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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눈물 ㅣ 대한민국 스토리DNA 16
전상국 지음 / 새움 / 2017년 12월
평점 :
자신의 작품에서 따로 몇 편을 골라내는 일이 쉽지 않다. 이것도 좋지 않느냔, 선에 넣지 않은 작품에 대한 미련일 것이다. '그 작품'을 쓸 때 이 이상 다른 것을 쓸 수 없을 것이란 작심으로 최선을 다한, 그 비장한 신명을 잊지 못함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새움 출판사의 한국문학 전집 시리즈 ‘대한민국 스토리DNA’의 16번째 도서 <우상의 눈물>을 읽었다. 전상국 작가의 등단 55년을 회고하며 아홉 편의 작품을 직접 골라낸 것이라서 흥미로웠다. 전상국 작가가 아홉 편을 선별한 기준은 이제까지의 중단편 소설 중 자신의 주된 관심사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기준으로 <플라나리아>(2002), <우상의 눈물>(1980), <우리들의 날개>(1988), <침묵의 눈>(1978), <맥>(1977), <동행>(1963), <전야>(1974), <아베의 가족>(1978), <투석>(1988)을 묶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거의 잊혀져가는 어떤 사건을 선택한 다음, 비록 어제의 것이지만 이것만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다소 과장된 방법으로 뭔가를 환기시켜 주는 것”이 소설이다.
-전상국, <소설 창작 강의>, 문학과사상사, 2010, 15쪽
전상국의 소설은 대부분 전쟁에 의해 연쇄되는 폭력과 교육에 의한 동일화의 현상, 그리고 자본주의에
매몰된 개인들이 보이는 이기주의에 대한 인식이 주제이다. 그리고 그러한 폭력과 갈등은 분단과 한국 전쟁이
중요한 동인이다.
국어 시간에 배울 법한 설명이다. 사실 현재를 살아가는 20대 중반의 나에게 그의 소설의 동인은 설득력이 없다. 분단이나 한국전쟁은 역사 속 이야기일 뿐이다. 역사 인식을 갖는다고 해도 그것은 이성적인 지식의 습득일 뿐, 마음으로 동감하지는 못한다. 또한, 두발 단속 조차 없고 야간자율학습도 자율화 된 학창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그의 소설에서 묘사되는 학교도 먼 과거의 이야기 같다.
소설 속 인물들은 더하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평범하지 않다. 지나치게 극단적이다. 불구자나
정신병자들이기도 하고, 여자 인물들은 평생을 성폭행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산다. 삶의 행복이라고는 도무지 느낄 수가 없는 인물들이다. 광기 어린
인물들이다.
이렇게 동감할만한 접점이 없는데,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가슴을 치는 무언가가 있다. <우상의 눈물>은 청소년 필독도서로 선정되어 있기도 하다. 다른 소설들도 지금에까지 미치는 힘이 느껴진다. 이것은 어떤 힘일까? 그의 소설의 무엇이 나를 이렇게 울컥하게 하는 것일까?
일단 긴장감이 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그런 공포 장르의 긴장감보다는, 등골이 빳빳하게 서는 힘이 들어가는 긴장감이다. 이런 긴장을 유도하는 것은 대립 구조다. 어느 소설이나 갈등이 있지만, 전상국의 소설에서는 그 갈등이 유독 크게 느껴진다. 사소한 갈등이 아니라 인생에서 양보할 수 없는 것들이 부딪쳐 일어나는 갈등이기에 긴장되는 것이다. 윤리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인 의미를 가진 갈등은 해결의 어려움을 내포하기 때문에 독자에게 두려움마저 느끼게 한다.
이러한 대립 구조와 미해결의 답답함은 전상국의 <소설 창작 강의>를 읽으면 작가에 의해 유도된 창작법의 일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야기를 짠다는 것은 그 이야기 속의 모든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얽힘을 뜻한다. 그러나 그 요소들은 나름으로 풀리지 않는 어떤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죽어야 한다. 죽을 수 없다. 나쁜 놈이다. 아니다 그는 당신들보다 더 인간적이다. 사랑한다. 증오한다. … 이러한 요소들의 갈등을 어떻게 적절히 나열하고 대비하여 진행시키느냐에 따라 소설의 맛은 크게 달라진다.
-전상국,<소설 창작 강의>, 문학과사상사, 2010
결국 작가는 애초에 “풀리지 않는 어떤 문제들”을 소설 속에 심어 놓은 것이다. 그러니 그의 소설들은 갈등이 점점 심화되어 결국 비극으로 치닫을 수 밖에 없다.
전상국 소설을 읽을 때 몰입하게 되는 또 다른 요소는 바로 끝을 궁금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의 소설의 시작은 대부분 사건이 발생한 이후를 묘사하며 시작된다. 피해자가 먼저 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사건이 어떻게 발생한 것인지 조사해 나가며 진행된다. 독자는 그 수사에 몰입해서 가해자를 찾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본다. 그러나 결국 가해자는 단 한 사람의 실체가 아니다. 부조리한 사회나 역사다. 처벌할 수가 없다. 해결 할 수가 없음에 절망을 느낀다.
그리고 비극을 읽는 희열을 느끼게 된다.
이 절망과 희열,
그리고 거대한 사회를 한 줄의 문장으로 체감하게 되는 경험.
이러한 것들이 그의 소설이 가진 힘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