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시장 - 일상다반사, 소소함의 미학, 시장 엿보기
기분좋은 QX 엮음 / 시드페이퍼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살던 동네에는 매 5일과 10일 단위로 장이 선다. 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 쫄레쫄레 시장을 걸어다니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장이 서지 않을 때는 보이지 않던 온갖 생선이나 야채 가게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개구리나 징그러운 굼벵이도 상품이 되어 나와 있었다. 시장에 갈 때마다 엄마가 끌고 다니던 손수레가 넘쳐나 몇몇 짐을 내가 들게 되는 것은 나의 찬스였다. '아, 무거워요.'라고 연신 중얼거리며 장보기를 마친 엄마를 끌고 근처 분식가게로 향한다. 지금 현재 고향에 내려가도 성행하고 있을 20년이 넘는 전통 호떡집에서 천 원에 네 개를 담아주는 호떡과 쫄깃한 순대를 한 봉지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정말 행복 그 자체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머리 핀이나 머리띠 등의 악세서리를 파는 행상과 만나게 되는 날은 진정한 '나의 날'이었다.

 

 시장을 멀리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집에서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은 시장을 가로질러 가는 경로였는데, 장이라도 서는 날의 하교는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어릴 적이나 십 대의 후반이 된 나이나 굼벵이는 여전히 징그러웠고, 어전의 물이라도 옷에 튀게 되면 나는 온갖 인상을 찌푸렸다. 시장에 가는 엄마를 졸라 집에서 차로 15분이나 걸리는 마트로 행선지를 바꾸기 일쑤였다. 신선하게 느껴지는 공기와 뭔가 상큼한 음악이 흐르는 듯한 내 나름의 고급스러운 분위기였던 마트가 나는 좋았다.

 

 스물 여섯 살의 나는 집을 떠나 혼자 살고 있다. 그리고 차로 5분 거리의 마트를 뒤로 하고 걸어서 10분 거리의 시장을 찾는다. 10원 단위로, 심하게는 1원 단위로 뚝뚝 끊어지는 마트보다는 무조건 금액을 내림하여 지폐의 상용화가 되는 시장이 훨씬 경제적으로 느껴진다. 같은 양파를 사더라도 여러 상점을 둘러보고 제일 많은 양에 제일 싱싱한 듯 해 보이는 양파를 비교 구매할 수 있다. 100g에 369원 같은 인정없는 숫자로 끊어지는 마트의 양파보다 예닐곱 개를 수북하게 쌓아놓고 오려낸 박스 뒷 면에 쿨하게 적힌 '2천원'짜리 양파가 나는 좋다. 그리고 한 가게에서 너댓 개가 되는 종류의 야채를 산 후 백 원 단위를 서슴없이 깎아내는 에누리도 좋다.

 

 인심과 저렴함으로 대표되던 나의 시장을 '매력덩어리'라는 이미지로 확 바꾸어 버린 책이 바로 <한국의 시장>이다. 그저 물건을 구매하러 다니는 시장이 아니라 함께 즐길 수 있는 시장이 담겨있다. '일상다반사, 소소함의 미학, 시장 엿보기'라는 부제를 능가하는, 시장은 결코 소소하지 않고 결코 일상적이지 않은 비범한 장소였다. 제주도에서 서울까지 15개의 시장을 돌며 뽑아낸 풍성한 시장 이야기와 함께 디자이너 이상봉, 사진작가 권영호, 연기자 홍석천 등이 시장에 얽힌 추억담을 한가득 풀어 놓는다. . 제주의 한라봉과 화산암으로 침이 절로 고이는 옥돔, 이 책이 아니었다면 평생 알지 못했을 전주의 암뽕순대, 주문진 수산시장 천장의 투명한 비닐바다 등으로 먹고 보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넘쳐나는 전국 각지의 시장의 매력은 모든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당기고 있다.

 

 여러 종류의 음식을 다양하게 파는 가게에서는 음식 맛에 만족할 수 없다. 시장은 가장 전문적인 공간이다. 다양한 품목을 조금씩 가져다 디스플레이 해 둔 듯한 마트의 그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과일 가게에서는 과일만, 생선가게에서는 생선만, 정육점에서는 고기만. 각자 정해진 분야의 품목만 취급하는 시장의 상인들은 자신이 판매하는 품목의 최고 전문가가 된다. 주문진 시장의 복어회의 도톰함, 제주도의 다양한 스타일의 마스크, 위조방지 100%의 수제 도장 등, 내로라는 전문가의 손길이 모이고 모인 곳이 바로 시장인 것이다.

 

 시끌벅적함 또한 시장의 매력이다. 참 편리한 마트는 단 한 마디의 말을 하지 않고도 쇼핑을 끝낼 수가 있다. 하지만 시장은 원하는 것을 사고자 할 때, 반드시 상인과의 대화를 필요로 한다. '얼마예요?', '~주세요.', '많이 파세요.' 등의 몇 마디의 말이 오가다 보면 어느 새 상인과 나는 친구가 되어 있다. 어쩌다 대화가 길어지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더 많은 물건과 웃음으로 보상되어 돌아온다. 한국의 시장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글을 쓴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들도 분명 많은 상인들과 대화를 했을 것이며, 시장 안의 여러 사람들과 시선을 마주했을 것이다. 그런 대화들과 웃음소리가 오고가며 시장은 언제나 시끌벅적한 매력을 내뿜는다.

 

 매일같이 리뉴얼되는 마트의 인테리어와는 달리 시장은 시간을 머금고 변화한다. 과거의 흔적을 지우기보다는 과거에 현재를 덧대어 나아가는 것이 시장의 매력이다. 매직으로 거대하기 쓰인  '뻥'이라는 글자가 주는 퉁명스러움, 간판만 세 개인 벌교의 스타미용실, 기름집 유리문에 더덕더덕 붙어있는 스티커, 도토리 모양의 까만 전구 스위치 등이 오묘하게 현재와 어울려 향수를 자극하고 있다. 시장이 아니면 너무나도 어색했을 그것들을 시장이 너그럽게 안아주고 있었다. 그런 시장의 매력 때문에, 나는 천안 호두과자 가게가 너무 현대화 되어버린 것에 작가들 못지 않은 아쉬움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을 통해 전국 각지의 시장이 주는 독특한 지방색으로 여행서의 느낌도 가질 수 있음과 동시에 우리는 잊고 있었던 시장을 찾을 수 있다. 어릴 적 엄마의 손을 붙잡고 걸었던 시장, 시끌벅적 정신없는 상인들의 분주함, 조금 더 달라며 혹은 조금 더 깎아달라며 실랑이를 벌이는 사람들, 포장마차에 옹기종기 앉아 국수며 튀김을 먹는 모습 등 시장을 통해 조금씩 우리는 어려진다. 거기에 한국의 시장이 주는 독특한 매력은 시장이 단순히 상거래의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어른들에게는 아련한 추억의 재생, 아이들에게는 신기한 신세계를 보여주는 한국의 시장. 이 책은 진정한 시장의 재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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