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메리 앤 섀퍼.애니 배로스 지음, 신선해 옮김 / 이덴슬리벨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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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에서 영화를 검색하다가 이상한 제목의 영화라고 생각하며 넘겼던 영화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었다. 영화 초입에 독일군과 마을사람들이 한밤중에 마주쳐서 당황하던 장면을 보고 전쟁영화인가 싶었다. 근데 왜 제목에 북클럽이 들어가지? 알 수 없는 장르의 이상한 작품인가보다 생각했었는데.... 아뿔사. 이 책을 왜 이제야 발견했을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좋아할 것 같은 작품. 우연히, 얼떨결에 북클럽을 시작해서 무작정 책읽는 시늉을 시작했던 사람들이 정말 책, 독서에 빠져서 꾸준히 활동을 계속해간다는 이야기. 그 중심에는 ‘엘리자베스’라는 당찬 여성이 있었다. 책을 좋아하고, 위급한 순간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모변할 줄 아는 지혜가 있으며, 자기보다 더 절박한 사람에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도움의 손길을 뻗어주는 사람.

영국의 영토지만 프랑스와 더 가까운 ‘건지 섬’의 존재도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알게됐다.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의해서 점령당하고 섬으로의 출입은 물론 물자의 조달도 끊겨 주민들은 물론 상주해있던 독일군들 조차 굶주림에 허덕여야 했던 역사가 있었다고 한다. 건지 섬 안에 있는 물자, 특히 돼지나 소같은 육류의 소비는 철저히 통제되어서 주민들이 마음대로 고기를 먹을 수가 없었다. 참다못한 주민들은 비밀리에 키우던 돼지를 잡아 비밀리에 파티를 벌였고, 통금시간을 어기고 늦은 시간 귀가하던 중에 독일군과 마주친다. 위기를 벗어나고자 엘리자베스는 ‘북클럽의 독서활동이 늦어졌다’는 변명을 하고, 클럽의 이름을 대라는 위협에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라는 대답을 한다. 북클럽에 한 번 참여해도 되겠냐는 독일장교의 말에 서둘러 진짜 북클럽을 만들어야 했던 마을사람들은 서둘러 책을 구하고 각자 책을 읽기 시작한다.

전쟁 중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책을 쓰는 작가 ‘줄리엣’은 건지 섬 주민 ‘도시 애덤스’를 통해서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에 대해서 알게된다. 편지를 통해 각자의 궁금증을 해소해가던 도시와 줄리엣. 건지 섬 사람들과 북클럽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고 싶었던 줄리엣은 저돌적으로 자신에게 청혼해오는 돈많은 매력남 ‘마크’를 피해 건지 섬으로 들어간다.

너무나 개성적인 건지 섬 사람들과 주고받는 편지들, 따뜻한 남자 도시와 줄리엣의 엇갈리는 애정전선, 전쟁이 끝났지만 아직도 행방불명중인 엘리자베스를 기다리며 그녀의 딸 핏을 함께 돌보는 마을사람들의 이야기. 특히 삐죽하던 핏이 마침내 자신의 보물상자를 보여주며 줄리엣에게 마음을 여는 장면은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통통튀는 대사들이 웃기면서 감동적이고, 슬프기도 하면서 역사의 무거움을 생각하게 해주는 내용. 책 뿐만 아니라 영화도 어서 보고싶게 만들어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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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에 킷이 노끈으로 동여맨 상자를 들고 다닌다고 얘기한 거 기억해? 죽은 족제비가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한. 오늘 아침에 킷이 내 방으로 들어와서 내 얼굴을 계속 두드리며 잠을 깨웠어. 일어나보니 아이가 그 상자를 들고 있더라고.

킷은 아무 말 없이 상자의 끈을 풀고 뚜껑을 열었어. 그리고 덮어놓은 포장지를 벗겨내더니 나한테 상자를 내미는 거야. 소피, 아이는 뒤로 물러서서 내가 상자 안을 뒤적이며 그 안에 든 물건들을 모두 꺼내 침대 위에 늘어놓는 동안 계속 내 표정을 살폈어.

... (중략) ...

소피, 킷은 자기 보물을 나에게 보여준 거야. 아이는 한순간도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어. 우리 둘 다 굉장히 신성한 의식을 치른 셈인데, 이번만큼은 나도 울음을 터뜨리지 않았어. 대신에 팔을 내밀었지. 킷은 곧장 침대 위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와 내 품에 안기더니 이내 쌕쌕 잠들었어. 난 깨어 있었어! 잠들 수 없었어. 평생 킷과 함께할 앞날을 생각하니 너무 행복해서 잠이 오지 않았어.

개정판 |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 메리 앤 섀퍼, 애니 배로스, 신선해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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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자들
김초엽 지음 / 퍼블리온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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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시대의 지구, 광증을 퍼트리는 포자에게 노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인간은 어둑한 지하세계에 살고 있다. 하늘의 노을과 별빛, 지상의 황홀한 색채를 그리워하는 태린은 지상을 갈망한다. 지상을 오갈 수 있는 존재인 ’파견자‘가 되기 위해 태린은 자격시험에 응시한다. 그를 훈련시킨 선생이자 아주 오래 전부터 자신을 돌봐주었던 이제프를 동경하는 마음이 그녀를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

지하세계의 질서의 부적응자였던 태린은 그 부적응 덕분에 머릿속 ’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쏠‘의 도움으로 높은 점수로 태린이 시험을 통과하는 순간, 갑자기 ‘쏠’에게 조종당해 꼼짝없이 엄청난 사고를 일으킨다. 속죄를 위해 죽을 것이 뻔한 위험한 미션을 수행하러 떠다는 태린과 동료들. 그토록 갈망하던 지상의 세계로 올라가 인간을 노리는 위험한 생명체와 대면해야 한다. 바로 끈적거리며 서로 연결되어 있는 생명체. 네가 나를 먹고 내가 너를 먹음으로 나와 내가 한 몸이 되어 연결되는, 그러나 각자 자기의 생각이 있고 엄연히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 바로 작가가 상상한 ‘범람체’가 그것이다.

범람체들은 인간에게 자신들과 한 몸이 되어 함께 공존하자는 메세지를 보낸다. 전 우주의 모든 만물들은 결국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신기한 것은 한 몸이 되었다고 모두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설정이 독특하다.
’범람체’에 대해서 읽다보니 자꾸만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서 말하는 ‘성숙한 사랑’이 생각났다.

“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다. 사랑은 인간에게 능동적인 힘이다. 곧 인간을 동료에게서 분리하는 벽을 허물어버리는 힘, 인간을 타인과 결합하는 힘이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__사랑의 기술(5판) | 에리히 프롬, 황문수 저

태린과 “쏠”은 인간과 범람체가 공존할 수 있는 지상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한다. 범람체가 가진 ‘성숙한 사랑’의 마음과 인간이 가진 ‘매료와 증오’의 감정을 적절히 조화시켜가며 끊임없이 변화하며 균형을 찾아가는 미래를 상상한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도 결국엔 그거 아닐까 싶었다. 다음 세대, 또 그 다음 세대로 이어지며 불균형과 불완전함을 매꿔나가려는 계속적인 시도와 노력. 나 자신 조차도 나 혼자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마음을 잊지않는 것이야 말로 그 근간이 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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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그 균형이 지금처럼 유지되리라는 법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 불균형하고 불완전한 삶의 형태는 어떻게 지속될 수 있을까. ... 단지 불균형과 불완전함이 삶의 원리임을 받아들이는 것, 그럼에도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하는 것,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것만이 가능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태린은 그것이 계속해서 다음 세대로 이어질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파견자들 | 김초엽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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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읽기 세창명저산책 100
박찬국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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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읽었던 <사랑의 기술>을 독서모임에서 선정하는 바람에 다시 읽어야 했다. 당시에도 어떻게 읽어야할지 정리가 되지않아서 고전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에도 역시나 녹록치 않았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찾은 책이 바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읽기>. 덕분에 글의 중심을 찾아가며 읽기 수월했다.

에리히 프롬이 이 책을 쓸 당시인 1956년은 물질만능의 자본주의가 한창 번성하던 시대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도 진정한 사랑보다는 금전거래식의 상호 이익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세태가 만연하며 소외되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상황. 이러한 현대사회의 문제를 고민하던 프롬은 ‘자기반성과 성찰에 기반한 희생적이며 이타적인 성숙한 사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런 사랑에 도달할 수 있는 기술을 연마할 수 있는 방법을 정리했다.
<사랑의 기술>에서 다루는 문제들은 다음과 같다.

- 우리는 왜 사랑을 배우려 하지 않는가?
- 우리는 왜 사랑하려고 하는가?
- 사랑이란 무엇인가?
- 사랑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가?
- 현대인들은 왜 진정한 사람에 실패하는가?
- 사랑의 기술은 어떻게 습득하는가?

‘사랑’을 제대로 배우려하지 않는 이유는 결국 사람들이 사랑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예쁜 외모나 처세술을 이용해서 사랑스러워지기만 하면 저절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재산이나 스팩을 쌓아 스스로를 시장에 내놓고 물물교환식으로 주고받는 상품도 아니다. 또한, 첫눈에 반해서 갑작스럽게 느끼게되는 찰라의 감정도 아닌 것이다.

사람들은 ’분리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랑이 필요하다. 불확실한 미래의 상황에서 홀로 존재하는 분리는 불안의 원천이며, 나의 부족에 대한 수치심과 죄책감까지 일으킨다. 분리불안을 극복하는 진정한 방법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진정한 ’화해(합일)‘를 통해 이루어진다.

프롬은 ’독립적인 사랑‘이야말로 성숙한 사랑이라고 썼다. 이는 자신의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두 존재가 하나로 통합될 수 있는, 즉 타자의 개체성을 인정하는 관계인 것이다. 또한, 심심해서 혹은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서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내 필요에 의한 욕구의 결합일 뿐이라는 것이다. ’혼자서도 삶을 견딜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사랑에 실패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사이비 사랑에 대해서도 기억해둘 만 하다.
‘숭배적 사랑’이나 ‘감상적 사랑’ 이외에 ‘투사적 사랑’이라는 내용이 의미심장한데, 이는 관계에 갈등이 있을 때 그 원인을 상대방에게서 찾으며 자기의 문제조차도 상대의 것으로 투사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상대만 바꾸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다면 프롬이 말하는 ’사랑을 배우는 방법‘은 무엇인가.
키워드는 훈련, 집중, 인내, 관심이다.

’훈련‘은 앞서말한 투사적 상황과는 정반대다. 갈등의 문제를 자기 자신에서부터 찾고 자기 변화를 위해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집중‘은 상대와의 관계에서 정신을 집중하고 이야기에 경청한다는 것 뿐만 아니라, 분리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 공서적 합일을 이루려는 마음과 반대되는 상황을 말한다. 즉, 내가 자립할 수 없어서 상대에게 집착한다면, 그 사람은 생명을 구조하는 자일 수는 있지만 그 관계는 사랑의 관계가 아니다. 홀로 있을 줄 알아야 사랑도 할 수 있다. 혼자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와 함께 있기를 선택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 것이다.
‘인내’는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넘어지고 넘어져도 계속 시도하라는 것. 사랑의 기술은 결국 실패를 통해 조금씩 성숙해진다는 것이다.
‘관심’부분이 정말 흥미로웠는데, 프롬이 말하는 ‘관심’의 대상은 다름아닌 ’자신의 인간적 미숙함‘이다. 갈등상황에 닥쳤을 때 ‘나에게 뭐가 부족한가?’ 되물어보는 것이다. 관계의 문제를 상대방이 아닌 나 스스로에게 돌리고, 자신의 변화를 통해 관계를 개선하려는 성숙한 태도야말로 프롬이 말하고자하는 궁극적인 사랑의 기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롬이 독자들에게 전하는 사랑을 위한 마지막 조언은 두 가지다.

1)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
자신을 부정하면서 상대에게 의존하는 공서적 사랑, 환상이 깨지면 끝나버리는 이러한 사랑은 피해야한다. 사랑의 능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아도취‘를 극복하고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이성’의 작용이며, 이성의 배후에 있는 정서적 태도는 바로 ‘겸손’이다. 정리하면, 진정한 사랑은 겸손, 객관성, 이성의 발달을 요구한다.

2) 사랑에 대한 믿음을 잃지 말라
사랑은 나를 부정하고 나를 수정해나가야 하는 끊임없는 자기희생이다. 상대는 변하지 않고 아무런 보답이 없다고 해서 금방 지쳐서는 안된다. 나의 노력 속에서 상대의 변화를 기다리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보증없이 자기 자신을 맡기고 상대도 나를 사랑해주리라는 희망을 거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믿음의 작용’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 사이에 ‘분업’은 있을 수 없고, 반대로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조건이 된다. 결과적으로,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은 인간의 본성 자체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하는 합리적인 믿음이다.

휴… 사랑을 ‘신앙처럼’ 하라니. 이렇게 놓고보니 이런 결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런 대단한 결심을 지키며 행동하는 ‘나’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이며, 더 나아가 비슷한 생각을 공유할 인류 전체를 믿고 사랑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한 걸음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카피가 나온 것일까?

“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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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밀란 쿤데라 전집 1
밀란 쿤테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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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 작품 중 구입해놓고 읽지않았던 책이라 이제사 읽어봤다. 마치 종교처럼 모든 생활과 정신을 점유해버린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버린 사람들. 어떤 이는 인간성을 잊어버리고 잔인한 짓을 하기도 하고,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못해 스스로 물러나거나 절치부심으로 돌아와 복수를 하는 다양한 인물들이 그려진다.
혁명이 종교처럼 모든 것의 중심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개인적인 울분으로 했던 농담이 자신의 성공가도를 날려버린 남자 루드비크. 자기를 그렇게 만든 친구에게 복수하지만 이미 그 친구는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조금 다른 스탠스를 취하며 또다른 세계에서 자리를 잡아버린 행복한 친구의 모습에서 허탈함을 느낀다. 세상이 달라졌다. 이데올로기가 빠져버린 순수함만 남은 상태에서 일행과 함께 어린시절 좋아했던 민속음악을 연주하면서 이제사야 마음의 평화를 얻지만 아끼던 절친 야로슬라프의 죽음을 목도하게 된다.
야로슬라프라는 인물이 안쓰럽다. 옛 전통을 존중한다는 당의 방침에 따라 사랑하는 민속음악에 매진하며 당의 선전 선통에 이용당하지만, 정작 자신은 너무나 행복하다. 그가 하는 음악은 이미 당의 입맛대로 가감되어진 절반의 민속음악이라는 친구 루드비크의 비난에 절망한다. 평생을 당의 명령대로 공연을 다니고 음악을 연주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들을 찾는 횟수가 줄고 그야말로 초라한 신세가 된다.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온 절친 루드비크를 자신의 민속음악 공연에 불러 함께 연주해줄 것을 청하고, 함께 행복한 연주를 하면서 죽음을 맞는다.
이데올로기의 무서운 점은, 목표를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한다는 강박을 준다는 점인듯 하다. 간첩활동을 한 아버지도 고발하고 비판하게 하고, 그에 따른 처벌로 당에서 자신에게 벌을 주고 감시를 하는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농담 한 토막도 안되고, 자유도 용납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냉정하게 가야 할 길 대로만 가야하는 것이다. 이런 강요가 준비되어 있는 사람들 뿐 아니라 몸에 맞지않은 옷을 억지로 걸쳐입은 듯 보이는 이들에게까지 퍼부어지는 현실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이데올로기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사랑이야기라면 <농담>은 철저하게 이데올로기 비판에 대한 이야기다. 달달함을 기대하고 본다면 실망할 수도 있을 듯. 그러나 어쩌면 쿤데라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이 책에 다 담겨있는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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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공산주의자로서 자신은 어떤 경우든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행동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또 나 역시 공산주의자이며(당에서 축출되었다 하더라도) 내가 지금과는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여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책임져야 하는 거야.” 이 말은 나를 웃게 했다.
나는 그에게 책임이란, 자유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답했다. 자신은 공산주의자로서 행동하기에 충분히 자유롭다고 느낀다고. 자신이 공산주의자임을 증명해 보여야 하며, 그렇게 할 것이라고. 이 말을 하며 그는 턱을 덜덜 떨고 있었다.
오늘, 수많은 세월이 흐른 뒤, 이 순간을 떠올리면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잘 알 것 같다. 알렉세이는 그때 겨우 스무 살 청년, 어린아이였음을, 그의 운명은 마치 아주 작은 몸 위에 걸쳐진 거인의 옷처럼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음을.
농담 | 밀란 쿤데라, 방미경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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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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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데 숨겨진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서 자꾸만 몇 번씩 다시 읽어보게 되는 소설. 아일랜드 소설은 처음인듯 한데, 상당히 독특하다. 이야기의 마지막이 도대체 무엇인지 명확하게 잡히지가 않는다. 열린 결말처럼 각자가 좋은대로 상상해야 할지.

거칠고 무능력한 아버지와 다섯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 이제 출산을 앞두고 있어서 아이들 중 누군가를 친척의 손에 잠시 맡기기로 한다. 졸지에 익숙치 않은 친척 아줌마 아저씨와 함께 살게된 소녀. 사연 있어보이는 늙은 아줌마 아저씨들은 소녀에게 너무나 친철하다. 덕분에 침대에 실례를 하기도 하고 대답도 제대로 못하던 소녀는 하루가 다르게 살이 붙고 밝아진다. 마음 속 한구석에서부터 따스해지는 낯선 감각에 어리둥절 하기도 하지만 이런 분위기에도 점차 적응해간다.

어느 날 호기심많은 이웃 아줌마의 제보 덕분에 아줌마 아저씨에게 있었던 비극적인 사건을 알게 되고, 이웃들의 동정이나 뒷이야기들에도 시종일관 침묵으로 일관하며 묵묵히 하루하루 살아가는 두 사람의 황보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시간은 흘러 두 사람과 함께 했던 여름이 끝나가고, 엄마도 아기를 낳아 다시 집으로 돌아갈 날이 다가왔다. 아줌마를 위해서 차를 준비할 생각에 농장 한 쪽 커다란 물탱크에 올라가 찰랑이는 물을 바라보다가 알 수 없는 힘이 손을 잡아당기는 듯이 물탱크 안으로 빠지고 만다. 어찌어찌 구조되어 살아나간 했지만 호되게 감기를 앓는다. 아줌마 아저씨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소녀를 더욱 애틋해하지만, 아쉬운 마음을 다잡으며 소녀의 집으로 데려다준다.

다시금 마주한 거칠고 싸늘한 집안 풍경. 소녀는 결국 아저씨네 집을 향해 달려나가고, 놀래는 아저씨를 힘껏 끌어안는다. 아저씨 어깨 너머로 보이는 성난 아버지의 모습. 그들의 모습을 보며 흐느껴우는 아줌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소녀가 내뱉는 경고의 한 마디는 누구에게 향한 것이었을까.

너무 톡특한 분위기인데, 농장 물탱크 위에 비쳐지는 소녀의 모습이 너무나 영화장면처럼 상상이 되기도 한다. 짧아서 부담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마무리가 어떻게 된건지 정말 굼금하기도. 영화 ‘말없는 소녀’의 원작이라고 한다. 2022년 부커상 최종후보이기도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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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아저씨가 말한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맡겨진 소녀 | 클레어 키건, 허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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