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이 단편집에 실려 있는 카버의 인물들을 살펴보자.


「춤 좀 추지 그래?」에 나오는 젊은 커플은 우연히 한 중년 남자의 가라지 세일에 들러서 상품을 흥정하고 술에 취해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춘다. 그녀는 춤을 출 때 남자에게 말한다. 아저씬 절박해 보인다고. 그리고 몇 주 후에 애인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그 나이 든 남자에게서 얻은 것들이 '쓰레기' 같다고 말한다.


「정자」의 젊은 부부는 한때 '계획'과 '희망'이란 게 있었지만 남편인 '나'는 모텔의 청소부와 바람을 피웠고 그 때문에 '나'의 아내 '홀리'는 '자기 안의 뭔가가 죽어버렸다'고 말하며 술을 마시고 운다. 소설 말미에 홀리는 이렇게 말한다. 예전에 도시 외곽의 좁은 흙길을 달리다가 낡은 집에 이르러서 물을 한 잔 청했던 것을 기억하느냐고. 집에 살고 있는 노인들은 부부를 안으로 들여 먹을 것을 주고 집을 구경시켜주었다. 부부는 집 뒤쪽의 정자도 보았다. 칠이 벗겨지고 지금은 돌보지 않는 정자지만 집주인이 아주 오래전에 그곳에서 음악이 연주되었고 사람들은 그 음악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홀리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이렇게 생각했었다고 말한다. "나는 우리가 나이를 먹게 되면 그렇게 되리라 생각했어. 위엄 있게. 그리고 평화롭게. 그리고 사람들이 우리 집을 찾게 되고." 그러면서 남편에게 묻는 거다. "이제 우리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 어떤 집에 들어가서 물 한 잔을 부탁하는 거." 


「나는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볼 수 있었다」는 어떠한가. 클리프의 아내인 '나'는 어느 날 밤 이상한 기척을 느끼고 마당으로 나간다. 그리고 이웃 집과 경계를 이루는 울타리에서 이웃인 샘 로튼을 만난다. 그는 장미 잎사귀를 갉아먹는 민달팽이들을 유인해 잡는 중이었다. 그리고 원래는 친구 사이였지만 술을 마시고 말다툼을 한 뒤로 서로 울타리를 만들고 멀어진 클리프-'나'의 남편-의 안부를 묻는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아시다시피 난 포기해버렸어요. 그럴 수밖에 없었죠. 한동안 일이 그렇게 되어갔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더라고요. 우리 집에는 아직도 울타리가 서 있죠. 하지만 더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봉지」의 화자인 '나'는 출장 중에 새크라멘토에 들러 아버지를 몇 시간 방문해 이야기를 듣는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이혼하기 이 년 전에 일어났던 이야기로, 이야기의 요점은 분명하다. 아버지가 어머니 몰래 바람을 피웠다는 거다. 아버지는 샐리라는 여자와 불륜을 저질렀던 초창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녀는 침실 침대 곁에 그-남편-의 사진을 놓아두었어. 처음에는 사진이 거기에 있는 게 신경이 쓰이더구나. 하지만 얼마 후에는 익숙하게 되었지. 사람이 뭔가에 어떤 식으로 익숙해지는지는 잘 알지?"


「목욕」의 스코티 어머니도 그렇다. 스코티는 생일날 차에 치였고 혼수 상태에 빠져 있다. 그녀는 아들의 병실 창가에서 주차장을 내려보다가 자동차 한 대가 멈추고 긴 외투를 입은 어느 여자가 거기에 타는 것을 본다. 그녀는 자기가 바로 그 여자라고 상상해보려 한다.


「너무나 많은 물이 집 가까이에」의 '나'는 남편에게서 이야기를 듣는다. 남편과 친구들이 낚시를 하러 가서 우연히 소녀의 사체를 발견하였다는 이야기다. 그들은 곧장 신고를 하는 대신 그 사체가 물에 떠내려가는 일이 없도록 일단 고정을 시킨 다음에 예정대로 그들의 휴일을 보낸다. 그들이 경찰에 신고를 하는 것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 소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로 마음 먹은 날, '나'는 식사를 하며 남편이 쳐다볼 때마다 아들에게 우유나 토스트 등을 더 먹을 거냐고 묻는다. 아내가 장례식에 다녀온 후 집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은 일을 치르기 위해 아내의 옷을 벗긴다(딴에는 며칠간 이상해 보였던 아내를 되돌리려는 행위다). 아내는 밖에 있는 아들이 오기 전에 서두르라면서 남편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그토록 많은 물이 흐르니 나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우리 아버지를 죽인 세번째 이유」에 나오는 '나'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동료였던 더미는 또 어떠한가. '더미'라는 이름처럼-'더미'는 '바보' 또는 '벙어리'라는 뜻이다-부족한 한 사내가 바람난 아내 때문인지 물고기에 미쳐서인지 점점 삶의 수렁으로 빠져들다가 아내를 죽이고 자살한다. 화자인 '나'는 자신의 아버지도 더미의 죽음 이후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한다. '더미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아버지-는 더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었다'고.


「심각한 이야기」나 「대중 역학」, 「한 마디 더」에 나오는 부부들도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문제가 있어 보이는 남편은 이미 아내와 아이들과 떨어져 살거나, 그들에게서 이제 떨어져 나가려고 하는 중이다.


한마디로 카버의 인물들은 대체로 「정자」의 바람난 남편, 드웨인이 이야기하듯 "이제 모든 것이 옛날과 같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이에 대해서 피츠제럴드-생각해보니, 카버도 그렇고 피츠제럴드도 그렇고 그들은 '술'에 관해서 문제가 있었다-의 자전적 에세이 「무너져내리다 the crack-up」에 나오는 말이 그 어느 문장보다 효과적일 것이다.


"손을 쓰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을 때, 당신이 어떤 측면에서는 다시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을 때, 그 때가 되고 나서야 당신은 그것을 느끼게 된다."


위의 카버의 인물들은 그들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대개 이런 설명들을 한다. 사실 설명이라고 할 수도 없는 설명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일이 일어났다거나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든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고.


『천 개의 고원』의 저자들은 콩트와 단편을 이렇게 비교했다. 콩트가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면 단편소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구축된다고. (과거의 나처럼) 카버의 소설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면 이 질문의 소맷자락을 꼭 붙잡고 카버의 소설을 읽어도 좋을 것이다.


카버를 우리 앞에 좀더 친숙하게 끌어 앉히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을 신형철의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아마 이 글을 읽으며 (나처럼) 무릎을 칠 사람도 많으리라.


"단편 소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묻고 삶에서 하나의 파열선을 발견해내는 작업이다. 뒤집어 말하면 '삶을 가로지르는 아주 미세한 파열선 하나'를 포착하기만 해도 단편소설은 성립될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불과 50매가 채 안 되는 레이먼드 카버의 「정자」, 황정은의 근작 중에서 특별하게 카버의 어떤 정수를 탁월하게 체현하고 있는 「야행」, 어떤 거대한 사건도 거창한 행위도 없이 진행되는 줌파 라히리의 가족소설 등은 어째서 훌륭한 단편소설이 될 수 있었는가. 우리 삶을 내부에서부터 천천히 갉아먹는 파열선이 그 소설들에 있기 때문이고, 그를 통해 우리가 이미 늦은 뒤에야 깨달았을 어떤 파열들을 미리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신형철, 「'윤리학적 상상력'으로 쓰고 '서사윤리학'으로 읽기-장편소설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단상」(『문학동네』 2010년 봄호) 중에서"


마지막으로 신형철은 그 파열을 감지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뛰어난 관찰력을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처음으로 레이먼드 카버의 사진을 보았을 때 나를 놀라게 만들었던 그의 눈빛을 기억한다.  그저 '형형하다'라는 옛스런 표현으로는 부족한데, 카버에 대해 "본질적으로 리얼리스트이지만, 그의 작품에는 단순한 리얼리즘을 뛰어넘는, 뭔가 꿰뚫어보는 듯한 심오한 면이 있다"라고 하루키가 밝힌 바 있듯이, 그의 눈에서 나는 하루키가 말한 바와 비슷한 그 무엇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사진인데도.


 

 

 

 

 

"그는 문을 닫고 주스의 마지막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런 다음 입을 헹구고 인스턴트 커피 한 잔을 만들었다. 그는 그것을 들고 거실로 갔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담배를 한 대 붙였다. 그는 이 모든 게 망가지려면 미치광이 한 명에 횃불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 「청바지 다음에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를테면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을 처음으로 읽을 때가 기억난다. 소설이 윤리책 같은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무위도식하며(여기서 이미 살짝 질투가 났고) 처자식 있는 유부남이면서 여행에서 만난 게이샤와 헛된 연애를 일삼는 시마무라에 도통 동화되기 힘들어서, 정확히 말하면 반감이 심해서 처음에 읽었을 때는 이 작품의 훌륭함을 미처 음미할 수 없었다. 과연 나는 어떤 독서를 한 것일까?

움베르토 에코에 따르면, 나의 이같은 태도는 '경험적 독자'의 태도라 할 수 있다.

 

경험적 독자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읽을 수 있고 읽는 방식에 관한 법칙을 따로 갖고 있지도 않다. 그는 텍스트를 종종 자신의 감정을 담는 그릇으로 사용하는데, 이 감정은 텍스트 밖에서 올 수도 있고 텍스트에 의해서 유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깊은 슬픔에 빠져 있을 때 우연히 우스운 영화를 보게 된다면 그것을 즐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몇 년 후에 같은 영화를 우연히 보게 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웃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장면 하나하나가 그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우리가 느꼈던 슬픔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경험적 독자로서 당신은 그 영화를 분명 잘못 <읽게 될> 것이다. 하지만 무엇과 관련된 <잘못>인가? 그것은 영화감독이 염두에 두고 있는 관객들, 즉 자신들이 사적으로 개입되어 있지 않은 이야기를 웃으면서 따라가는 관객들의 유형과 관련되어 있다. 이런 유형의 관객(혹은 책의 독자)을 나는 모델 독자라고 부른다. 이런 독자는 텍스트가 협력자로서 기대할 뿐만 아니라 창조해 내려고 하는 이상적 유형이다. 한 텍스트가 <옛날 옛적에……>로 시작한다면 그것은 그 텍스트 고유의 모델 독자를 즉각 선정할 수 있게 해주는 신호인 셈이고, 이 경우의 모델 독자는 어린아이거나 적어도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초월한 어떤 무엇을 받아들이려는 사람이다.

 

나의 두 번째 소설 『푸코의 진자』가 출판된 후, 몇 년 동안 만난 적이 없었던 어린 시절 친구가 내게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움베르토에게. 내가 자네에게 우리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슬픈 얘기에 관해서 말해 준 기억은 없네만, 자네는 경솔하게도 그걸 자네 소설에서 써먹었더군.> 사실 내 책에는 <카를로 백부>와 <카테리나 백모>에 관한 몇몇 에피소드가 소개되는데, 이들은 야코포 벨보라는 등장인물의 아저씨와 아주머니이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실존 인물인 것도 사실이다. 나는 어린 시절에 들었던 어떤 아저씨와 아주머니(소설에서와는 이름이 다른)의 이야기를 약간 수정하여 소설에 옮겨 놓았던 것이다. 나는 <카를로 백부>와 <카테리나 백모>는 그의 친척이 아니라 나의 친척이고, 따라서 그것은 베낀 이야기가 아니라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나는 그에게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러자 그 친구는 내게 사과했다. 그는 나의 소설에 너무도 몰두한 나머지 거기에 나오는 몇몇 사건들이 자신의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직접 겪은 일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전시(내가 회상했던 바로 그 시기)에는 비슷한 일들이 여러 아저씨와 아주머니에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내 친구는 무슨 일을 겪었던 것일까? 그는 숲 속에서 개인적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것을 찾은 것이다. 내가 숲을 거닐면서 인생에 관해, 그리고 과거와 미래에 관해 좀 더 알고자 모든 경험과 발견을 이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숲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창조되는 것이니 만큼 내가 숲에서 나에게만 해당되는 사실들과 감정을 찾아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내가 그렇게 한다면 최근에 나온 나의 두 저서 『해석의 한계』와 『작가와 텍스트 사이』에서 말했듯이, 나는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는> 셈이 된다. 텍스트를 백일몽으로 이용하는 것이 전적으로 금지된 것도 아니어서 우리는 흔히 그렇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백일몽은 공적인 것이 아니므로 우리가 이야기의 숲에서 마치 그 숲이 우리 자신의 정원인 양 거닐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게임의 법칙을 준수해야 하는데, 모델 독자는 그렇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전술한 내 친구는 그 법칙을 잊고 작가가 원하는 모델 독자의 기대가 아니라 경험적 독자로서 자기 자신의 기대를 개입시킨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 『하버드에서 한 문학 강의』, 손유택 옮김, 열린책들, 2009, 21-24쪽

문학이 한 개인에 미치는 '치유' 효과를 언급하며 혹자는 '모델 독자'라는 개념에 반감을 품을지도 모르지만, 문학을 사랑하고 즐기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움베르토 에코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는> 셈이 된다.'라는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숱하게 <이용하기만 하였던> 텍스트들이 스쳐지나가는 바람에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졌음을 고백한다. '아전인수'격으로 텍스트를 소유하는 것보다얀 ​모두가 거니는 숲을 훼손하지 않고 향유하는 것이 독자에게나 작가에게나 그리고 문학에게나 정확한 방식이 아닐까.

​무엇보다, 어떤 게임을 하면서 게임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라. 여기서 가장 피해를 입는 사람은, 게임의 법칙을 준수하지 않음으로써 게임의 정수를 끝내 깨달을 수 없을 그 사람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움베르토 에코의 견해가 특히 유용할 사람이 있다면 습작생이라고 생각한다. 습작하는 시기에 서로 모여 합평하는 자리가 때때로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서 서로가 서로의 '경험적 독자'가 위험이 높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일면식을 터서 작가에 대해 어느 정도 선입견이 ​생겨나곤 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일수록 상대가 정한 게임의 법칙을 준수하고 상대가 공들여 마련한 숲을, 세계를 망치지 않고 걷도록 하자. 위기철 작가의 '작가처럼 읽고 독자처럼 쓰라'는 조언을 상기해도 좋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카버의 중기 단편집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 실린 「목욕」이 ​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의 전신이 되는 작품인데, 이 두 작품을 잘 비교하면 그간 카버가 어떻게 변했는지(혹은 편집자 고든 리시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던 카버의 면모에 대해서) 짐작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일단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은 '빽빽하다'. 나는 그래서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조금 놀랐다. '리얼리즘과 미니멀리즘의 대가'라고 불리는 카버치고, 그러니까 채워넣기보다 생략하고 비우면서 작품의 분위기를 이끌어 갔던 스타일이 미묘하게 변했구나, 느껴서였다.

이러한 변화는 작품 초반부터 감지된다. 「목욕」에 비하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 나오는 빵집 주인은 이야기를 전환시키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스코티 엄마의 시선에 의해서 빵집 주인이 자세하게 묘사된다. 특히, 여기서 카버 식의 인물관찰법이 나온다. 이건 우리나라 손보미 작가에게서도 많이 발견되는 것인데(내가 생각하기로는), 한 인물이 다른 인물의 삶을 자신의 삶과 병치시켜 생각하는 것이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빵집 주인은 신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그저 최소한의 말들, 필요한 정보만 오갔을 뿐 즐거울 만한 것은 없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마음이 불편했고 기분이 나빠졌다. 그가 연필을 쥐고 계산대에 몸을 숙이고 있는 동안, 그녀는 그 덜떨어진 모습을 바라보며 평생 빵이나 만들면서 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서른세 살의 애 엄마인 그녀가 보기에 사람들에게도, 특히 빵집 주인과 비슷한 연배-그러니까 자기 아버지 또래의 중늙인이들-에게도 아이들이 있겠지만 케이크나 생일파티를 준비하는 인생의 특별한 시기는 이미 지나간 게 틀림없었다. 우리 사이에는 그런 차이가 있겠지,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여하튼 카버는 스코티 엄마의 시선에 비치는 빵집 장수를 최대한 퉁명스럽게 그린다. 마치 작품 마지막에 빵집 장수가 아이를 잃은 두 부부에게 생각지도 않은 위로를 주는 것을 감안할 때 그 극적효과를 계산해 넣은 것처럼. 이것도 약간 카버치고는 '짜여진 듯' 느껴져서 눈여겨 보았던 부분이었다.


그리고 인물에 대한 묘사와 인물이 하는 생각에 할당하는 부분도 대폭 늘었다.


남자는 병원에서 집으로 차를 몰고 갔다. 거리에서 그는 차를 필요 이상으로 빠르게 몰았다. 지금까지의 인생은 괜찮았다. 일과 아버지의 역할, 그리고 가족이 있었다. 남자는 운이 좋았고 행복했다. - 「목욕」

지금까지 그의 삶은 순탄하기만 했고 어디 하나 부족한 게 없었다. 대학도, 결혼도, 경영학 고급과정 학위를 받기 위해 다시 다닌 일 년의 대학생활도, 투자회사에 하위 파트너로 들어가게 된 일도, 아빠가 된 것도. 그는 행복했고,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다. 그도 알고 있었다. 부모님은 여전히 살아 계시고 형제자매들은 다들 자리를 잡았으며 대학친구들은 모두 사외에 나가 나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 어떤 쓰라린 경험도 없었다. 운이 다하면, 갑자기 모든 상황이 바뀌면, 한 사람을 꺾어버리고 내팽개치는 어떤 힘 같은 게 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기도를 하고 있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나도 그래. 기도하고 있어." - 「목욕」

"기도했어." 그녀가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도하는 법을 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었는데, 하니까 또 되네. 기도라고 해봐야 눈을 감고 그저 '하느님, 우릴 도와주세요. 스코티를 도와주세요'라고 말한 게 다지만. 그것 빼고는 어려울 게 없으니까. 말이야 다 준비돼 있으니까 당신도 기도하고 싶으면"이라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벌써 했어." 그가 말했다. "오늘 오후에, 아니, 벌써 어제구나. 당신 전화 받고 병원으로 차 몰고 오는 동안 기도했어. 내내 기도하고 있었어." 그가 말했다.

"잘했어." 그녀가 말했다.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들이 이 곤경 속에 함께 있다고 느꼈다. 그녀는 지금까지는 그 곤경이 자신과 스코티에게만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았다. 내내 함께 있으면서 도왔음에도 그녀는 하워드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아내라는 사실이 기뻤다. -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혼수상태에 빠진 스코티가 무슨 검사를 받기 위해 스코티의 침대를 끌고 갔던 간호보조원-「목욕」에는 '잡역부'라고 표현되어 있다-도 ​「목욕」에 없던 캐릭터가 생겼다. 검은 머리칼, 짙은 얼굴빛에 하얀 작업복을 입은 두 사람은 외국인이다.

스코티가 검사를 받은 다음날 스코티의 혈액을 체취하러 온 '기술자'도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는 캐릭터를 부여받았다. 「목욕」에서는 여자인지도 남자인지도 몰랐던 그녀는 하얀 슬랙스에 하얀색 블라우스를 입고 병실에 등장하여 피를 뽑다가 "그런데 어디가 아픈 거예요? 이렇게 예쁜 애가."라고 부모에게 묻는다.

그리고 절망에 빠진 것이 분명해 보이는 부부 앞에서 시종일관 낙관적인 태도를 보여서 정말 바보 같아 보였던 의사도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는 이름까지 부여 받았다. 닥터 프랜시스. 그리고 지면을 더 할애 받아 정말 '낙관적인 바보'(혹은 '선의에 가득차 있지만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의 전형스런 행동들을 보여준다. 이 의사는 미남인데다가 상냥하고 친절하지만 '의사'라는 직업에도 불구하고 이 부부에게 도움을 주는 게 없다. 시종일관 스코티는 괜찮을 거라며 거짓 희망만 주다가 스코티가 죽은 다음에야 풀이 꺾인다. 작품 초반에 볼룩한 배를 가진 중늙은이인데다가 덜떨어지고 퉁명스러워서 스코티 엄마가 처음에 '평생 빵이나 만들면서 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빵집 주인과는 정반대다. 이런 '분명한' 인물의 대조도 카버에게는 처음으로 목격한 것이라 흥미로웠다. 이제껏 카버를 읽으면서 아 이 작가는 짜여진 듯 쓴다기보다 뭔가 직관적으로 자연스럽게 쓴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유독 이 작품에서 그런 것들을 굉장히 가다듬고 정돈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 작품을 굉장히 '공들여'썼구나 느끼면서도 뭔가 '내가 막연히 알고 있던' 카버가 아니라서 당황하기도 했다.

의사는 미남이었다. 그의 피부는 윤기가 흐르고, 햇빛에 검게 그을려 있었다. 스리피스 양복을 입었으며, 밝은 색상의 넥타이를 매고, 셔츠에는 커프스 단추를 달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 의사는 청중과 함께 있다가 이제 막 돌아온 거야. 그는 특별한 메달을 받았어. - 「목욕」

의사는 그을린 어깨에 어깨가 떡 벌어진 미남이었다. 그는 줄무늬 넥타이에 아이보리 커프스단추가 달린 푸른색 스리피스 양복을 입고 있었다. 회색 머리칼을 머리 양쪽으로 잘 빗어넘겨서 이제 막 연주회에 갔다 온 사람처럼 보였다. -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의사가 들어왔다. 그는 햇빛에 그을려 있었고, 그 어느 때보다도 건강해 보였다. 그는 침대로 가서 소년을 진찰했다. - 「목욕」

문이 열리고 닥터 프랜시스가 들어왔다. 이번에 그는 다른 양복에 다른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잿빛 머리칼을 양옆으로 잘 빗었으며 막 면도를 한 사람처럼 보였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목욕」에서는 스코티가 죽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스코티의 엄마가 병원에만 있다가 쉬기 위해 잠시 집에 와서 정체불명의 전화를 받는 것으로 끝이 난다. 먼젓번 남편이 목욕을 하기 위해 집에 들렀을 때 남편이 영문도 모르고 받았던 그 전화 말이다. 스코티 엄마는 아직 전화가 어디서 걸려왔는지 모른다(독자는 빵집 장수라는 것을 알지만). 소설의 마지막은 이렇다. 누군지 모를 그 목소리가 "그래요, 스코티와 관련된 일로 전화드렸습니다."하고 말하는 걸로 끝이 난다. 이렇게 스코티의 죽음을 암시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독자에게는 좀 생뚱맞고 당황스러운 결말이었다. 물론 이는 고든 리시의 (지나친)편집 탓인 것 같지만 말이다.

하여간 『대성당』을 출간하면서 레이먼드 카버는 예전만큼 고든 리시의 손길을 빌리지 않았고 그 덕에 고든 리시가 일찍이 삭제해버렸던 위로를 주는 결말을 다시 가져왔다. 「목욕」에서는 생일 케이크에 대해서 잊어버린 아이의 어머니에게 위협적인 전화를 거는 것으로만 역할을 다 하는 빵집 주인이, 그에게 화가 나서 찾아온 아이의 부모를 맞아서 여태까지 제대로 먹지 못한 부부에게 갓 구운 빵을 건네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결말 말이다.

알려진 바로는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 수록된 「청바지 다음에」 같은 작품에 대해서도 고든 리시는 비슷한 편집을 했다(고든 리시는 카버에게서 다른 문학 작품에 대한 언급이나 고급 문화가 묻어나는 부분, '기도 장면'처럼 종교적인 열망을 드러내는 부분을 다 없앴다고 알려져 있다). 아마도 작품 마지막에 제임스 패커가 병이 악화된 이디스 패커-아내-를 위해 기도하는 장면을 삭제해버린 듯하다.  

「청바지 다음에」도 흥미롭게 읽은 작품이었는데,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 실린 몇몇 작품들이 너무 생략되어 있다는 인상을 풍기는 것처럼 이 작품도 상당 부분을 독자의 짐작으로 채워넣어야 했던 작품이지만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과 궤를 같이 한다고 느꼈던 지점은 이러하다. 두 작품 모두 '운이 다하면, 갑자기 모든 상황이 바뀌면, 한 사람을 꺾어버리고 내팽개치는 어떤 힘 같은 게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려낸 작품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 정말 좋았던 문장, 그러나 왠지 카버스럽지 않아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던 문장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이제 서로의 속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하도 걱정해서 온몸이 저절로 투명해진 것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