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일간의 엄마
시미즈 켄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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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셀프타이머를 작동시켰다. 셔터가 내려간다. 나는 행복한 순간을 도려냈다. 사진 속에 '순간'을 가뒀다.

-p,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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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지쳐버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던 날의 밤, 머리맡에 두고 나중으로 미뤄두기만 했던 이 책을 이불 위에 엎드려 천천히 읽었다. 마음을 달랠 수 있을 정도로만 조금, 조그만 읽다가 자야지 하며 펼쳤던 책이었다. 조금만 읽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도 새벽 4시가 다 되어서야 덮을 수 있었고 그 후에 다시 마주하게 된 책 표지, 표지의 사진 속 환한 미소가 실은 참아내기 힘든 고통을 감춘 미소라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내 마음이 지쳐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을만큼 (여러 의미로) 마음이 아팠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인 '질투의 화신'에서는 그동안 드라마에서 낯선 소재였던 유방암에 대해 다루었다. 드라마 속에서는 유방암이 주인공들의 사랑의 매개체, 극복의 대상이었고, 그 외의 다른 코믹스러운 상황들 때문에 심각하게 느껴지지가 않았던 반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유방암은 한 여자의 삶을 무너뜨린, 고작 100일의 시간을 살아낸 아이에게서 엄마를 빼앗아간, 한 남자에게선 사랑하는 여자를, 가족에겐 사랑하는 딸을 빼앗아간 무시무시한 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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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이 책은 유방암에 걸린 당사자가 아닌, 유방암에 걸린 사랑하는 여자를 옆에서 내내 지켜봐야했던 남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책이라 더 마음을 아프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입장, 그런 상황에서 가혹하게도 그에게 주어지는 두 가지의 선택지.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줄이는 대신 살릴 수 있는 희망을 놓아버리느냐, 살릴 수 있는 희망을 놓지 않는 대신 고통을 감수하게 하느냐의 가혹한 두 가지의 선택지가 그 앞에 주어질때마다 내 마음도 같이 무너져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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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무시무시한 상황에서 가장 무서웠을 당사자인 나오. 그녀는 자신의 주변 사람뿐만 아니라 이렇게 책을 통해서 그녀를 마주한 나에게도 큰 영향을 미칠 정도로 멋진 여자였다.


모든 상황에서 자신이 정해놓은 확고한 기준으로 침착하고 현명하게 행동하는 그녀의 모습에 비해 내 삶의 기준이 흐릿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나 자신이 많이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였는데, 그런 그녀의 뚝심은 유방암이라는 큰 장애물이 삶을 떡하니 막고있는 가혹한 상황에서도 자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큰 흔들림 없이 견뎌낼 수 있게 해주었다.  


책을 덮으며, 이 책의 저자인 시미즈 켄과 그의 아내 나오의 상황처럼 곁에 있는 사람이 아플 때, 대신 아파주고 싶을만큼 사랑하지만 어찌해야할지 모를 정도로 힘든 상황에 놓인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건강하다는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내 마음을 굳게 만들어준 책이었다.  







나는 셀프타이머를 작동시켰다. 셔터가 내려간다. 나는 행복한 순간을 도려냈다. 사진 속에 '순간'을 가뒀다.
-p, 120


완화 치료로 전환―그 '스위치'를 누구도 아닌 내가 누른 것이다. 그 스위치를 눌렀다는 건 나오가 마지막을 맞이한다는 의미였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동안 내 안에선 무언가가 갈가리 찢겨나가는 것만 같았다. 나오가 오래도록 살아 있어주길 바라면서도 나는 이렇게 나오의 마지막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나오를 위해서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건 나오의 생을 끝내기 위한 준비다.
-p,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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