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하루에 두 번씩 매일 고민하게 되는 것이 있다. 오늘 점심은 무엇을 먹을까. 오늘 저녁은 어떻게 할까. 빠듯하여 시간 없는 아침은 자연스레 넘겨버리고 나니 남아있는 두 번의 식사는 늘 고민거리이다. 간혹 선택이 조금 나와 맞지 않았다거나 만족스럽지 않았을 때, 나는 몇 번 깨작거리다 이내 수저를 놓아버린다. 조금 더 일찍 내가 이 책을 접했다면, 나와 조금 맞지 않는 음식을 앞에 두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푸념을 늘어놓았을 수 있었을까. 이 세상에는 나처럼 무엇을 먹을까로 고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책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먹을 수 있을까라는 절망을 말하는 사람이 엄청나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책의 제목을 접하고 처음 드는 생각은 책의 제목이 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절반이나 굶주린다고?' 라며 먼저 제목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세계 인구의 두 배인 120억의 인구가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이 생산되고 있다면서 하루에 10만명이 5초에 한 명의 어린이가 굶주림으로 죽어간다고 한다. 이 서평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먹지 못했다는 이유가 사인이 되어 목숨을 잃어가는 아이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왜? 라는 의문사에 선뜻 대답을 내리기에는 이 책 한 권도 다 담아내지 못할 정도로 많은 이유들이 자리잡고 있다.

 

 기아라는 단어를 접하면 가장 먼저 이 책의 표지에 등장한 소년처럼 아프리카의 비쩍 마른 어린이들을 떠올리게 된다. 유난히 크고 맑은 눈을 가진 그들이지만, 먹지 못한다는 현실은 그 눈마저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가. 왜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을까라는 물음에 일차원적으로 그 쪽은 사막이고 물이 부족해서 농사를 짓지 못하니까-라는 대답을 하게 된다. 단지 그 것이 그들이 굶주리는 이유의 전부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주어진 환경을 뛰어넘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의 순기능으로 그들은 충분히 개간이나 무역의 형태로 자신들의 식량을 구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들을 지배하는 인간의 욕심이다. 서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의 남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부르키나파소라는 한 나라는 사막이라는 최악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욕심을 버린 대통령 상카라의 노력으로 인간다운 삶을 이루는 많은 것을 찾아갈 수 있었다. 국가 예산의 70% 이상을 공무원의 월급으로 쓰는 이상한 재정을 고치고, 주민자치를 통해 실제 삶에서 필요한 것들을 우선시한 사업을 전개하며, 인두세를 폐지하는 등의 노력으로 단 4년만에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내었다고 한다. 하지만, 주변국의 지배자들은 부르키나파소의 발전을 시샘하였고, 그를 따라 발전하는 대신, 지배층의 이권만을 누릴 수 있게 상카라를 살해하여 희망을 잠재워 버렸다. 사막의 나라가 보여준 식량 자급자족의 희망이 몇몇 지배자의 탐욕에 의해 순식간에 무너져 버린 것이다. 사람의 목숨을 건 기아라는 최악의 상황이 타인에게 수단이 되고, 때로는 무기가 된다는 것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선진국들도 예외는 아니다. 세계 속에서 자국의 목소리를 조금 더 크게 내고자 하는 노력으로 그들 역시 기아를 이용하고 있다. 가진 자에 의해 가지지 못한 자가 철저히 이용당하는 현실. 이미 우리 사회에서도 많이 들어왔던 것이지만, 가지지 못한 자의 목숨, 그것도 수 억 명의 목숨이 좌지우지되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런 의미에서 구호 단체들의 활동은 늘 긍정적이며 선의의 것이라 여겨져 왔다. 하지만, 결코 그들의 활동도 기아에게 있어 100%의 효과를 가져다 줄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흔히 구호활동이라 여겨져 왔던 비행기나 헬기에서 음식을 떨어뜨리는 장면도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으며, 구호 단체가 가진 자원이 충분치 않기에 그들 역시 수많은 기아 속에서 선별작업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결국 선택받은 자만이 구호 활동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 그마저도 오랜 굶주림으로 갑작스런 음식이나 약이 입에 맞지 않아 더한 고통을 겪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들의 고통을 덜고자 적지 않은 구호 단체들의 손길이 향하고 있지만, 그 손길이 그들의 고통을 지워낼 수는 없다. 상처를 마냥 반창고로 덮어버린다고 해서 완전한 쾌유라 칭할 수 없듯이, 보다 더 본질적인 해결책이 필요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본질적인 해결책이라는 것을 강구하기에 인간은 너무나도 인간적이다.

 

 책의 서두부터 나를 당황케 했던 것은 기아를 자연도태설의 일부로 보아 그들의 죽음을 당연시 여기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특히나 성직자라는, 모든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는 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자체가 충격이었다. 사람의 목숨은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흔히 말한다. 그런 수 십억의 절대적인 가치를 자연의 일부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도 주장하는 그런 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설을 통해 지금 타인의 고통을 나몰라라 하며 자기 위안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답답하게 느껴졌다. 만약, 자신들이 그 수 억명의 일부였다면, 과연 그런 설을 듣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을까?

 

 그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보지만 좀처럼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고작해야 오늘 저녁 식사를 남기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나, 구호 단체에 조금의 도움이 될 수 있는 후원을 하는 것, 그리고 종종 그들이 한 끼의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마음속으로 작은 기도를 올리는 것. 그 정도일까. 사람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진 사람이 참 무섭다. 그들의 욕심이 무섭다. 적어도 나는 무서운 욕심을 가진 어른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세상 저 편에서 약간의 식량이 지독한 행복이 될 수 있는 그들을 늘 마음 속에 담아두고, 내 욕심을 조금씩 비워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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