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여행가방 - 내가 사랑한, 네가 사랑할 여행의 순간
이하람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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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여행에서 주인공은 무엇일까. 지역별 독특한 풍미를 지닌 음식, 현지 사람들의 친절이나 웃음, 여행지 자체의 아름다움이나 매력. 여행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은 무수히 많다. 그리도 다양한 여행 도서들이 음식이나 사람, 건물이나 여행지를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펼쳐 나가고 있다. 수많은 여행 도서, 그 중에서도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여행 에세이. 이제는 나올 법한 에세이는 다 나왔다 싶었는데, 평범한 듯 하면서도 결코 평범하지 않은 에세이를 만났다. 여행을 직접 하는 저자가 주인공이 되는 여행, 그리고 그녀가 쓴 에세이.

 

 저자의 전직이나 학력은 다 뒤로 하자. 그녀가 글 쓰는 사람이라는 편견을 버리고 글을 바라보자. 굉장히 담백하고 깔끔한 일식의 맛이 나며 각 여행지에 대해 적당한 아쉬움 - 맛있는 음식을 조금 더 먹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입맛을 다시는 그런 느낌- 이 이야기 곳곳에서 잔잔히 감돈다. "여행은, 다시 못 와볼 곳을 구경하는 일이 아니라 다음에 다시 한번 꼭 오고 싶은 곳을 찾는 과정이다.(p.81)"라는 그녀의 사진 아래에 조용히 자리한 말이 이 에세이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여행에 대한 아쉬움을 대변한다. 정말, 한 번 오고 말 곳이 아니라 언젠가 사무치게 그리울 때 다시 한번 더 찾게 될 곳이니, 조금의 아쉬움은 남겨두고 와야 한다고. 그렇게 여행자와 여행지가 상호간에 남긴 협약처럼.

 

 책을 보고 있노라면 지나치게 감상에 빠지지도 않고 지나치게 정보 위주로 가지도 않는다. 여행자로서의 한 20대 여자가 걸어간 길과 맞닿은 시선이 그대로 보여지고 있으며, 20대의 한국 여성이 하는 여행에 나타날 것만 같은 그런 사건들이 하나씩 툭툭 튀어나온다. 터키 남성의 유혹이나 이집트 인들의 사기(?), 일본에서 통하지 않는 히치하이킹, 파리에서의 몹쓸 낭만, 기대를 뛰어넘는 서프라이즈가 존재하지 않아 그 점이 더 매력적인 몽골 등, 여행지에 대한 감상이 지나치게 과장되지도 않고, 너무 무성의하지도 않다. 그래서 정말 마음에 든다.

 

 관광이라는 여행자의 의무를 떨쳐버리니 파리가 일상처럼 다가왔다.(p.49)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과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같은 장소에서 서로 다른 저녁을 꿈꾼다. 평범한 일상을 훔쳐보는 여행자의 마음은  그들의 감정을 나눌 수 없기에 짝사랑과 같다.(p.90)

 난생처음 가보는 낯선 여행지에서 나의 본색을 드러내는 것. 그 또한 흥미로운 일이다. 그동안 몰랐던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 아니라 지겹게 알고 있던 나의 모습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일. 여행의 목적을 고민하느라 우리가 놓치고 있던 '여행의 본색'이다.(p.182)

 여행은 기억되는 장소가 아닌 기억되는 순간을 만드는 일. 여행을 알아갈수록 사진으로는 담기 힘든 순간들이 내 여행가방에 차곡차곡 쌓여간다.(p.195)

 잘 익은 김치를 먹을 만큼만 덜어내듯이 나에게 여행은 아주 조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만 나의 일상을 덜어내는 것이다. (p.286)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여행의 정의. 그녀의 시선이었기에 나올 수 있었던 말들. 잊고 있었던 여행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정의들이 지난 내 여행을 쿡쿡 찔러댔다. 여행은 시간의 흐름이다. 그래서 하나하나 잊지 않기 위해 기억을 확장하고 사진을 남기고 기록을 한다. 그런 기록들이 모여 여행했다는 말 뒤를 화려하게 수식하지만, 언제나 누군가에게 여행에 대한 소감을 대답해야 할 때면 '어디가 좋았어.'라는 좋다라는 아주 단순한 형용사로 얼버무리고 만다. 그 속에서 내가 했던 생각과 내가 담아낸 풍경은 좋다라는 거대한 포용의 단어 속으로 묻혀버린다. 그것이 지난 날의 내 여행의 남과 다르지 않은 뻔한 여행으로 만들어 냈던 것이다.

 

 그녀의 루트는 많은 사람들이 찾던 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행의 순간을 남겼고,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장소에 내가 있었던 사진과 같은 풍경 한 장을 남겼을 뿐이다. 그것이 여행의 차이다. 얼마나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여행이 되는가. 나만의 여행이라 자부할 수 있는 여행이 되는가에 대한 해답은, 여행 경비나 여행 코스가 결정하는 것이 아닌, 바로 여행자 자신이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왜 그것을 이제야 깨달았을까. 수많은 여행을 하고 난 지금에서야. 하지만, 그녀의 여행에 대한 정의를 다시 빌려본다. 다시 못 올 곳이 아니라, 한번쯤 다시 가게 될 곳들이다. 그래서 깊게 후회하고 끝내버리기에는 이르다. 아직 나에게는 내가 발딛었던 그 곳들이 그대로 남아 있기에. 여전히 나를 오라 손짓하고 있기에. 조만간, 나도 정겨운 그 곳을 다시 찾아 예쁜 형용사를 달아 뚜렷하게 내 기억 속에 정리를 하고 돌아오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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