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자리
고민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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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에 어떤 숫자를 더하면 영은 사라지고 그 숫자만 남습니다.
영에 어떤 숫자를 곱하면 그 숫자를 영으로 바꿉니다.
아무리 많이 늘어놓아도 영은 영 외에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숫자에 기댈 때 영은 우주의 단위가 될 수 있습니다.
(작가의 말)


20대에 정리해고를 당하고 급하게 이직한 회사는 1년 만에 폐업.
실업급여를 받으며 취준생 대신 익숙했던 '생'의 자리를 박탈당한 채 살아가는 주인공은 서른 살의 백수다.
급하게 이사하느라 모아놓은 돈도 마지막 실업급여도 끝날 무렵 나이, 성별, 학력, 경력 무관의 플라워 약국에 전산원으로 취직한다.


- 유령이 또 왔네.

면접 날 김약사가 건넨 농담은 약국에서만 통용되는 은어인가 싶었지만 상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인공은 기꺼이 유령이 되기로 한다.
처방전 바코드를 찍고 약값을 계산하고 조제를 돕는 전산원의 업무는 최저임금이 오르지 않는 이상 통장에 찍히는 숫자가 변하지 않는 직업이었다.
급여가 오르지 않는다는 건 성장을 기대할 수 없고 누구라도 대체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이름조차 공개되지 않고 흘러간다.
김 약사, 조 부장, 양 실장, 땅부자 할아버지, 문신 토시를 착용한 남자, 판피린을 사는 할머니, 추억 속 혜까지.
세상에 존재하지만 흐릿하기만 하고 '1'을 꿈꾸지만 여전히 '0'의 자리에 머물러 자신도 모르게 유령이 되어버린 이들.
이름조차 부여되지 않은 그들을 0의 자리에 모아놓음으로서 0도 하나의 삶의 단위가 될 수 있음을 일깨워주고자 한것이 아닐까.


유령의 모습으로 영의 자리에 서있던 주인공은 결국 약국을 그만두고 주말 집회도 참여하고 회사에 면접을 보기 시작하며 새로운 도약을 시작한다.
'0'이 가진 잠재적 역량을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첫 출근 날에는 0.000000001쯤 되는 기분이 되겠지만 곧 1이 되리라는 희망과 설렘으로.


2021년 제 26회 한겨레문학상 본심 최종 후보작 중 하나였다는 이 소설은 서른 살 취준생(?)의 심리를 0이라는 숫자에 빗대어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불투명한 삶 앞에 놓인 우리 모두의 이야기였고 아직 1이 되지 못한 세상 모든 0에게 전하는 조용한 응원의 메세지였다.


🔎 무엇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게을렀던 건 아니다.
남들만큼은 노력했다고 믿었는데 부족했던 걸까.
더 노력한다고 달라지기는 할까.
살아온 날보다 살아야 할 날들이 더 하찮아 보였다. (P.12)

🔎 줄곧 상실을 두려워했는데 반대로 생각하면 그것 외에는 두려울 게 없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겁에 질려 있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P.199)


* 이 도서는 한겨레출판에서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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