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나에게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읽는 내내 그 사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다 읽고 난 뒤 내 마음 속을 들여다보니, 작가가 전한 이야기들과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뒤죽박죽 되어 있었다. 왜 그 사람이 떠올랐을까?
그 사람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다. 취향이 너무나 비슷해서 '와, 이 사람은 나의 소울메이트야!'라는 강렬한 느낌을 주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해박한 지식을 가져서 가르침을 주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하나의 목표를 함께 이루려고 애쓰는 동료 관계도 아니고, 소꿉친구처럼 오랜 시간 지켜봐왔기 때문에 눈만 봐도 뭘 원하는지 알 수 있는 관계도 아니다. 오히려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설명이 필요한 사람이다. 알게 된 지 일 년이 조금 넘은 신선한(?) 사람이다.
이 책을 읽고 그 사람이 떠오른 것은 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말이 많은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수다쟁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뭔가를 느끼면 그것을 말로 표현해야 하고, 어떻게든 '개시'하지 않으면 못 견뎌한다. 모르는 것을 알게 될 때 즐겁고, 그것을 내가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는 것이 기쁘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사회 생활을 하면서 침묵이 편해졌다. 어떤 것에 대해 예민하고 진지하게 접근하면 '설명충', '진지충'이라는 말을 들었고 그런 말이 듣기 싫어서 점점 말수가 줄였다. 말에 깊이가 더해지면 사람들은 피곤함을 느꼈다. 영화나 책, 드라마나 노래 등 어떠한 컨텐츠를 접하는 것도 그저 시간을 보내기 위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 뒤에 감상을 논하자고 하면 귀찮아했다. 그래서 말을 하는 것이 조심스러워졌다. 그렇게 언젠가부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가 어려웠다. 내뱉는 말들은 표면에서 떠돌다 날아갈 뿐이었고, 분명히 함께 있고 말을 하고 있지만 소통하고 있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화가 그리웠다. 스스로의 머릿속에서 곱씹으며 소화해낸 생각들이나 무언가를 보고 느낀 강렬한 인상, 또는 경험을 바탕으로 세워진 자신의 인생에 대한 가치관을 나누는 이야기가 그리웠다.
그러던 중 이 친구를 만났다. 그녀는 잘 들어줬고 거침없이 말했다. 자신이 읽은 것, 본 것, 느낀 것을 공유하자고 권해왔다. 나는 그 친구가 전달하는 말과 함께 한 허무맹랑한 상상에서 생활의 영감을 얻고, 그것은 나를 작게, 때로는 크게 변화시켰다. 그 친구와 만날 때는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고 있다,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이 친구를 통해 '이야기'가 갖는 힘을 느낀다.
나는 책의 저자인 강세형이라는 사람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믿는 이야기의 힘에 공감한다. 서평에 쓰인 '이야기는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는 말, 그 말이 책을 읽는 내내 나에게 이야기의 힘을 알려준 그 친구를 떠올리게 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