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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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관조했다. 그는 우정을 원했다. 자신을 인류의 일원으로 붙잡아줄 친밀한 우정. 그에게는 두 친구가 있었지만 한 명은 그 존재가 알려지기도 전에 무의미한 죽음을 맞았고, 다른 한 명은 이제 저 멀리 산 자들의 세상으로 물러나서……. 그는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도 결혼을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된 열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그 열정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열정이 죽어버렸다. 그는 사랑을 원했으며, 실제로 사랑을 했다. 하지만 그 사랑을 포기하고, 가능성이라는 혼돈 속으로 보내버렸다. 캐서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캐서린."

그는 또한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지만, 거의 평생 동안 무심한 교사였음을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언제나 알고 있었다. 그는 온전한 순수성, 성실성을 꿈꿨다. 하지만 타협하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몰려드는 시시한 일들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그는 생각했다. 또 뭐가 있지?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p, 387~388

 

 

 

 

 

 

해외를 누비며 멋진 커리어우먼으로 살자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교복만 벗고나면 바로 이루게 될 꿈인듯 이야기를 나누며 웃던 고등학생이었던 우리는 어느새 '잔잔한 삶'을 갈망하고 있다. 야망따위 없으니 원만하게, 잔잔한 삶을 살고싶다고. 이 잔잔한 삶에는 큰 성공도, 많은 돈도, 엄청난 명예도 없다. 그저 소소한 일상,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너와 내가 있다. 말이라도 해보자며 구체적으로 나눈 우리의 잔잔한 삶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작은 책방을 열고, 그 책방엔 우리가 좋아하는 책을 내놓고.... 그런데 그럼 얼마정도 필요할까? 한 사람당 5천만원씩 모으면 되지 않을까? 그거면 충분할까? 일단 그거라도 모아놓고 다시 얘기할까? 잔잔한 삶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진짜 힘든 일이네. 그렇지. 그거야말로 엄청난 야망이지...

힘빠지는 웃음을 끝으로 우린 다시 그 '엄청난 야망'을 이루기 위해 우리만의 야망과는 정반대의 분위기를 가진 하루를 묵묵히 살아낸다. 노력하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언젠가'를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내는 중이다. 

 

 

모두가 '인생의 한방'을 기다리며 눈코뜰새 없이 살아가는 와중에 우리의 바람은 철없는 생각으로 치부될까,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이런 때,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는 그야말로 내 뒤통수를 치는 한방이 되어주었다.

《스토너》는 '윌리엄 스토너'의 66년 동안의 긴 삶을 한 페이지 분량으로 짧게 요약한 글로 시작한다. 슬프게도, 그의 삶을 400페이지 가까이로 풀어낸 글을 다 읽고나서 다시 읽어보면 '요약 참 잘했다.' 싶게 요약한 글이 그의 삶의 전부라는 걸 알 수 있다. 남들이 보기에 어쩌면 '실패한 삶' 이라는 짧은 말로 설명될 수 있을 정도로 불행한 삶. 그가 저술한 책에 내려진 평가처럼 '단조롭다'고 평가될 수 있는 삶. 

실패한 결혼,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한 지위, 지켜내지 못한 사랑, 동료와의 불화, 마지막엔 암에 걸려 순식간에 겪게 된 죽음, 사후에도 그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불행한 삶.  

이런 실패한 삶을 살아내는 그의 모습을 뭐가 좋다고 페이지를 자꾸만 넘기게 되는 건지, 뭐가 좋다고 그의 생각과 삶에 분통터지고 아파하면서도 깊은 공감을 느끼게 되는 건지, 그 이유는 존 윌리엄스가 스토너에 대해 내린 평가를 보고나면 알게 된다. 

"나는 그가 진짜 영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스토너의 삶을 슬프고 불행한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의 삶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나은 삶을 살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일에 어느 정도 애정을 갖고 있었고, 그 일에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했으니까요."

그랬다. 존 윌리엄스의 이 말을 읽고 스토너의 삶을 그린 이 책 《스토너》를 평생 지니고 있는 것을 통해서라도 '윌리엄 스토너'를 내 곁에 두고싶었다. 

'노는 물'이라는 말을 듣는다. 사람들은 끼리끼리 논다고, 성공한 사람 옆에 있어야 너도 성공한 사람이 된다고. 꿈이 없는 사람 옆에 머문다면 너도 그저 그 자리에 머무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을 거라고. 그런 이유라면 더더욱 스토너가 노는 물에서 헤엄치고 싶다. 남들이 보기에 실패하고 불행한 삶일지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고, 죽는 순간까지 애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사람이의 곁에 머물고싶다. (아! 그는 영문학 교수였다. 그가 애정을 쏟아부었던 일이 '문학'에 관련된 일이라는 점에서 더욱 마음이 끌렸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마지막 순간에 자신에게 계속해서 물었던 "넌 무엇을 기대했나?" 라는 물음을 나한테 계속해서 던져본다.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을 수 있는 삶을 기대한다. 스토너의 생처럼 한 페이지의 짧은 글로 요약될 생일지라도 좋아하는 일에 평생 애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어쩌면 가장 큰 야망이고 어쩌면 그것만큼 단조로울 수도 없는 그 삶을 살아내기 위해 '스토너'를 곁에 둔다.

 

 

 

그는 부모에게 반드시 해야 하는 이야기를 생각하다가, 자신의 결정을 이미 돌이킬 수 없음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 결정을 무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었다. 경솔하게 선택한 목표에 도달하기에는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생각도 들고, 자신이 버린 세계가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는 자신과 부모가 잃어버린 것을 슬퍼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 세계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p, 34


"잘 모르겠지만, 아까 예배 중에 나는 계속 데이브 매스터스를 생각했네. 프랑스에서 죽은 데이브와 자기 책상에 앉아 죽은 채 이틀을 보낸 슬론. 두 사람의 죽음이 같은 종류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나는 슬론하고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지만, 아마 좋은 사람이었겠지. 적어도 내가 듣기로는 그렇다고 했네. 그런데 이제는 새로운 교수를 물색하고, 새로운 학과장도 찾아봐야 해. 모든 게 그냥 이런 식으로 계속 돌고 도는 것만 같아. 도대체 이것이 다 뭔가하는 생각이 드네."

"맞아." 윌리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고든 핀치에게 커다란 호감을 느꼈다. 그는 차에서 내려 고든의 차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지나온 과거의 또 다른 한 부분이 거의 알아보기 힘들 만큼 천천히 그에게서 멀어져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음을 절감했다.
-p, 128


그는 데이브와 그랬던 것처럼 로맥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이런 마음을 스스로 인정한 뒤에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젊은 시절의 어색함과 서투름은 아직 남아 있는 반면, 어쩌면 우정을 쌓는데 도움이 되었을 솔직함과 열정은 사라져버린 탓이었다. 그는 자신의 소망이 불가능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이 그를 슬프게 했다.
-p, 132~133


그는 길고 긴 낮과 밤을 방에서 혼자 보내며 자신의 일그러진 몸이 강요하는 한계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책을 읽다가 점차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가 이 자유의 본질을 이해하게 됨에 따라 그가 느끼는 자유로움도 더욱 강렬해졌다. 윌리엄 스토너는 이 말을 들으면서 그에게 뜻밖의 친근감을 느꼈다. 그는 로맥스가 일종의 변화를 거쳤음을 알 수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을 통해 알게 되는 직관적인 깨달음 같은 것.
-p, 139


그는 수업준비를 하거나 과제를 채점하거나 논문을 읽는 시간을 제외하면, 항상 연구를 하고 글을 썼다. 세월이 흐르면 자신도 학자이자 교육자로서 명성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첫 번째 저서에 대해 그는 조심스럽고 소박한 기대를 품고 있었으며, 그것이 적절한 마음가짐이기도 했다. 그의 책에 대한 서평에서 어떤 사람은 "단조롭다"고 말했고, 또 다른 사람은 "충분한 조사"를 했다고 말했다. 처음에 그는 자신의 책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그것을 양손으로 들고 아무 장식이 없는 표지를 쓰다듬다가 책장을 펼쳤다. 섬세하고 활기 찬 아이 같았다. 그는 책으로 완성된 자신의 원고를 읽고 나서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뛰어나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얼마쯤 시간이 흐르자 그 책을 보는 일에 진력이 났다. 하지만 자신이 책을 썼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경이가 느껴졌으며, 자신이 그토록 커다란 책임이 따르는 일에 무모하게 나섰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p, 144~145


그 뒤로 이디스는 그보다 간접적이고, 조용하고, 조심스러운 전략을 사용했다. 사랑과 염려라는 가면을 쓴 전략이었으므로, 그는 그 앞에서 무기력했다.
-p, 172


이제 나이를 먹은 그는 압도적일 정도로 단순해서 대처할 수단이 전혀 없는 문제가 점점 강렬해지는 순간에 도달했다. 자신의 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과연 그랬던 적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곤 했다. 모든 사람이 어느 시기에 직면하게 되는 의문인 것 같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의문이 이토록 비참하게 다가오는지 궁금했다. 이 의문은 슬픔도 함께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이나 그의 운명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반적인 슬픔이었다(그의 생각에는 그런 것 같았다). 문제의 의문이 지금 자신이 직면한 가장 뻔한 원인, 즉 자신의 삶에서 튀어나온 것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나이를 먹은 탓에, 그가 우연히 겪은 일들과 주변 상황이 강렬한 탓에, 자신이 그 일들을 나름대로 이해하게 된 탓에 그런 의문이 생겨난 것 같았다. 그는 보잘것없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배운 것들 덕분에 이런 지식을 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우울하고 역설적인 기쁨을 느꼈다. 결국은 모든 것이, 심지어 그에게 이런 지식을 알려준 배움까지도 무익하고 공허하며, 궁극적으로는 배움으로도 변하지 않는 무(無)로 졸아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p, 251~252


그때까지 그는 다른 사람들, 세상 사람들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순간적으로 그는 남들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았다. 이디스가 방금 말한 내용도 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흡연실에서 언뜻언뜻 화제에 오르는 자신의 모습, 싸구려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내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젊음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자기보다 한참 어린 아가씨와 사귀면서 자신은 가질 수 없는 그 젊음을 향해 원숭이처럼 서투르게 손을 뻗는 비루한 중년남자. 번쩍번쩍하게 차려입은 어리석은 광대 같은 그 모습에 세상 사람들은 불편함, 연민, 경멸을 느끼며 웃음을 터뜨릴 터였다. 그는 이 남자의 모습을 최대한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살펴보면 볼수록 그 남자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이 그 누구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문득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세상이 자신을 향해, 캐서린을 향해, 두 사람이 자기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작은 방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 세상을 지켜보면서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지어 캐서린에게도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p, 283~284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레이스가 떠난 뒤 조급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들이 가끔 있었다. 별로 여행을 하고 싶지도 않으면서 여행을 떠나는 순간을 기대하는 사람처럼, 모든 여행자가 그렇듯이, 그도 떠나기 전에 할 일이 아주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일들이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p, 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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