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본능 - 마음은 어떻게 언어를 만드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한영.문미선.신효식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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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행동을 설명하는 두 가지 요인에 대해서


스티븐 핑커나 《양육과 본성》을 쓴 매트 리들리와 같은 진화심리학자들이 사회과학에 (아니면, 적어도 그들의 책을 읽은 일반 독자들에게) 기여한 큰 일 중에 하나는 인간의 행동을 설명한다는 일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게 만들어 주었다는 데에 있다. 그러니까 반대로 말하자면, 예전엔 인간의 행동을 설명한다는 행위의 의미 자체를 엄밀하게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요인을 분석하고 그에 대한 효과를 분석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정신병에 대한 행동적 의미를 설명한다고 하면, 과거엔 요인을 분리하지 못해서 여러 주먹구구식 원인을 제기하는 수준이었다. 부모의 잘못이라거나 (그러니까 부모의 무슨 잘못 말인가?), 교육 시스템의 잘못이라거나 (그러니까, 교육시스템이 어떻게 잘못을?) 하는 잡다하고 검증 안되는 가설들 말이다. 과학적 방법론의 덕분으로, 이제는 인간 행동의 원인을 크게 두 가지의 요인으로 분리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본능과 환경이다. 물론 진화심리학 이전에도 이 두 가지의 요인에 대한 이야기들은 흔히들 얘기되어 오기도 했었으나, 진화심리학의 영향으로인간 행동의 요인은 오직 이 두 가지 뿐이고, 이것 외에는 없다고 확실히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점심메뉴를 선택하는 문제에 대해 살펴보자. 본능이라는 요인의 예측력 덕분에 우리가 점심메뉴로 벌레나 잔디같은 생물이나, 돌이나 청산가리 같은 물질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100% 예측할 수 있다. 환경 요인의 분석으로는 그가 걸어서 10분 이내의 가깝고 익숙한 식당 중 하나를 고를 것이고, 적어도 어제 먹었던 생선구이 정식은 먹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꽤 높은 확률로 예측할 수 있다. 물론 이 예측은 완전히 정확하지 않은데(분명히 본능 요인보다는 환경 요인의 불확실성이 더 크다), 왜냐하면 무선 변인이 너무 크고 그에 대한 내용을 현대 과학이 다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 사람의 점심 메뉴를 99%까지 예측할 수 있는 모델이 만들어진다 해도, 새로 밝혀진 요인 중에는 본능이나 환경이 아닌 제 3의 요인이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반드시 말할 수 있다. 아, 자유의지가 있지 않냐고? 그러니까, 점심 메뉴를 선택하는 데 본능이나 환경의 요인도 물론 들어가겠지만, 예측할 수 없는 무선 변인의 대부분이 자유의지에 달려 있는 것 아니겠냐고? 글쎄, 지금까지 밝혀진 심리학과 심리철학에 따르면 자유의지는 없다고 말해지는 추세라…


본능이라는 요인은 유전자 그 자체의 영향력에서 온다. 우리는 어떤 행동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 (혹은 pseudo-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가 DNA의 유전적 코드에 의해 운명지어진 그 범위 이상의 행동을 하려고 자유의지를 작동시킨다면 우리는 둘 중 하나의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다. 불가능하거나, 혹은 불행하거나. 우리는 하늘을 날고 싶고 또 그렇게 하려고 해도 날개를 허용하지 않은 인간 DNA의 유전적 명령으로 인해 하늘을 날 수 없다. 만약 내향적 성향을 발현하도록 DNA에 코딩된 누군가가 외향적인 일을 직업으로 가지고 또 열심히 일을 하려 한다면, 그는 그 일을 아예 못하지는 않겠지만 불행한 삶을 살 확률을 스스로 증가시키게 될 것이다. 본능은 우리의 생각보다 우리에게 매우 큰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미치며, 이 얘기가 바로 스티븐 핑커의 책 《빈 서판》의 핵심 내용이다.


그리고 이 본능, 유전자, DNA가 바로 다윈 진화론의 핵심이다. 사실상 진화심리학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가장 강렬한 메시지가 바로 이것인데, 우리의 행동의 절반 정도는 진화론의 법칙에 절대적인 지배를 받는 본능 요인이 우리의 행동을 예측 가능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물론 완벽히 예측할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반반의 확률로 예측에 성공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놀라운 이야기 아닌가? 왜냐하면, 인간의 행동은 (자유의지라는 것 때문에) 예측 불가능한 것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본능 요인은 우리의 행동을 절반 정도의 확률로 예측하는 데 성공해 왔다. 많은 과학 데이터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예측의 나머지 절반이 남아있다. 이 예측은 진화심리학 이전의 전통적인 행동심리학이 잘 해 오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환경’이다.


환경 요인은 본능 요인을 제외한 나머지이다. 사실 이렇게 묶어 버린 거대한 집합이 아무 의미도 도출해 낼 수 없는 “기타 등등”의 집합일 수는 있다. 양육도 환경이고 친구들과의 관계에 대한 영향도 환경이다. 경험이나 기억, 문화의 영향도 환경이고 심지어 임신 중 산모를 통해서 들어오는 화학물질 조차 환경이다. 이렇게 환경에 대한 집합이 잡다해진 이유는 아까도 말했듯이 ‘본능’이라는 요인이 인간의 행동에 과거의 생각보다 큰 영향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밝혀 내었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 행동은 본능 요인으로 100%의 예측을 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헌팅턴 무도병의 발병은 본능 외의 어떤 요인도 영향을 주지 않는 완전히 유전적인 병이다. 그러나 많은 인간 행동은 본능이 절반 정도의 예측밖에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내향성이나 외향성을 만드는 성격 요인은 태어기 전부터 가지고 있는 DNA의 명령에 의한 본능 요인에 대한 영향도 크지만, 실질적으로 성장하면서 학습하는 여러 요인들 (양육, 또래집단, 사회, 그 외 개체만의 특수한 기억)에 의해 계속해서 변화하기 때문에 본능 요인이 행동을 절반밖에 예측할 수 없는 것이고, 우리가 이기적 유전자인 DNA의 자동기계가 되는 것을 막아주는 나머지 절반의 요인을 크게 묶어서 ‘환경’이라고 불러주는 것도 큰 의미가 된다.


그리고 사실은, 제 3의 요인이 또 하나 남아있다. 그것은 본능과 환경의 상호작용이다. 본능 요인을 제거할 때도, 환경 요인을 제거할 때도 항상 사라지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 이 것은 본능 그 자체만으로도, 환경 그 만으로도 자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반드시 본능과 환경이 동시에 있어야 나타나는 효과라는 것이다. 언어가 바로 이 대표적인 본능과 환경의 상호작용으로 발현되는 인간의 행동이다. 인간은 누구나 언어적인 본능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언어를 배울 시기에 언어에 대한 청각 자극과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을 차단한다면 인간은 언어를 배울 수가 없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언어에 대한 자극을 인간이 받는 수준만큼 노출시킨다 해도 언어 본능이 없는 침팬지는 언어를 배울 수 없다.

언어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언어’라는 주제가 과학의 틀 안에서 연구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해 왔다. 왜냐하면 언어는 과학보다는 ‘철학’이나 ‘인문학’의 주제이고, 언어 자체가 철학과 인문학을 이끌어 나가는 ‘틀’이면서 사실상 철학과 인문학 그 자체로서 연구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언어는 다른 동물들에게 찾아볼 수 없는 특성인지라, 거의 인간성 그 자체(그러니까, 진화로는 설명될 수 없는)로 취급되어 왔다. 어쩌면 언어는 지금까지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에 존재하는 불멸의, 신비롭고 변화없는, 이상적이고 흠없는 어떤 것이라고 믿어졌던 것 아닐까.


1950~60년대에 노암 촘스키의 언어혁명이 일어났다. 촘스키의 이론은 언어학에 대한 커다란 관점의 전환을 불러일으켰다. 우선, ‘인문학으로서의 언어’ 연구가 아닌 인간이라는 동물이 사용하는 도구적 특성으로서의 언어에 대한 연구를 시도하게 되었다. 언어가 사회, 철학, 관념에 미치는 영향이 아닌, 언어 그 자체와 언어의 내부 구조에 대한 실증적 분석을 시도하게 되었다. 언어는 기억, 성격, 성, 감정 등과 같은 인간의 행동 중 하나라고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철학과 인문학 내부에서의 언어의 위상과는 상관없이 말이다. 촘스키의 덕택으로 우리는 언어를 생성문법과 이산조합 체계, 뇌에 들어있는 어휘사전과 정신어로 이루어진 정보처리적 기관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언어가 인간 행동이라면 반드시 본능 요인과 환경 요인의 틀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언어는 본능 요인과 환경 요인의 혼합 (또는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로 인해 과학자에 의해 예측이 가능한 심리적 특성이어야 한다. 그리고 본능 요인을 인정한다면 언어가 진화의 산물이라는 사실까지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개념적인 벽에 부딪쳤다. 언어가 진화했다면 왜 인간과 가까운 침팬지에게는 언어 비슷한 것도 없는가? 언어가 진화하였다면 당연히 인간과 침팬지의 공통 조상에서부터 시작한, 인간의 언어보다 낮은 수준의 문법을 갖춘 정보전달 체계가 있어서 그것이 침팬지까지 전달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침팬지는 끽끽 소리를 낼 수 있을 지언정 문법이 조금이라도 들어간 소리는 절대 내지 못한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촘스키는 언어가 ‘진화’ (정확히 말하면, ‘자연선택’)라는 생각에 반대한다. 언어는 단지 뇌가 커지고 복잡해짐으로 인해 생겨난 ‘부산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부산물도 진화긴 하지만 이 내용까지 쓰려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생략한다. 정확히 말하면 촘스키는 ‘진화’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다. 촘스키의 가설은 적응적 진화를 반대하면서 부산물로서의 언어를 얘기하지만 사실상 그 이론이 체계적으로 정립된 것은 아니고, 실질적으로 우리가 촘스키의 어록을 읽어볼 때는 ‘진화’ 혹은 ‘자연선택’이라는 말 자체를 꺼내는 것을 매우 꺼려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언어학 전반에 걸친 촘스키의 거대한 영향력은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스티븐 핑커의 언어학도 예외는 아니다. 때문에 이 책은 촘스키의 언어 이론에 대한 매우 훌륭한 해설서이다. 많은 장들이 촘스키를 반박하지 않고 존경을 담아 그의 이론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 수록 촘스키와 핑커 사이의 관점의 차이가 드러난다. 핑커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촘스키의 언어 그 자체에 대한 설명은 틀림없이 옳다. 그러나 진화에 대한 사소한 (그러나 중요한) 스토리에 있어서 촘스키는 틀렸다. 인간의 행동이라는 특성으로서의 언어를 봤을 때, 언어는 본능 요인과 환경 요인으로 분석해볼 수 있고, 그 때문에 언어는 틀림없이 자연선택으로 진화한 특성이다.


그리고 사실 핑커가 촘스키에 반대하는 점이 또 하나 있다. 이것은 언어의 모든 것을 보편문법, 즉 구조와 체계로만 설명하려고 하는 촘스키 학파의 이론을 반박하는 것이다. 이의 대안 가설은, 언어는 선천적 본능 요인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문법’이라는 체계와 함께, 후천적 환경 요인이 큰 기여를 하는 ‘단어장’ 체계가 동시에 존재해 시스템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핑커의 또다른 책 《단어와 규칙》의 핵심 내용이다.


핑커의 해설 덕에, 우리는 언어의 요인에 대한 분석을 끝낼 수 있었다. 언어는 선천적이다. 즉, 본능 요인에 따른 보편구조가 존재한다. 이 선천적 구조는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고 정말로 태어나면서 만들어지기로 예정된 것이기 때문에, 환경 요인의 기여도는 0인 완전한 본능의 영역이다. 이 본능적 특질은 ‘당연하게도’ 다윈이 이야기한 자연선택으로 진화한 체계이며 그 때문에 언어 유전자가 잘못되면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고, ‘사람과 가장 유전적으로 유사한’ 침팬지도 이 언어유전자가 없기 때문에 아무리 훈련해도 언어를 배우지 못한다. 이 선천적 구조의 위에 환경 요인, 즉 후천적 배움과 습득이 일어나 우리는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본능과 환경, 이 두 가지만으로도 언어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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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dler 2015-10-11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훌륭한 서평 감사합니다. ^^

책주부 클로이 책방 2016-10-29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Dennis Kim 2017-04-06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이 책을 읽고 있어요. 도움이 되었습니다

쌔랭 2019-12-20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