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마디를 행운에 맡기지 마라 - ‘대통령의 통역사’가 들려주는 품격 있는 소통의 기술
최정화 지음 / 리더스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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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초 국제회의 통역사로 역대 대통령 5인의 정상회담을 비롯한 국제회의들을 총괄 통역한 한국외국어대학교의 최정화 교수가 말하는 소통의 기술이다. 이렇게 책 소개를 듣다 보면 대단한 경력에 박수부터 나오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그의 경력과 책의 주제 사이의 상관성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국제회의 통역사라면 당연히 외국어를 잘할 것이다, 그렇다면 외국어를 배우는 방법이나 유창하게 외국어 말하는 방법을 들려주는 게 맞지 않은가? 그런데 저자는 '소통의 기술'에 대해 말하고 있다. 경력에 속지 말자. 광고일 뿐이다. 사실 저자가 말하는 것은 그의 외국어 경력보다는 말에 대한 성찰의 결과다. '외국어 말하기의 기술'이 아니라 '소통'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 그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이러한 생각은 김수환 추기경과의 대화를 기록한 부분을 읽으면 느낄 수 있다.


"추기경님은 몇 개 국어를 하시는지요?"
"음, 사실 세어본 적이 없는데 원한다면 같이 세어볼까요? 내가 한국인이니 한국어를 하고,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으니 좋든 싫든 일본어를 하게 됐지요.
그러다가 영어는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들어서 영어를 배웠고, 독일에서 공부를 했으니 독일어를 조금 합니다. 교황님을 뵈러 가야 하니 이탈리아어를 배웠고, 이탈리아와 독일을 오가다 보니 그 사이에 있는 프랑스어도 조금은 합니다. 아, 성서를 읽어야 하니 라틴어도 배웠네요. 합하면 모두 몇 가지나 되려나요?"
"우리말을 빼도 6개 국어나 되네요!"
이어진 추기경님의 대답이 놀라웠다.
"잠간, 몇 가지가 더 있어요. 믿음서 우러나오는 참말과 때에 따라서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거짓말, 또 작자기 속에만 놓아둔 '속엣말'이 있습니다. 사실 외국어를 얼마나 많이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보다는 사람들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속엣말을 듣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어요?"
바깥으로 내뱉지 못한 말을 들으려는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는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가 언어를 배우는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처음 던졌다. 통역사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프랑스어를 비롯해 여러 외국어를 배웠지만, 딱 거기까지 였다. 한 차원 높은 목적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은은 몰라도 언어를 업(業)으로 삼고 있고, 소통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응당 던졌어야 할 질문이 아닌가. 순간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내 자산이 언어라면, 그것을 여러 사람을 위해 널리 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한 것도 바로 그때부터였다.


이렇게 여러 차례의 국제 회의나 다양한 인사들의 통역을 담당하며 쌓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얻은 소통의 기술들을 책 속에서 아낌 없이 퍼준다. 

어릴 때는 빠르게 말하거나 어려운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다. 유창한 언변으로 사람들을 정신 못차리게 하는 사람들을 보면 말을 잘한다고 부러워했었다. 하지만 말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인 통력(通力)은 사실 그런 것과는 관계가 없다. 저자가 말하든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알고 전달하며, 대화 상대에게 집중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격을 갖춘 태도로 대하는 것. 이런 기본기를 쌓는 것이 소통의 기술이다.

소통에 관심이 있거나, 통역사로서 저자의 경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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