 조금 다른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꾸준히 10킬로 달리기를 하면서 늘어지는 자신의 삶에 긴장을 주었다는 작가의 습관도 절대 상황에 지지않겠다, 따뜻한 피와 살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잃지않겠다는 투지와 힘을 느꼈다. 생존하기 갈수록 팍팍하고 ‘인간임’에도 그 ‘인간임’을 유지하기 힘든 날이 계속되는 요즘이지만, 이렇게 힘내면서 사는 이웃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큰 격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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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떠올리며 시작한 글쓰기가 삶의 위로가 되어준 것이었다. 기운을 차린 나는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구급차를 타면서 만난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유서 대신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 기록은 부풀린 연민이나 한 달에 2만 원을 후원해야 한다는 부담이 배제된 것이었고, 오히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삶을 드러냈다. 그 사람들 또한 나와 같은 무게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걸 깨닫자 마침내 비구름이 걷혔다. 애초에 그건 내가 만들어낸 허상이었다. 가난하고, 아프고, 죽음을 앞두고 있을지언정 그들은 힘껏 살아가고 있었다.

당신이 더 귀하다 | 백경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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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 : 알려진 혹은 비밀스러운
라데크 말리 지음, 레나타 푸치코바 그림, 김성환 옮김, 편영수 감수 / 소전서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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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에 대해서는 <변신> 빼고 아무것도 모르던 상태에서 단편소설들부터 하나씩 읽었었다. 당췌 뭔 소린지 알 수가 없어서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카프카가 가지고 있는 예민하고 불안정한 심리가 투영된 소설들이 하나씩 마음에 다가오기 시작했다. 섬세하고 예민한 카프카에게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되었던 아버지와의 갈등, 각혈과 기침을 멈추지 않던 불안한 건강상태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았던 소설쓰기에 대한 열정이 다시 보였다.

카프카의 작품에는 예술의 창조적 성취에 대해 대중이 얼마나 잔인한 몰이해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으로 드러나는데, 특히 소설 <단식 광대>는 자신의 생애를 걸고 노력한 예술적 성취가 하찮게 취급당하고 결국 허무하게 죽음을 맞는 광대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한 것이 아닌가 싶어 숙연해진다. 그런 이유로 자신이 죽고난 후에 모든 작품들을 다 모아서 태워버리라고 유언했던 것은 아니었을지.

알쏭달쏭 했던 카프카에 대해 그의 생애와 작품들, 약혼과 파혼을 거듭했던 그의 주변에 있었던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한 번에 정리해서 읽을 수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어디선가 읽었었던 카프카와 인형을 잃어버렸던 소녀와의 일화가 마지막에 정리되어 있어서 너무나 반가웠다. 카프카가 절대 예민하고 불안, 강박에 시달리기만 했던 신경질적인 사람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일화라서 너무나 감동적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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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에게서 온 편지: 어느 아이의 기억 속 카프카

카프카의 연인이었던 도라는 카프카에 대한 인터뷰에서 두 사람이 베를린에서 보낸 그의 마지막 해에 있었던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언급했다. 1923년 어느 가을날, 집 근처인 슈테클리츠 지구의 한 공원에서 두 사람은 울고 있는 어린 소녀를 만났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소녀가 인형을 잃어버렸다고 대답하자 카프카는 바로 이렇게 말했다. “네 인형은 여행을 떠났는데, 나에게 편지를 보내서 내가 잘 알고 있어.“

소녀는 그 편지를 보고 싶어 했고, 일면식도 없던 아저씨인 카프카는 마치 우체부가 된 듯 내일 반드시 편지를 가져다주리라 약속했다. 카프카는 매우 진지하게 3주 내내 인형이 쓴 편지를 써서 소녀의 인형에 대한 사랑을 지켜 줬다. 심지어 인형이 돌아오지 않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해외에서 인형을 결혼시키기까지 했다. 몇 세대에 걸쳐 카프카 연구자들은 이 편지의 소녀를 찾았지만 여전히 그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 베를린 어딘가에 1백 세 넘은 어느 할머니가 검은 모자를 쓴 야윈 아저씨를 떠올리며 여전히 미소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추억 속 카프카는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의 시대와 지금 우리의 시대를 동시에 살았던 한 사람으로.

프란츠 카프카: 알려진 혹은 비밀스러운 | 라데크 말리 (지은이), 레나타 푸치코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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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와 함께 춤을 - 시기, 질투, 분노는 어떻게 삶의 거름이 되는가
크리스타 K. 토마슨 지음, 한재호 옮김 / 흐름출판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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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시기, 질투, 쌤통, 경멸 같은 부정적인 마음은 살면서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지만 어쩐지 그런 감정을 가지는 것은 해서는 안되는 일처럼 느껴져서 스스로 힘들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저자는 감정은 우리가 어떤 사실을 깨닫고 아는 것보다 먼저 다가오는 것이고, 심지어 우리가 몰랐던 사실을 발견하도록 도와주기도 한다고 말한다. 거꾸로 우리는 중요하거나 신경쓰이는 것에 감정을 쏟기도 하는데,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가 결코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을 무시하거나 억지로 감추고 없애려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스토아학파처럼 ‘감정을 통제하려는‘ 사람들의 경우, 인생에서 어떠한 기쁨의 감정도 슬픔의 감정도 없이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보이는데, 이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느끼는 감정을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부자연스러운 가정을 깔고있다. 인간세계에 대한 이런저런 집착을 버리고 살아야 한다는 것인데, 과연 나쁜 감정을 피하기 위해서 껍데기 속 거북이처럼 살아가는 것이 가치가 있을까 생각해 볼 문제다. 작가는 인간사의 혼란스러움에 휘말리지 않으려 애쓰는 것은 인간성을 버리려기 힘쓰는 것과 마찬가지라 말한다.

이와는 달리 ‘감정을 길들이려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감정을 통제하기 보다는 협력해야 한다, 즉 단련해야 한다는 쪽이다. 예를 들면, 직장에서 좌절감을 느끼면 좌절감을 인정하되 직장이 있는 것은 행운이라는 걸 떠올려야 한다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관점을 바꾸면 좌절감을 사라질 태지만, 그러나 내가 좌절감을 느낀 상황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왜 그 감정을 대체하려 애써야 하는가는 생각해 볼 문제다. 나쁜 감정을 느낀다고 해서 내가 나쁜 사람이나 속 좁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균형감을 갖는다고 해서 항상 밝은 면을 봐야 하는 것은 아니며 그런 태도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을 뿐이다.

“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은 대부분 단순한 오해에 지나지 않는다. 부정적인 감정은 독소나 독약이 아니며 당신을 잡아먹지도 않는다. 부정적인 감정은 인간관계를 망치지 않으며 그걸 극복한다고 해서 더 큰 사람이나 더 나은 사람이 되지도 않는다. 물론 그런 감정에 따라 행동하면 안 되는 이유는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감정을 느끼거나 표현하는 게 잘못된 일은 아니다. ”

정말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부정적인 감정이 생긴 나는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고, 당장 큰 일을 낼 악한도 아니다. 그저 그런 감정이 드는 것일 뿐, 이런 감정을 억지로 부정하거나 다른 쪽으로 돌려 감추려한다면 이것은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니다. 저자는 나쁜 감정은 자기애의 표현이며, 그건 우리가 자신의 삶과 자신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이기 때문에 나타난다고 말한다. 자신의 불완전한 모습에 실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는 몽테뉴에 대한 언급도 눈에 띈다.

“ 몽테뉴 작품의 큰 주제 중 하나는 인간 본성의 불완전함이다. 우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일관성이 없으며 의지가 약하고 자신의 결점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몽테뉴는 이 모든 걸 인정하면서도 절망하지 않는다. 결점이 있음에도 삶과 자신, 인간을 사랑한다. 니체는 이런 마음가짐에 감탄했다. ”

슈테판 츠바이크가 몽테뉴의 수상록을 그의 마지막 저술로 선택했던 이유가 이제사 이해된다.
니체 또한 ’아모르 파티’에서 ’운명에 대한 사랑‘ 또는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메세지를 던졌다. 이는 좋은 것과 나쁜 것, 즐거운 것과 고통스러운 것, 그리고 야성적이고, 자의젹이고, 환상적이고, 무질서하고, 경이로운 모든 것을 포함한 삶 전체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쁜 감정을 포기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삶의 한 모습으로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책을 읽고나니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어쩐지 안심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용기가 되는 듯도 하다. 절대 내가 이상해서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 드는 것이 아니라니. ‘우리가 고통과 비탄, 분도, 질투를 느끼는 까닭은 우리가 연약하고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삶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라니. 다양한 감정의 홍수 속에서 출렁거리면서 그렇게 사람들과 짠내나는 인간스러움을 풍기며 사는 것이 당연하고 너무나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확인해주는 책 같아서 읽는 내내 너무 기분이 좋았다. 어쩐지 몽테뉴를 다시 꺼내서 읽어야 할 것 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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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문장
구병모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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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 작가. 만연체 문장에 꾹꾹 눌러담긴 유머코드, 독특하고 익살스러운 음율의 의성어 의태어를 아무렇지않게 문장속에 툭툭 던지면서 읽는 사람 마음을 짜릿짜릿하게 하는 것 역시 그녀만의 시그니처. 흡사 박찬욱 감독 영화에서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 인물을 몰아넣고 독자들을 작품 속 캐릭터와 심리적으로 감정이입하도록 하는 재주 또한 탁월하다. 특히 <로렘 입숨의 책>을 읽으면서는 구병모라는 작가에 대해서 새로운 평가를 하게됐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프로의식인지 ‘쓴다는 것’ ‘문장’ ‘동사’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이 담긴 글. ‘작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작품에 담아내는 작가로구나 싶었다.

<단 하나의 문장>은 앞서 보여준 작가의 팔색조 매력을 모조리 다 담아놓은 종합선물세트 같은 느낌이다. 유머코드는 기본, 주사 테러를 당해서 갑자기 여자로 성별이 바뀐 남자, 자신의 순수한 호의가 ’어? 이용당한거 아닌가?‘ 싶게 기분 더러워지는 여자, 시체로 발견된 남자의 주머니에서 자신의 명함이 발견됐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출두해야 하는 직장인 등 황당하면서도 호기심 동하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글쓰는 사람‘으로서의 역할과 긍지, 존재의 의미를 묻고 답하는 이야기도 이전보다 한층 더 짙어진 느낌이다. ‘집필 노동자’로서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무연고자 정체불명의 시체에게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 읊어주는 장면은 숙연하기까지 했다. 특히 <오토포이메이스>는 그야말로 압권이다. 글을 쓰는 직업이 사라지고 사람들은 점차 문자를 잊어가는 미래시대, 특수한 목적을 위한 스토리메이킹을 담당하는 인공지능 시스템이 무한학습과 생산을 이어나가고 급기야 AI ‘백지’는 스스로 자신이 왜 글을 쓰고 있는 것인지를 자문한다.

나는 왜 쓸까요.
소설이 원래 기쁨과 즐거움을 주기 위한 것인가요.
그것 말고 다른 것은 없을까요.
또는 반드시 무언가를 주어야 하는 것인가요.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된다고, 내게 말해준 사람이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쓸데없는 고민을 하기시작한 ‘백지’는 결국 폐기되고 오랜 시간 후에 깨어난 ‘백지’는 자신의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백지’는 어느 여인이 들려준 전설같은 이야기, 오래전 어느 왕이 구했다는 세상의 진지를 담은 단 하나의 문장을 찾기 시작한다. 문자를 잊어버린 그 여인은 더듬더듬 기억하고 있는 문자들 일부를 그려보여주고, 백자는 마침내 수많은 조합을 거쳐 딱 두 가지 문장 “허무로다,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와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후보로 남겨놓는다. 시간이 흘러 여인은 마침내 ‘백지’ 자신의 데이타베이스에 없던 글자를 써내려간 흔적을 발견하고 그 문장이 적힌 단 한 문장을 받아들지만 읽어낼 수는 없다.

인공지능이 많은 직업을 없애버릴 것이라는 근거있는 예측이 난무하는 요즘, 작가로서의 정체성에 위협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할 듯. 구병모 작가는 이런 현실에서 ‘작가’가 인류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고민하면서 ‘작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용도있는 글을 찍어내듯 양산하는 글쓰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에게 인간임을 기억하도록 끊임없는 자극을 주는 존재가 되는 것, 미래에 대한 아무런 힌트나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조차도 절망하지 않고 끊임없이 조금씩 써나가는 존재가 바로 작가라는 것. 이런 이야기를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에 감정이입해서 느끼게 해주는 방식도 참 아이러니하다.
_________

그러나 당신은—세상에 있는 사람의 수만큼 이야기가 존재하고, 그 누구 할 것 없이 자신이 한번 입을 열기 시작하면 대하장편으로도 모자란다는 이들이 숱하며, 제아무리 어떤 사고뭉치나 가해자였더라도 아름다운 대상으로 화장하여 경의의 대상으로 등극시키는 다양한 술법들이 횡행하는 가운데, 어째서 당신에게만은 이름이 없고 아무런 이야기가 없는가. 어째서 당신은 그 어떤 남루하고 상투적인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가.

—여기 누운 사람 중에 그만한 사정 없는 사람도 다 있나?

...... 그것이 세상 어디서도 온전한 자신의 몫을 인정받지 못하는 대필 작가이자 기획 작가이며 짜깁기 전문 이야기꾼으로서의 집필 노동자인 내가 이 세상에서 건넬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다. 들어봐, 당신의 이름은 K. 1974년 서울, 치과의사인 아버지와 음대 교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지. ......

단 하나의 문장 | 구병모 저

#단하나의문장 #구병모 #문학동네 #독서 #책읽기 #북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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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188
빅토르 위고 지음, 이형식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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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밖에 몰랐는데 이런 대작도 썼다니. 처음 알았다. <레미제라블>의 탄탄한 인물설정과 갈등구조, 시대와의 연결성 등이 하루아침에 저절로 된 것이 아님을 알겠다.

소설 <93년>은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된 1793년 1월 이후 잔혹한 피의 혁명을 원하는 세력들에 의한 ‘공포정치‘가 이루어지던 시기, 반공화파 사제들과 왕당파 일당의 사주를 받아 일어난 농민 봉기를 제압하고자 빠리 혁명정부가 파견한 공화파 부대와 왕당파 반군 사이에 벌어진 내전을 배경으로 한다. 어느 유서깊은 귀족가문이 이 내란에 흡쓸리는 감동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이야기다. 가난과 피폐한 삶이 주된 갈등의 원인이었던 <레미제라블>보다는 배경부터 정치색이 강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혁명을 원하는 공화파에 반대하며 대항하는 왕당파 반군 사령관은 팔순의 노인 랑뜨낙이다. 그는 국왕과 그의 자녀들을 죽이고 감옥에 가두는 등 핍박하는 공화파에 복수하기 위해 혁명에 찬성했던 백성들에게 총을 난사하기도 하고, 영국군을 끌어들여 승리를 쟁취하고자 한다.

한편 그와 맞서는 공화파 군대의 젊은 사령관 고뱅은 맹렬하게 토벌작전을 펼친다. 고뱅은 랑뜨낙의 손자다. 같은 가문의 두 사람이 서로다른 정치이념 때문에 서로에게 총질을 하는 것이다. 고뱅은 어릴 때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바깥일에 바쁜 할아버지 때문에 거의 가정교사 씨무르댕과 둘만 생활하면서 성장했다. 혁명적인 생각에 심취했던 씨무르댕은 어린 귀족의 정신이 이상적인 생각들을 주입하며 마치 자신의 분신인듯 애정을 가지고 보살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그렇게 전쟁을 벌이던 중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생포되고, 혁명 정부 공안 위원회가 파견한 감독관 씨무르댕은 ‘사면도, 처형의 유예도‘ 금지한다는 공안 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랑뜨낙을 처형하려 한다. 하지만 불에 탄 성안에 갇혀 죽을 뻔한 세 아이들을 구조하고 체포되는 할아버지 랑뜨낙의 고결한 행동에 감동한 고뱅이 그를 탈옥시키고, 씨무르댕은 공안 위원회의 포고령에 따라 고뱅을 처형하면서 동시에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혁명을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는 강경파 씨무르댕과 인간적인 것을 지키기 위한 혁명을 따르려는 고뱅의 설전이 후반부의 압권이다. 귀족들로부터의 억압을 타파하자면서 집안에서 여자는 늘 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인습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는 혁명의 수뇌부들의 본모습. 그들에게 일침을 놓듯이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국가를 역설하며 당당히 단두대에 목을 내놓는 고뱅의 젊은 혈기와 당당함이 멋지게 그려진다.
그런 제자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순간 권총으로 자살을 탁하는 씨무르댕을 보면서 과연 누구를 위한 혁명인가, 진정한 혁명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세 사람의 이야기 말고도 생각해 볼 부분들이 많다. 도피하면 살 수 있었지만 불타는 성에서 아이들을 구출해서 나오는 랑뜨낙을 보면서 공화파 부대의 군인 라두와 랑뜨낙이 나누는 대화가 그렇다. 각자 정치적 신념은 달라도 아이들을 구해야한다는 목표는 같았기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함께 한 마음이 될 수 있었다.
할아버지 랑뜨낙의 체포 과정을 알게된 손자 고뱅도 그런 행동의 근본에는 ‘양심’이 발현했다는 것을 깨닫고,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개인의 바꿀 수 있는 미래가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저마다의 ‘도덕적 투쟁‘이라고 성찰한다. 이 부분은 <대통령의 독서> 11장 ‘태극기를 드는 마음은 달라도‘에도 연급된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니체 - 선악을 넘어서 중에서)

현실을 더 좋게 만들어보려는 사람들이 행동할 때 꼭 명심해야 할 금언이 아닌가 싶다. 절대 흥분하지 말고 냉정할 것. 무엇 때문에 혁명을 시작했는가를 늘 기억하고 냉정하게 자신의 행적을 돌아볼 것. 법과 규칙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성을 지키기위해 행동해야 함을 늘 명심할 것. 좋은 날은 결코 쉬이 오는 것은 아니나, 누구나의 마음속에 양심의 등불이 살아있으면 두려워할 필요 없다는 믿음을 가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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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화합이지 공포가 아닙니다. 다정한 이념들이 관대하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오용되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용서라는 말이 인간의 언어 중 가장 아름다운 단어입니다. 제가 피를 흘려야 할 불가피한 처지에 놓일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의 피도 흐르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게다가 제가 아는 것은 전투뿐, 저는 일개 병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용서할 수 없다면 승리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전투 중에는 우리가 적들의 적이되, 승리를 거둔 후에는 그들의 형제가 됩시다.

93년 (하) | 빅토르 위고, 이형식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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