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
나오미 울프 지음, 윤길순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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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일주일 정도 독일에 다녀오는 일정이 있었다. 프랑크푸르트까지 10시간이 넘는 비행 시간을 견디기 위해 두 편의 영화와 한 권의 책을 준비했다. 출발하기 전 날 한 숨도 자지 못했기 때문에, 책은 사실 자장가 용도로 챙긴 것이었다. 잘 준비를 다 하고 좌석에 앉아서 이 책을 꺼내들었는데, 내용이 너무 인상 깊어서 결국 10시간 동안 한 숨도 자지 못했다. 

1991년도에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새로운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의 신화는 여전히 남아있고, 그것이 우리 삶의 근원적인 부분까지 지배하고 있는 한, 20년이 지난 지금에 읽어도 충격적이다. 특히, 몇 보 뒤에서 미국을 따라가고 있는 한국에서는 오히려 지금 읽는 것이 더 맞을 수도 있다.

글에는 힘이 있다. 때로는 어떠한 매체보다도 효율적이고 확실하게 현실을 바꾸는 힘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그 힘을 실감했다. 나의 현실을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인상 깊었던 부분들을 소개한 후, 내가 겪고 있는 변화들을 고백하려고 한다. 

1장 아름다움의 신화
우리는 페미니즘에 거세게 반발해 아름다움의 이미지를 여성의 진보를 가로막는 정치적 무기로 사용하는 환경에서, 아름다움의 신화 속에서 살고 있다. 이는 산업혁명 이래 엄존하는 현대판 사회적 반사작용이다. 여성이 가정이라는 여성의 신비에서 벗어나자, 아름다움의 신화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해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2장 일
서양에서는 제조업 기반이 전반적으로 붕괴되어 정보와 서비스 기술로 이동하면서 여성 고용이 촉진되었다. 전후에 출산율이 감소하고 그 결과 숙련 노동자가 부족해지자 여성이 예비노동력으로 환영을 받았다. 쓰고 버릴 수 있고, 노동조합으로 조직되지 않고, 힘들고 단조로운 일을 장시간 하는 핑크칼라 저임금 노동자로 말이다. 경제학자 마빈 해리스는 여성을 “읽고 쓸 줄 아는 유순한” 예비 노동자라며 “따라서 현대 서비스 산업이 토해낸 정보와 사람 다루는 일을 하기에 좋은 집단”이라고 했다. 이런 노동시장에서 고용주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노동자의 특성은 낮은 자존감과 반복적인 따분한 일에 대한 참을성, 포부의 결여, 높은 순응성, 자기 옆에서 일하는 여성보다 자기를 관리하는 남성을 더 존경하는 마음, 자기 삶에 대한 통제력 부족이다. 더 높은 단계에 올라가도 여성 중간 관리자는 남성 같거나 유리 천장을 너무 세게 밀어 올리지 않는 한에서만 받아들여지고, 상층에 있는 얼마 안 되는 여성도 여성으로서 물려받은 전통을 완전히 없애야 쓸모가 있다. 아름다움의 신화는 그런 노동력을 길러내는 최신 최상의 훈련 기법이다. 아름다움의 신화는 근무 시간에 이 모든 것을 하고, 여가 시간에 세 번째 근무까지 하도록 한다.
슈퍼우먼들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전문적으로 다루어야 할 의제에 “아름다움”을 가꾸는 만만찮은 노동을 추가해야 했다. 더구나 이 새로운 임무는 갈수록 엄격해졌다. 투자해야 할 돈과 기술, 솜씨의 양이 여성이 권력구조에 균열을 내기 전에는 자신을 전시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미인들에게나 기대한 수준 밑으로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여성이 전문적인 주부의 역할과 전문적인 직장인의 역할, 전문적인 미인의 역할까지 모두 해야 했다.

3장 문화
여성은 세상에 본받을 만한 역할모델이 거의 없어, 이를 영화와 화려한 잡지에서 찾는다.
개인으로서의 여성을 배제하는 이런 양상은 고급문화에서 대중적 신화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널리 발견된다. “남성은 여성을 보고, 여성은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본다. 이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뿐 아니라 여성과 여성의 관계도 해친다.” 비평가 존 버거가 인용한 이 유명한 말은 서양 문화 전반에 해당되고, 지금은 그 양상이 어느 때보다도 심하다.

4장 종교
유예는 순종적인 숭배자가 필요한 종교의 튼튼한 기반이다. 그런 숭배자는 어떤 불의나 억압, 학대, 배고픔도 참고 견딘다. 죽으면 하늘나라에서 보상받을 테니까. (중략)
그런데 이승에서 유예 상태에서 풀려날 길이 없는 여성의 수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새로운 종교가 어떤 점에서는 옛날 종교보다 훨씬 어둡다. 옛날 신자들은 죽음이 해방과 목표의 달성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알았지만, 오늘날의 신자들은 이승이나 내세에서 자유를 상상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우리의 삶은 끝없이 영원한 시험이고, 영원히 투쟁해야 할 유혹과 시련의 늪이다. “일단 몸무게가 빠지면, 자신을 감시하는 것이 평생의 의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라.” 우리는 이승을 눈물의 계곡이라고 배운다. 그것은 삶의 의미도 손상시킨다. 가장 날씬하게 가장 주름 없이 죽는 여성이 이긴다.
<신약성서>에서 좋은 신부 들러리는 신랑을 위해 기름을 비축하고 나쁜 신부 들러리는 기름을 연료로 태운다. 여성은 아름다움을 위해 즐거움을 누리지 말고 비축해야 한다는 다그침을 받고, 거식증 환자들은 “정상” 체중 밑으로 어느 정도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놓았어도 그 여지가 없어질까 봐 두렵다. 그래서 여성은 가게에서 사 온 미용제품과 돈, 음식, 보상을 비축해둔다.
(중략) 아름다움의 이식은 여성에게 자신의 미래를, 자신이 원하는 것을 두려워하도록 가르친다. 자기 몸과 자기 삶을 두려워하며 사는 것은 결코 사는 게 아니다. 그 결과 삶을 두려워하는 신경증이 도처에 있다.

5장 섹스
“아름다움”은 섹스와 관계가 없듯이 사랑과도 관계가 없다. 아름다움을 지녀도 그것이 여성에게 사랑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아름다움의 신화는 아름다움을 지녀야 사랑이 온다고 주장하지만 그렇지 않다. 아름다운 많은 여성이 남성에게 아주 냉소적일 정도로 “아름다움”이 사랑에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중략) 한 개인에 고유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특정한 개인과 상관없는 “아름다움” 자체를 사랑의 필수 조건으로 만드는 신화에서는 아름다움이 사라지면 사랑이 어디로 가지 않을까 하는 지옥 같은 의심이 생길 수 밖에 없다. .. 위스턴 휴 오든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뼈 속 깊이 타고나는” 것은 “보편적 사랑이 아니라 혼자 사랑받고 싶은” 갈망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아름다움의 신화가 제안하는 “사랑”은 보편적 사랑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려서 사랑받았듯(물론 운이 좋았다면) 사랑받고 싶다. 단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내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발가락 하나하나를 만져주고 팔다리 하나하나에 기쁨의 탄성을 지르던 때처럼. 어른이 되어도 우리는 낭만적 사랑이 비교하는 잣대에서 해방된 그런 사랑을 구한다. 지칠대로 지친 사람도 진정한 사랑의 눈에는 자신이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보일 거라고 믿고 싶어 한다.
…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아름답게 보여야”하는 탓에 여성은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지 못한다.

6장 굶주림
그러나 여성이 뚱뚱한 것이 대중이 열정을 쏟는 주제가 되고 여성이 뚱뚱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신화 아래서는 여성의 몸이 우리 몸이 아니라 사회의 몸임을, 마른 것이 개인의 미학적 특징이 아니고 굶는 것이 공동체가 사회적으로 용인하는 것임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여성이 마른 것에 문화적으로 집착하는 것은 여성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여성의 복종에 집착하는 것이다.

7장 폭력
여성이 아름다움에 필사적이면 나르시시즘이라고 조롱하지만, 사실 여성은 성의 핵심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것이다. 남성에게는 아무도 그것을 빼앗아가겠다고 위협하지 않는다. 남성은 육체가 완벽하지 않아도 나이가 들어도 성적 정체성이 유지된다. 남성은 시간이 바닥나고 있다는 메시지, 다시는 어루만져주지 않고 찬사를 보내지 않고 만족시켜주지 않을 거라는 메시지를 똑 같은 방식으로 듣지 않는다. … “아름다움”을 위해 싸우는 많은 여성이 자신의 삶과 성적 사랑으로 가득한 삶을 위해 싸운다고 믿는 것은 당연하다.
사랑을 잃는다는 것은 곧 존재 가치를 잃는다는 위협이다. 고령자는 신화의 불평등한 본질을 보여준다. 늙은 남성은 세상을 움직이지만, 늙은 여성은 문화에서 지워진다.

8장 아름다움의 신화를 넘어서
그렇다면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뻔뻔해지자. 탐욕스러워지자. 쾌락을 추구하자. 고통을 피하자. 마음대로 입고 만지고 먹고 마시자. 다른 여성의 선택을 받아들이자. 우리가 원하는 섹스를 찾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 섹스와 맹렬히 싸우자. 자신의 이상과 대의를 선택하자. 규칙을 깨부수고 바꾸어 우리가 아름답다는 느낌이 확고해지면, 그러한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꾸미고 과시하고 한껏 즐기자. 감각의 정치학에서는 여성이 아름답다.

책을 다 읽으니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부터 5박 6일 간의 독일 캠프 일정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 기간동안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사람들과 떠들고, 늦게 잤으며, 아주 많이 먹었다. 이 결과만 놓고 보면 '방탕'해졌고 '타락'한 것이다. 독일에 가기 전 나의 생활과 비교하면 확실히 나빠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나는  술과 담배를 일년 간 끊었었고, 일적인 관계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 만나지 않았다. 어떠한 생산적인 활동(과제나 세미나 등)이 아닌 친밀함만을 위한 관계(친구들과의 만남)를 피했다. 그리고 오후 6시 이후에는 잘 먹지 않았고, 채소 위주의 식단과 매일 1200칼로리가 넘지 않도록 조절했다. 초콜렛이나 젤리 등 군것질은 일절 삼갔다. 매일 1만 5천보 이상 걸었고, 아침에 눈을 뜨면 공복에 운동을 하고, 저녁에는 요가를 했다. 이상적인 삶이다. 

이런 생활이 행복해서 그랬냐고 묻는 다면 그렇지 않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런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와중에 나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고칼로리의 음식들을 모아서 폭식을 하고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억지로 토한 뒤, 좌절감과 자괴감에 사로잡혀서 죽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잠이 들면 깨지 않기를 바랐다.

이런식으로 나는 152cm에 37kg이라는 저체중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실 섭식장애를 더 심하게 겪고 있던 8월까지는 33kg이었다. 그 때에 비하면 4kg가 쪄서 요즘에는 다이어트에 대한 압박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33kg까지 빼고 싶었다. 

이 책을 읽고 독일에 도착한 나는 '타락'했다. 사회가 요구하는 무기력하고 힘 없는 거식증에 걸린 소녀가 아니었다. 고칼로리의 소세지(심지어는 소스로 케찹을 엄청나게 부은!)와 돼지 고기, 소고기를 먹었고, 아침마다 조식으로 나오는 달달한 크로와상을 먹었다. 간식으로 초콜렛과 젤리도 빼놓지 않았다. 당연히 살은 쪘고 한국으로 돌아온 나의 몸무게는 40kg을 찍었다. 2년 사이에 최대 몸무게다.   

그리고 나는 이제 선택의 기로에 섰다. 다이어트를 시작해서 다시 37kg으로 돌릴 것인가, 아니면 신경쓰지 않고 여행의 여운을 즐기며 변화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름다움을 쫓을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다시 관 속으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햇빛이 보이는 세상에서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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