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철학으로 대중문화 읽기
박영욱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3년 4월
평점 :
‘대중문화는 과연 천박하고 보수적이며, 그래서 고급 문화와 구분 지을 수 있는가? 또 대중문화는 이데올로기적이다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이 책은 이러한 편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그것들과 한판 ‘맞장’을 뜬다. 기성 정치와 엘리트 사회에 도전한 섹스 피스톨스부터 복제를 통해 순수(고급)예술의 우월감을 전복해버린 앤디 워홀 등까지 여러 문화를 예로 들면서 대중문화가 어떻게 기존 문화의 틀을 깨고 있는지 보여준다.
우선 저자는 ‘대중음악에 대한 편견’에 대해 반박한다. 그를 위해 클래식 작곡가 쇤베르크와 미국의 얼터너티브 록 밴드 너바나를 예로 들어 비교한다. 쇤베르크는 기존 클래식음악의 관습적인 7음계를 부정하고 12음기법과 무조음악을 만들어 현대음악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서양음악의 체계를 전복시킨 셈이다. 섹스 피스톨스 역시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그들도 펑크 음악을 통해 체계를 전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전복의 결정판이 너바나라고 저자는 역설한다.
너바나는 반음 혹은 한 음을 낮게 조율한 새로운 음색을 만들어냈으며, 조화에서 긴장으로 그리고 다시 조화로 이어지는 화성적 체계가 파괴되고도 음악이 전개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 단조와 장조가 뒤섞인 혼동성 등을 갖춘 새로운 록 음악을 선보였다. 그와 함께 전세계적으로 수천만 장의 앨범이 판매되고 수억 명의 팬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코베인의 영향력은 쇤베르크보다 훨씬 크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서양 클래식음악의 혁명가로 불리는 20세기 작곡가 쇤베르크에 필적하는 대중음악 혁명가 너바나 같은 음악가가 있으니 대중문화가 결코 결코 천박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중 가요 또한 1970년대의 포크송과 1990년대 서태지의 등장처럼 기존 문화에 대한 도전이자 진보로 작용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 ‘과연 대중문화를 고급 문화와 구별 짓는 것이 가능한가?, 과연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이 이해할 수 없는 고급예술의 존재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칸딘스키의 추상화와 앤디 워홀의 팝아트를 분석하며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관계를 다시 생각한다. 현대미술은 화가 자신의 내부로만 그 시선을 둠으로써 대중은 배제했다. 그들의 회화는 상징을 가진 도상들의 나열일 뿐, 그 상징은 화가만이 읽을 수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회화는 욕망을 지나치게 은폐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잃어버리고 고립된 것이다. 그러나 팝아트는 그런 고립된 회화를 복제나 소재의 다양화(만화, 미스미디어 등의 이용)로 다시 대중 안으로 끌어들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대중이라는 존립근거를 떠난 고급문화가 생명력을 잃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
칸트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철학도가 지은 책답게 철학적인 방법론과 그것을 구체적인 대중문화에 적용한 것, 그리고 대중음악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 등은 다른 대중문화 연구서가 하지 못한 이 책만의 장점이다. 하지만 음표나 화성학 등 다소 생소한 내용들은 라캉, 부르디외 등 철학 및 사회과학 이론에 대한 설명이 많아지는 후반부로 갈수록 전반부처럼 읽기가 쉽지 않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문화 자체가 가진 쟁점들이 표출되게 한다는 점에서 많은 가치를 지닌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