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의 기생충
린웨이윈 지음, 허유영 옮김 / 레드박스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나는 자서전을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남의 인생 스토리를 들으며 내 인생과 비교하고, '이 사람은 위대해'라는 신화를 만들거나, 아니면 '나도 할 수 있어' 같은 희망을 품는 것이 한심하다고 생각해서다. 그런 마음이 지속되는 걸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실존 인물의 자서전이나 평전이라고 해도 결국 하나의 스토리에 불과하다. 실화라는 것의 충격은 읽을 때에 실감을 더할 뿐 나에게 미치는 영향은 허구의 스토리와 다를 바가 없다.

이 책도 마찬가지였다.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라는 것은 큰 매력 요소가 아니었다. 게다가 '박사 집안'에서 태어나 '기생충 학자'를 어머니를 둔 작가 린웨이윈은 나와 너무 다르다. 

그러나 삶의 형태가 다르다고 공감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아마 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야기가 허구든 사실이든, 작가의 환경이 나와 얼마나 닮아 있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다. '이런 삶도 있습니다'라고 보여주며 자신이 그 속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대응해왔는지 풀어내는 작가에게 공감하고 몰입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녀가 보여주는 삶의 방식을 읽는 것이다. 


나는 왜 이 책을 썼을까? 우선은 부모님과 소통하고 부모님과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썼다. 부모님도 예전에 책을 통해 나와 소통하고 나를 이해하려고 했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타인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나만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이를 통해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걸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누구나 자기 방식으로 자기 이야기를 쓸 권리가 있다. 그 이야기가 남들 눈에 성공으로 보이든 실패로 보이든, 말할 가치가 있든 없든, 글을 잘 썼든 잘 쓰지 못했든 상관없다.

내 이야기가 반드시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안에서만 살면서 타인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타인의 관점을 보지 않으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만의 이야기가 있어야 하고 나의 시선으로 나 자신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내 생각이 없다면 나는 남의 머릿속에 기생하는 기생충일 뿐이다. 돌려 말하면 남의 생각을 내 머릿속에 기생시키는 것이다.

더 이상 기생하고 싶지 않다. 경제적으로든, 생각으로든, 감정으로든. 나는 독립하고 싶고, 지금도 독립으로 향하는 길 위에 있다. 언제쯤 만족할 수 있는 종착역에 닿을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 종착역이 어디인지, 어디에서 잠시 멈추고 쉴 것인지 남이 결정해주길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나 스스로 ‘독립’과 ‘의존’, ‘도움을 받아들이는 것’ 사이의 경계를 정의해야만 한다. 책을 읽으며 성장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저자(혹은 주인공)와 함께 내가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다. 관조적인 시선으로 누군가의 삶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포 저자와 함께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삶을 견딘다는 느낌이 들 때다. 그만큼 몰입한 것이다.

저자(혹은 주인공)이 성장을 하고 이야기가
끝날 때, 나도 투쟁을 끝낸다. 그리고 몰입된 상태에서 빠져나와 숨을 고른다. 하지만, 이 책의 결말은 숨을 고르지 못하게 한다. 작가 린웨이윈의 투쟁은 이제 시작이다. '기생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진다. 다시 같이 싸움터에 나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끝이 시원하지 않더라도
어찌되었건 책은 마지막 장을 넘겼다. 이제 작가와 분리되어야 한다. 작가는 그의 투쟁을, 나는 나의 삶 속에서 투쟁을 지속해나가야 한다. 하지만  든든한 응원군이 생겼다. 혼자 하는 싸움이지만, 이 지구 어딘가에서 나와 같은 싸움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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