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마리 여기 있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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ϻ"보르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브릿마리는 어둠 속 의자에 앉아서 맨 처음 그 지도와 사랑에 빠진 계기가 된 빨간 점을 쳐다보며 중얼거린다. 그 점이 바로 그녀가 지도를 사랑하는 이유다. 헤져서 반만 남았고 빨간색은 빛이 바랬다. 그래도 하단의 좌측과 중앙의 중간쯤에 붙어 있고, 그 옆엔 이렇게 적혀 있다. '현재 위치.'


가끔은 내 현재 위치가 어딘지만 정확히 알고 있으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더라도 훨씬 수월하게 살아갈 수 있다. 

-p, 185~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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ϻ스물 다섯,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스물 다섯이라는 나이는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예쁘고 화려하고 더할 나위 없는 하루하루로 채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스물 다섯을 마무리하기까지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남은 지금, 완벽할 줄로만 알았던 나의 스물 다섯은 '공시생'이라는 타이틀을 단 채 스탠드 아래에서 문제집을 들여다보며 보냈다. 


합격생들이 올린 합격수기를 보며 '난 왜 이렇게까지 치열하게 공부하지 못하는걸까' 자책하다가도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내 주변 사람들의 여러 소식들에 책상 앞에 있는 내 모습이 초라해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꼈다. 그려왔던 모습과는 정 반대의 내 모습에 줄어드는 자존감을 느낄때마다 자존감을 잃는다는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처절하게 배운 1년이었다.


밝은 모습만 기록하고 싶었던 블로그에도 징징거리는 글들을 올리게되고, 가족과 친구들의 응원도 곱게 들리지 않는 더러운 성격을 갖게 되었고, 주변 사람들과 스스로 비교하는게 싫어서 점점 연락도 끊었다. 


정말 기쁜 일이 생기면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싶던 친구의 취업 소식에 겉으론 축하해주며 속으로는 내 걱정이 더 컸던 날엔 나 자신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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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올해의 마지막 시험을 보던 날, 시험 관련 책이 잔뜩 들어있는 가방엔 시험 끝나고 아무 생각없이 읽을 책 한권이 들어있었다. 허무하게 끝낸 50분이라는 시험 후에 바로 강남 교보문고로 이동해서 점심 대신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읽었다.


작년까지만해도 아무렇지 않던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노닥거리는 이 시간이 어째서 그 순간에는 무언가를 성취해 낸 것처럼 다가오던지, 한산하던 카페가 주말답게 사람들이 몰려와 자리에 계속 앉아있는게 미안하게 느껴질때까지 그 자리에 꼼짝않고 그 여유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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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사람의 인연을 믿는다. 


그동안 서서히 잃은 자존감에 쉽게 밖에 나가지도 못할 정도로 스스로가 작아져있었던 그 때, 오랜만에 작은 성취감을 느끼며 펼친 책의 첫 장에 쓰여진 이 글을 보며 책과 사람의 인연에 대한 믿음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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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네에서 평생 벗어난 적 없이 남편과 이웃의 인정을 받기 위해 수동적으로만 살아오던 '브릿마리'. 


여러 고비들이 있었지만 그녀가 새로운 직장을 얻고, 처음 가보는 동네에서 낯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위한 능동적인 시도들을 하는 모습들. 이렇게 늦은 나이에 어렵게 뗀 발걸음을 눈으로 따라가며 그녀 덕분에 소설 속의 다른 인물들 만큼이나 나도 기분 좋은 영향을 받았다. 작은 성취들이 쌓이고 쌓이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힘이 된다는 것, 당장이라도 아주 작은 성취라도 해내야 할 것만 같았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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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바글바글해진 카페를 나와 친구집에 가서 친구를 기다리며 브릿마리의 작은 성취들을 조용히 응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취업소식을 알려왔을때 진심으로 축하해주지 못했다던 친구의 집이었다. 새벽 늦게까지 퇴근하지 못하는 친구를 기다리며 그때의 미안한 마음을 가득 담아 친구의 스물 다섯도, 나의 스물 다섯도 잘 마무리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힘들지만 앞으로 우리가 이루어낼 작은 성취들이 쌓이고 쌓여 얼마나 멋진 인생을 살게 될지 기대가 된다. 뭐, 기대처럼 멋진 인생을 살지 못하게 될지라도 작은 성취들로 인해 그 순간 순간에 느끼게 될 행복은 계속될테니까 괜찮다. 다 괜찮다.


그거 아나? 난 지금도 '책에 대한 흔적을 남기자'라는 작은 성취를 이루어냈다. 행복하다!

   













화분에는 흙만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밑에서 꽃들이 봄을 기다리고 있다. 겨울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것에도 가능성이 있다고 믿으며 물을 주어야 한다. 브릿마리는 자신의 마음속에도 그런 믿음이 있는지 아니면 그저 그러길 바라는 마음뿐인지 더 이상 알 수가 없다. 어쩌면 둘 다 없는지도 모른다.

-p, 68~69



멀리 떠나서 색다른 경험을 할 날만을 꿈꾸는 사람들도 있다는 건 알지만, 브릿마리는 모든 게 늘 똑같은 집에 머물 날을 꿈꾼다. 그녀는 자기 손으로 침대를 정리하고 싶다. 

-p, 73



그녀가 의식하는 건 사실 켄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였다.


그가 언제부터 그녀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신경 쓰지 않았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한때는 신경 썼다는 건 안다. 그가 그녀라는 존재가 있다는 걸 아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던 시절의 이야기다. 사랑이 언제 꽃을 피우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어느 날 눈을 떠보면 꽃이 만개해 있으니까. 시들 때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보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발코니 식물과 상당히 비슷하다. 가끔은 과탄산소다로도 아무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브릿마리는 그들의 결혼 생활이 언제부터 손쓸 도리가 없게 되었는지, 언제부터 그녀가 아무리 많은 받침 접시를 동원해도 닳고 흠집이 생기는 걸 막을 수 없었는지 알지 못한다. 한때는 자는 동안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고, 그녀는 그의 꿈을 꾸었다. 브릿마리에게 꿈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그의 꿈이 더 컸고, 꿈이 가장 큰 사람이 승자가 되는 게 이 세상의 법칙이었을 뿐이다. 그녀는 일찌감치 그 사실을 터득했다. 

(…)

켄트는 사회성이 떨어진다며 브릿마리에게 자기가 두 사람의 몫의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게 몇 년 더 집을 지키라고 했다. 몇 년이 십 수 년이 되었고 십 수 년이 평생이 되었다. 세월은 그런 습성이 있다. 브릿마리에게 처음부터 아무 기대도 없었던 게 아니다.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기대의 유통기한이 지났을 뿐이다.

-p, 74~75



"당신 아버지는 토트넘 팬이라고 했죠? 괜찮으면 그게 무슨 뜻인지 설명해줄래요?"

뱅크는 유리잔에 따른 맥주를 마신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개가 뱅크의 무릎에 고개를 묻는다.

"토트넘 팬이면 받는 사랑보다 주는 사랑이 더 많게 되어 있어요." 뱅크가 말한다.


브릿마리는 멀쩡한 쪽 손으로 붕대를 감은 쪽 손을 감싼다.

축구 사랑엔 불필요하게 얽혀 있는 사항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아 보인다.


"그럼 그 팀은 나쁜 팀이라는 뜻이네요."

뱅크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토트넘은 나쁜 팀 중에서도 제일 나쁜 팀이에요. 왜냐하면 거의 잘하는 팀에 가깝거든요. 토트넘은 늘 환상적인 경기를 보여주겠다고 약속해요. 그런 식으로 희망을 심어줘요. 그래서 계속 사랑할 수밖에 없는데, 점점 더 기발한 방법으로 팬들을 실망시키죠."

브릿마리는 말이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뱅크는 일어나서 애기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딸은 그가 좋아했던 팀과 늘 똑같았죠."

-p, 276~277



1년이 몇 년이 되고 몇 년이 평생이 되었다.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남은 세월보다 지난 세월이 더 많은데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취직할 수도 있었어. 내가 집에 있겠다고 선택한 거야. 나는 희생양이 아니야." 브릿마리는 짚고 넘어갔다.

취업의 문턱에 얼마나 가까웠었는지는 애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면접을 봤다. 몇 군데나 봤다. 켄트에게 얘기하면 월급이 얼마냐고 묻고, 얼마냐고 얘기하면 웃으며 "내가 그만큼 줄 테니까 그냥 집에 있는 게 낫지 않겠어?"라고 할 게 뻔했으니 그에게는 비밀로 했다. 그는 농담 삼아 한 말이겠지만 그녀는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절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너도 이해해줬으면 좋겠는데 켄트는 스트레스가 많거든." 그녀가 설명한다.

사실 그렇다. 온 가족을 먹여 살리는 건 시간이 많이 들고 존경받아 마땅한 일이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파악하려면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해." 브릿마리는 쥐에게 이렇게 얘기하는데 끝으로 갈수록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진다.

-p, 292~293



"그리고 특히 세계 지리에 대해서라면 상식이 어마어마해!" 그녀는 짚고 넘어간다.

세계 지리는 한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십자말 퀴즈를 풀 때 아주 유용한 기술이다. 쉽게 습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인간에게 사랑이 불꽃놀이일 필요는 없다. 다섯 글자짜리 수도를 찾는 문제거나 구두 굽을 갈아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일 수도 있다.

-p, 294



"태어난 그날부터 리버풀을 응원할 필요는 없어요, 코치님. 어른이 된 다음에 그래도 돼요."

그날은 축구 대회가 열리는 날이자 작별의 날이자 브릿마리가 차에 기름을 직접 넣은 날이다. 이제 그녀는 누가 그러자고 하면 산을 오르고 바다를 건널 수도 있을 것이다.

-p, 362



어느 나이쯤 되면 인간의 자문은 하나로 귀결된다.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눈을 한참 동안 질끈 감고 있으면 행복했던 추억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상당히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다섯 살 때 맡았던 엄마의 살냄새, 갑자기 쏟아진 폭우를 피하느라 깔깔대며 현관으로 달려갔던 날. 그녀의 뺨에 닿았던 아버지의 서늘한 코끝. 절대 빨지 못하게 했던 봉제 인형의 까슬까슬한 발에서 느낄 수 있던 포근함. 바닷가에서 마지막으로 보낸 휴가 때 바위를 살금살금 덮치던 파도 소리. 극장에서 들은 박수갈채. 그 뒤로 함께 길을 걸을 때 산들바람에 아무렇게나 날리던 언니의 머리칼.


그것 말고는? 또 언제 그녀가 행복했을까? 몇몇 순간들이 더 있다. 문 앞에서 짤랑거리던 열쇠 소리. 잠든 동안 그녀의 손바닥을 두드리던 켄트의 심장. 아이들의 웃음소리. 발코니에서 느껴지던 바람. 향긋한 튤립. 진정한 사랑.

첫 키스.

몇 개의 순간들. 인간이라면 누구나 시간의 흐름을 놓아버리고 그 속으로 빠져들어 그 순간에 머물 찰나의 기회를 몇 번 누릴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를 격렬하게 사랑할 기회를, 열정으로 폭발할 기회를 누릴 수 있다.


어쩌면 허락된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 몇 번 그런 기회를 누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자신의 한계 너머에서 몇 번이나 숨을 쉴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순수한 감정으로 거리낌없이 우렁차게 환호성을 지를 수 있을까? 얼마나 여러 번 기억상실이라는 축복을 누릴 수 있을까?


모든 열정은 어린애 같다. 진부하고 순수하다. 후천적으로 터득하는 게 아니라 본능적인 것이기에 우리를 압도한다. 우리를 뒤집어놓는다. 우리를 휩쓸고 간다. 다른 모든 감정은 이 땅의 소산이지만 열정은 우주에 거한다.


열정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게 우리에게 무엇을 주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요구하느냐, 그것이 관건이다. 인간으로서의 품위. 곤혹스러워하는 사람들의 표정과 잘난 척 고개를 젓는 그들의 반응.

-p, 381~383 



어쩌면 그녀는 멈출지 모른다. 어쩌면 다른 문을 한 번 더 두드릴지 모른다.

아니면 그냥 달릴지 모른다.

알다시피 브릿마리에게는 연료가 넉넉하지 않은가.

-p, 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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