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숭이들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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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언제까지 이런 짓을 하려나."
눈가에 미소를 띠고 웃는다. 입이 아니라 눈가에 미소를 띠는 모모의 웃는 방식이 사바사키는 좋다.
"이런 짓이라면, 데이트? 섹스? 이성 교제?"
토요일인 데다 거리도 가까워서 이후에는 아마도 모모네 집으로 가게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묻자,
"그 전부"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생각이 잠기거나, 갑자기 쓸쓸해지거나, 불안해지거나"
하고 말을 잇는다. 사바사키가 거들었다.
"누군가가 보고 싶어지거나, 목소리가 듣고 싶어지거나, 그런 생각이 든 것에 놀라거나, 행동하고 후회하거나?"
"그래, 맞아, 그거야."
모모는 웃었다. 쾌활하다고 하기에는 체념이 너무 섞인, 하지만 우습다는 듯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p, 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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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헤어짐을 결정하지 못하는 날 볼 때마다 친구는 말했다. 

"혼자였던 적이 없어서 혼자가 되기 무서운 건지도 몰라. 넌 네 옆에 다른 누군가, 지금 그 사람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겨야만 헤어짐을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여."

이 말을 듣고 나의 20대 중, 벌써 반 이상을 보냈음에도 오롯이 혼자였던 시간이 정말, 그리 길지 않다는 걸 깨닫곤 마음이 복잡해졌다. 대학생이 되자마자 서로 약간의 호감이 생기기가 무섭게 연애를 시작했다. 그렇게 3년 가까이 이어온 연애를 끝낸 후 '이제 혼자인 건가.' 싶을 때, 아직 마음을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한 상황에서 새로 다가온 사람과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다. 그렇게 또 3년의 연애를 했다.     

친구의 말처럼 혼자였던 적이 없어서 혼자가 되는 걸 무서워하는 건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그렇게, 어쩌다 보니, 다시 혼자가 되었다. 

 

 

 

혼자가 되니 드디어 내 마음의 민낯을 차분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매일 습관처럼 주고받던 연락 속에서 스스로 속이고 있던 내 감정들에 솔직해질 수 있었고, 연인이라는 관계 때문에 고려해야 했던 상대에 대한 배려 없이 나만을 위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반면, 혼자가 되니 때로는 가벼운 이야기를 가볍게, 특별한 이유 없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힘들었고, 그동안 알게 모르게 익숙해진 상대의 흔적들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져서 힘들었다.

이런 장단점을 골고루 경험하는 동안 오랜만에 에쿠니 가오리의 글에 잠깐 기대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부분일 뿐'이며 그래서 편리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것이 인간관계이지 싶다. 연애도 결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 '부분'이 전부인 양 기대어 사랑하다가도 어느 순간 또 다른 '부분'에 절망하여 등을 돌리기도 하는 것을 보면.

분명한 것은 누구든 예외 없이 상황에 따라 감정이 변하고 시점이 변할 수 있기에 그때그때 멈춰 서서 숨을 고르고 내 마음의 바닥을 차분히 들여다봐야 한다는 점이다. 나 자신과 그리고 타인과의 건강한 소통을 위해.

 

p, 335_에쿠니 가오리, 《벌거숭이들》 옮긴이의 말 中

 

 

 

 

 

 

유일하게 예약판매 기간에 구매할 정도로 커다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작가 에쿠니 가오리. 에쿠니 가오리가 좋은 이유에 대해선 막연히 그녀의 글이 갖고 있는 분위기에 매료되었다고, 그런 이유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책을 읽고 그녀의 글이 좋은 이유에 대한 확신이 섰다. 

비정상적인 관계들, 그 비정상적인 관계들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굳건한 주인공들 때문이었다. 내가 에쿠니 가오리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꼭 비정상적인 관계라 이름 붙이지 않아도 이런 주인공들이라면 어떤 어려운 관계 속에 내던져져도 잘 견딜 수 있지 않을까) 

에쿠니 가오리의 글이 사람들의 호불호가 확실하게 나뉘는 이유도 그녀의 글에서 다루는 관계들이 비정상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대표적으로는 불륜을 미화하기 때문에, 또 일반적으로 이름 붙여진 '바른' 관계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관계들 때문에.  


이번 《벌거숭이들》 의 주인공들 역시, 에쿠니 가오리의 글답게 비정상적인 관계들 속에 놓여있다. 다만 이런 관계에 대해 주인공들이 계속해서 의구심을 가지고 스스로의 마음을, 다른 모든 치장을 다 떨쳐낸 마음의 민낯을 들여다보는 과정을 거친다. 그 과정을 통해 어지러운 관계 속에서도 자신을 굳건하게 붙잡고 일상을 끝내주게, 멋지게 살아내는 모습을 보면 부러움이 앞선다. 

무엇보다 특이한 점은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큰(?) 인물들이 각자 자신의 시점을 통해 이야기를 하고 있어 우리 모두 그 인물들의 마음을 차분하게 같이 들여다 봐줄 수 있다는 것.


그녀의 글을 읽고 나니 어쩌면 나도, 앞으로 어떤 관계 속에 놓이게 되더라도 내 마음을 차분히 들여다보고(이 과정이 꼭 필요하다!) 나 자신을 굳건하게 붙잡아 둘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용기가 생긴다. 음, 아직은 혼자가 되어야만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레벨에 머물러 있지만 곧 레벨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묘한 힘 때문에 내가 머릿속이 어지러울 때마다 에쿠니 가오리의 글을 손에 쥐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애인이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다고 되풀이해봤자 별 의미는 없을 것 같았다. 사람과 사람 간의 모든 관계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하고 모모는 의구심을 갖는다. 이름이 그렇게 중요한걸까.
-p, 68


자신의 일은 마음에 든다. 그러나 가끔 ―예를 들면 지금― 그다지 유쾌하진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남의 집 안이라는, 일반적으론 보지 않아도 될 것을 봐버린다.

오후 한 시. 손에 들린 서류에 의하면 다음 현장은 맨션에서 맨션으로, 젊은 부부 플러스 갓난아이 플러스 고양이가 이사한다. 하야토는 다소 기분이 밝아진다. 적어도 가족 모두가 함께 옮겨가는 것이므로.
-p, 111


"그래서, 거긴 어때, 모두 무사하지?"
"물론 모두 무사해요."
유키는 끈기 있게 맞장구를 친다. 자신 이외의 '모두'가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간신히 전화를 끊었을 때 아이구야, 하는 식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싶었는데 웬걸, 달콤한 감정이 촛불처럼 소박하게 그러나 생생하게 자신의 가슴에 켜져 있는 것을 유키는 깨닫는다.

취하긴 했어도 에이스케의 말에는 위로와 애정이 담겨 있었다, 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아마 책임감도―.
누군가 한 남자의 '돌아갈 장소'라는 것. 결국 그거면 된 거다.
-p, 116


누군가 자신을 이해해줄 사람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건 모모 말고는 없다. 이럴 때를 대비해 전화가 있고 여자 친구가 있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이렇듯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을, 사람들은 다 어디에다 쏟으며 살까.
-p, 134


일방적으로 상대를 생각한다는 것을, 사바사키는 어릴 적 이후 해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이란, 초·중학생 무렵이다. 어떤 경우는 상대를 그저 좋아했다. 사실상 상대의 기분 따위는 아무려나 좋았다고 이제 와서 깨닫는다.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무작정 좋아하는 것을 어느 때부터인가 못하게 되었다. 상대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져주는 것이 연애의 전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바사키는 생각하고 만다. 그런 전제라는 것에, 일을 쉽고 간단히 끌어간다는 것 말고 다른 의미가 있을까.
-p, 271


살아 있든 죽었든 사람이 타인에게 기대할 수 있는 건 결국 '부분'이지 싶다.
-p, 303


콩 샐러드를 뒤적이며 모모는 이시와를 생각했다. 오늘 저녁에 만날 사바사키도. 언제까지일까. 그리고 생각한다. 언제까지 이런 짓을 해야 하는 걸까. 그렇다기보다, 어째서 인간은 꼭 누군가를 선택해야만 하는 걸까.
-p,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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