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생애
이승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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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하나의 사랑이 있다. 영석과 선희의 사랑. 나이 든 남자인 영석은 응석을 부리고 나이 어린 여자인 선희는 그의 응석을 받아준다. 그들이 사랑하는 풍경이다. 선희가 다른 남자와의 관계에서, 가령 형배와의 관계에서 그런 역할을 하지 않았으며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영석이 형배가 아니고 형배가 영석이 아니기 때문이다. 형배가 영석처럼 응석을 부리지 않기 때문에 선희는 응석을 받아주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당신이 나의 방식을 정한다. 연인은 사랑하는 자이고, 동시에 연인의 사랑의 방식을 결정하는 자이다.
-p, 146~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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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지나가버린 나의 모습이, 나의 생각이 궁금해질때면 여러 노트들 사이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노트인듯 무심하게 꽂혀있는, (나름 가족들 눈엔 잘 띄지 않도록 위장해놓은) 일기장을 꺼내 읽는다. 내가 옆에 있는 사람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은 나의 일기장을 잠시만 들여다보면 누구나 쉽게 눈치챌 수 있는데 마치 여러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처럼 그렇게, 만나는 연인에 따라 다른 성격, 다른 취향, 다른 말투의 내가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나의 방식을 정한다. 연인은 사랑하는 자이고, 동시에 연인의 사랑의 방식을 결정하는 자이다. (p, 147)
      
그랬다. 어떤 연인에게 나는 어리광을 심하게 부리고 질투심이 많으며 소리를 꽥꽥 지르며 싸우는 일이 잦은 여자가 되었지만, 또 다른 연인에게는 무심하고, 애정표현을 잘 하지 않고, 모든 일을 조용히 넘어가려고 하는 여자가 되었고, 또 다른 연인에게는 마냥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하고, 새벽에 갑작스러운 연락에도 좋아하며 뛰쳐나가는 (연인 사이에 갑과 을이 있다면 을인) 여자가 되었다.

이 모든게 '사랑'이라는 말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라면 왜 항상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건지, 특히 연인과의 관계에서 '지금 이게 정말 사랑이 맞는걸까?'하는 위험한 의문이라도 생겨날때면 내가 알지 못하는, 혹시라도 존재하고 있다면 어떻게서든 알아내고 싶은  '사랑의 표본'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그동안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싶을 때마다 사랑을 다룬 수많은 영화를 보고, 수많은 책을 읽었듯 《사랑의 생애》라는 이 책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만났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홀려서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람의 내부에서 생을 시작한다." (p, 9) 라는 첫 문장을 읽자마자 '레드썬!' 신호와 함께 최면에 걸리듯 그렇게,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하는 모든 사랑에 관련된 행위들의 주체가 '사람'보단 '사랑'이 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의 숙주라고 표현하다니, 이런 멋진 표현에 이전에 연애를 하는 내 모습이 사랑의 숙주가 된 모습으로 보이고 "사랑 자체인 이 사랑이 두 사람 사이로 들어와 자기 생애를 시작한다. 그 생애가 연애의 기간이다. 어떤 생애는 짧고 어떤 생애는 길다. 어떤 생애는 죽음 후에 부활하고, 어떤 생애는 영원하다." (p, 167) 어쩌면 앞으로의 연애에서 그 기간이 길든 짧든 '이번에 내 몸으로 들어온 사랑의 생애는 이 정도구나.' 하고 생각해버릴 것만 같다.   

사랑의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 사랑하느라 바쁜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 그것의 근거나 방식이 어떠한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살지 않는 자가 삶이 무엇인지 묻는다. 참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 (p, 285)

앞으로도 수없이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수없이 사랑에서 빠져나오기도 할 것이다. 사랑에 빠져있을 땐 기꺼이 사랑의 숙주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사랑에서 빠져나왔을 땐 사랑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사랑에 대해 한없이 궁금해하며 사랑에 대해 갈증을 느끼기도 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그때마다 이 책에 표시해두었던 부분들에서 시원하진 않지만, 목이 타지 않을 정도로 적당하게 갈증을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글을 적으면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자꾸 떠올리다보니 문득, 내가 상대방에게 "인생에서 사랑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돼?" 하고 물었던게 생각이 났다. 나는 그의 대답에 만족했던가, 하지 못했던가. 그 대답에 비해 내 사랑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컸을까, 작았을까. 

오늘은 그 질문을 나한테 다시 던지며, 이 글을 읽고있는 분들에게도 묻고싶다. 
여러분은 인생에서 사랑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되나요?  

 

 

 

 

 

 

무지가 사랑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 모르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가. 연인은 내가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가 아는 것은 모른다는 것이다. 연인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이 '모름'은 의식적인 것이다. 연인은 의식적으로 모르는 사람이 된다. 이런 의식적인 무지의 과정이 매혹을 위해, 사랑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안다. 사랑의 상대가 지식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거니와 꼭 그래서만도 아니다. 현재의 무지는 앞으로의 앎의 과정을 위한 동기로 작용한다. 누구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알려고 시도하지는 않는다.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모르기 때문에 알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해야한다.

사랑하는 자는 알아가야 하는 숙제를 떠안는 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할 때 그 누군가는 앞으로 알아갈, 모르는 사람이(어야 한)다. 잘 알던(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사랑이 숙주 안에 깃들어 생애를 시작하려고 할 때 일어나는 신비스러운 일이다.
-p, 31~32


말하자면 매력이란, 특히 이성에게 어필하는 매력이란 어떠어떠하다고 발설하는 순간 흐릿해져버리는 이상한 물질인 것이다. 입김을 불면 사라지는 유리창의 성에와 같다고 해야 할까. 매력을 끈 사람이 희고 갸름한 얼굴선, 삼나무처럼 쭉 뻗은 몸매, 그리고 깊고 강렬한 눈빛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얼굴선이나 몸매나 눈빛이 매력의 주체라고 할 수는 없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인 매력은 일종의 마술, 정신을 빼놓는 홀림과 같은 것이 아닌가. 누군가에게 홀린 사람은 자기를 홀린 것이 그 사람의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한다. 얼굴선, 몸매, 눈빛 같은 것에 실려 있는 어떤 것,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기운이지, 얼굴선이나 몸매나 눈빛 자체는 아닌 것이다. 홀림당한 사람은 이성적 판단을 할 줄 모른다. 아니, 홀림은 이성적 판단에 잡히지 않는다. 홀림은 속수무책인 현상, 그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이성적 판단을 하는 사람은 홀린 사람이 아니다. 분석의 대상이 아니고, 따라서 설명될 수 없는 것이 매력이다.
-p, 71~72


원하는 것이 (많지는 않아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얻고자 누구에게 요구한 경험은 없었다. 그럴 사람이 없었고, 그럴 사람을 만들 생각도 하지 않았다.

선희를 만나면서 그가 정말로 원한 것은 사랑한다고 해주는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는 말을 해달라고 요구하는 경험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해달라고 요구하는 자기를 겪는 일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자기 자신에게 매료되었듯 그는 또 사랑한다고 말해달라고 요구하는 자기 자신에게 매료되었다. 그의 요구를 받아 그녀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가 아니라 자기가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해달라고 요구할 때, 그런 요구를 하는 자기를 보고 그런 요구를 하는 자기 목소리를 들을 때, 그는 흥분했다. 
-p, 142~143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는 것, '사랑하기'라는 기적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랑이다. 이 기적의 주체는 사랑이다. 연인들은 사랑이 기적을 행하는 장소이다. 사랑이 사랑하게 한다. 이는 마치 존재가 존재하게 하는 것과 같다. 어떤 철학자에 의하면 존재는 모든 존재자들을 존재하게 하는 근거이다. 존재의 근거와 같은 뜻으로 존재의 깊이, 그리고 존재 자체라는 표현도 보인다. 존재물들은 이 근거이고 깊이이며 존재 자체인 존재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존재는 모든 존재자들을 품고 있다. 모든 존재자들은 존재 안에 포섭되어 있다. 이 철학적 진술에 기대어 말하면, 사랑은 모든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게 하는 근거이다. 사랑의 근거이고 사랑의 깊이이고 사랑 자체이다. 세상의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근거이고 깊이이며 사랑 자체인 사랑 없이는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은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을 품고 있다.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 안에 포섭되어 있다. 사랑 자체인 이 사랑이 두 사람 사이로 들어와 자기 생애를 시작한다. 그 생애가 연애의 기간이다. 어떤 생애는 짧고 어떤 생애는 길다. 어떤 생애는 죽음 후에 부활하고, 어떤 생애는 영원하다.
-p, 166~167


그는 연인을 끌어당길 만한 매력이 자기에게 없기 때문에 그녀가 언제든 자기를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항시적으로 시달린다. 그녀가 자기를 떠난다고 할 때 그는 그녀를 붙잡을 수 있는 매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그녀가 언제든 떠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는 초조하고 조마조마하다. 그의 사랑은 불완전하고 불안정하다. 그는 이 사랑에 대해 주도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의 사랑은 순전히 그녀에게 달려 있다. 그래서 그녀의 표정과 눈빛과 말투에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게 된다. 사소한 것을 크게 본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확대하고 과장한다. 무의식적으로 하는 말이나 의도 없이 짓는 표정이 의식적인 것이 되고 의도한 것이 된다. 
-p, 230


이번에도 사랑의 이기심이 모든 것을 지휘했다. 사람의 덕은 사랑의 이기심을 이기지 못한다. 덕이 이기심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이 문장에 대한 바른 해석이 아니다. 바른 해석은, 사람이 사랑을 이기지 못한다, 이다. 
-p, 261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사랑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 한가하고 부질없는 짓이기 쉽다.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은, 사랑을 겪고 있기 때문에, 사랑이 그의 몸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즉 그가 곧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이 무엇인지 물을 이유가 없다.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사랑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략) 

사랑의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 사랑하느라 바쁜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 그것의 근거나 방식이 어떠한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살지 않는 자가 삶이 무엇인지 묻는다. 참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을 하고' 사랑을 하는 것이다. 정의 내리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어떻게 해도 정의되지 않는 것이 신이고 삶이고 사랑이기 때문이다. 
-p, 284~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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