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9
김승옥 지음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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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의 ‘무진기행’ 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정말 대단한 작품이라고 밖에는.

그의 작품에는 시체, 강간, 자살, 살인미수, 혹은 직장에서 잘리는 이야기 뭐 이런 소재들이 동시에 나오거나 아니면 적어도 두 세 가지씩은 겹쳐서 나온다. 작품의 분위기가 상당히 무겁다.

또, 주요 인물들은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누군가에게 해를 가하고 이를 부끄러워 하지만, 절대 상황을 돌려놓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되는대로 상황을 흘려보낼 뿐이다. 부딛친 상처가 그냥 놔두면 어찌저찌 아물어버리는 것처럼. 영웅도 없고 행운도 없다. 그저 지지리 궁상맞은 현실뿐이다.

책의 처음에 적혀있는 작가의 말이 이 모든 작품속에서 만나는 인물들에 대한 면죄부가 아닐까 싶다.

소설이란 추체험의 기록,
있을 수 있는 인간관계에 대한 도식,
구제받지 못한 상태에 대한 연민,
모순에 대한 예민한 반응,
혼란한 삶의 모습 그 자체.
나는 판단하지도 분노하지도 않겠다.
그것은 하느님이 하실 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의미 없는 삶에
의미의 조명을 비춰 보는 일일 뿐.

1980년
작가의 말

가장 익숙하고 여러번 읽어서 좋아하게 된 ‘무진기행’ 이외에도 마음에 드는 작품들이 많았다.

전혀 다른 환경의 동갑내기 25세 청년 둘이서 죽은 아내의 시체를 판 돈을 하루저녁에 다 써버리려는 남자를 도와주는 ‘서울 1964년 겨울’,

남의 아내가 되어버린 첫사랑의 부고를 듣고 추억에 잠기는 교수님과 대화하는 남다른 가족사를 가진 젊은 학생의 이야기 ‘생명연습’,

빨치산의 죽음과 형들의 나쁜짓에 일조하면서 점점 성장해가는 어린소년 이야기 ‘건’,

강압적인 분위기로 집안의 모든 활동을 시간단위로 통제하는 이상한 가족 사이에서 힘들어하는 젊은이 이야기 ‘역사’,

신문에 만화를 그려 근근 살아가는 가난한 만화가가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는 이야기 ‘차나 한 잔’,

산업혁명과 외국문화 등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현실 속에서 가치관의 혼란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 ‘다산성’,

가난 때문에 키우던 염소 고기도 팔고 무허가로 술도 팔고, 결국 버스 안내양이 된 누나를 자랑스러워하는 남동생의 눈물겨운 이야기 ’염소는 힘이 세다‘,

남편과 같은 은행에서 일은 하고있지만 직장에서 잘릴 것이 두려워 결혼식은 물론 결혼한 사실도 비밀로 하는 아내 이야기 ‘야행’,

텔렌트와 결혼한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 아내의 혼전 경험 때문에 고민하다 결국 이혼한 후에 벌어지는 이야기 ‘서울의 달빛 0장’

‘다산성’을 빼고는 대부분 단편이라 가볍게 읽을만 하다. 단편이지만 스토리 안에 숨겨진 무엇인가가 마음속에 걸려서 콕콕 찔러대는 느낌이 있다. 그것의 정체가 무엇일까 찾아보는 재미도 분명 있다.

__________

그러나 나는 돌아서서 전보의 눈을 피하여 편지를 썼다.

“갑자기 떠나게 되었습니다. 찾아가서 말로써 오늘 제가 먼저 가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만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 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바입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제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다 놓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듯이 당신을 햇볕 속으로 끌어 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저를 믿어 주십시오. 그리고 서울에서 준비가 되는 대로 소식 드리면 당신은 무진을 떠나서 제게 와 주십시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쓰고 나서 나는 그 편지를 읽어 봤다. 또 한 번 읽어 봤다. 그리고 찢어 버렸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서 나는, 어디 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무진기행 | 김승옥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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