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꺼기
톰 매카시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찌꺼기
톰 매카시 지음 | 황소연 옮김
민음사 2010.04.30평점

 

 산뜻한 표지이다. 찰랑거리는 수면 아래 찌꺼기라는 글자가 위태롭게 떠 있다. Remainder. 물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찌꺼기이다. 카프카의 소외와 프로이트의 강박이 창조한 섬뜩한 세계라고 했지만, 솔직히 나는 카프카와 프로이트는 딱 이름만 안다. 이 책의 주인공은 <트루먼 쇼>의 세트장을 만들었단다. 왜? 트루먼 쇼의 짐 캐리가 세상을 탈출하기만을 한없이 바랐던 나에게 이 책의 주인공의 행동을 제시하는 책 뒷표지의 간략한 줄거리는 끊임없이 왜?라는 의문만 가져다 주었다.

 

 사고를 당했다. 무슨 사고였는지, 왜 그 사고를 당했는지... 신문기사의 필수요건이라는 육하원칙의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정보는 '내가 사고를 당했다.'라는 것 하나 뿐이다. 하지만, 그 '나'조차도 누군지는 모르겠다. 영국이라는 배경을 제외하고는 이 이야기의 전제 줄거리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 주인공은 그저 850만 파운드라는 엄청난 액수의 보상금만 받아 챙겼을 뿐이다. 거스름돈이 너무 많으면 귀찮아하는 우리 심리처럼, 주인공 역시 딱 떨어지지 않는 단위인 50만 파운드를 귀찮게 여긴다. 후에는 50만파운드라는 단어조차도 거부감이 느껴졌는지 '100만파운드의 절반'이라는 표현을 쓴다. 사람은 그렇다. 자신이 가진 것이 많아지면, 작은 것은 자연스레 소홀하게 여겨버린다. 때로는 업신여기거나 버려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그는 작은 존재라는 찌꺼기를 하나 내던져 버렸다.

 

 보상금을 주식에 투자한 주인공은 문득 어떤 상황에서 데자뷰 현상을 경험한다. 느껴본 적 있는 듯한 상황. 무엇이 부족하랴. 그는 그 순간을 느끼기 위해 그 상황을 만들어 버린다. 건물을 구매하고, 그 상황에 보였던 사람이며 동물을 준비한다. 자신의 기억에 맞춰 모든 것이 움직인다. 유리창의 얼룩이 조금 부족해서도 안되며, 수도꼭지가 조금 더 깨끗해서도 안된다. 그의 기억대로 모든 상황을 지배하려 한다. (그의 기억력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마는...) 하지만, 그는 만족하지 못한다. 오히려 더 목말라하고, 성공여부를 묻는 질문에 이제 시작이라는 대답을 남긴다. 그 후, 어느 살인사건의 현장을 지나게 되고, 그는 그 살인 사건마저 재연하게 된다.

 

 데이비드 심슨의 파티 이후로 내 모든 행동의 목적은 한결 같았다. 진짜가 되는 것.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워지는 것. 우리를 사건의 근간으로부터 몰아내고 핵심에 닿지 못하게 방해하는 우회로를 끊어 버리는 것. 그 우회로는 우리 모두를 아류와 이류로 만들었다.(p.299)

 

 주인공은 말한다. 재연극의 목적은 진짜가 되는 것이라고. 그가 만들어 낸 가짜 재연극들 속의 그가 말하는 진짜라는 것은 무엇일까. 주인공은 가짜 재연극 속에서 진짜를 찾으려 깊이 파고든다. 어쩌면 그가 말하는 진짜는 지금껏 그가 단 한 번도 처하지 못했으며,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없애고자 하는 아류와 이류를 나누는 우회로 역시 그 자신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왜?'라는 의문사를 이토록 숱하게 던져본 책은 없을 것 같다. 맨 마지막의 옮긴이의 말을 읽고나서야 비로소 몇 개의 '왜?'가 사라지지는 했지만, 아직도 많은 수의 '왜?'가 머리를 맴돈다. 무슨 사고를 당했길래 주인공은 850만 파운드라는 거금을 받을 수 있었으며, 주인공의 과거는 무엇이었으며, 주인공이 추구하는 '진짜'는 무엇인지 등등... 수많은 의문을 남기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나에게 있어 '진짜' 삶이란 무엇이냐고. '지금 이 순간.'이라고 선뜻 대답해보지만, 그렇게 간단한 다섯 글자로 답을 내어버리기에는 주인공의 행동이 비정상이라고 하기에도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주인공을 누군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인물로 정해둠으로 해서 그 사람이 바로 나일수도, 바로 내 옆의 누군가일수도 있다고... 이 책을 읽고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의문의 사고를 당해 850만파운드가 생긴다면 뭘 할래? 어느 누구도, 진짜 자신을 찾기 위한 행동을 하겠다는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저 부유하고 넉넉하게 현재를 살아가겠다고 했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이 책의 주인공을 anyone에 대입시키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 책의 주인공은 진짜 세상을 살아가는 어느 누구도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주인공은 자신이 될 수 없는 '진짜' 세상을 그토록 갈구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지금이 '진짜'라는 사실에 감사해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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