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 우체국 - 황경신의 한뼘이야기
황경신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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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볼까, 그때처럼." 나는 그가 가리키는 곳에 풀썩 주저앉는다. "내가 이쯤, 그리고 내 왼쪽에 네가 있었어."

내 왼쪽에 자리를 잡으며 그가 묻는다.

"거리는? 이 정도?"

손을 뻗으면 닿을 수도 있는 거리. 그와 나 사이를 미세하게 떠돌던 먼지, 스물세 살의 어느 날, 우리는 여기 있었다. 나의 무심한 행동을 지켜보던 그가 농담을 던졌고 그래서 같이 웃었다. 그 순간 빛의 입자들이 한꺼번에 터진 듯 눈부시고 따뜻한 에너지가 공간을 감사 안았다.

만약 행복의 밀도나 무게를 잴 수 있는 저울이 있다면 그때의 에너지를 달아보고 싶을 정도로, 그래서 한 천 년 동안 잊고 싶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행복의 느낌이 가득 차올랐다. 불순물은 티끌만큼도 없는 백 퍼센트의 충만함이었다.


-p, 251 



"이것으로 괜찮겠어?"

그의 걱정스러운 손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응, 충분해." 내 심장은 만족한 듯 조그맣게 두근거린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을 때의 에너지가 필요했던 것뿐이야."

감은 눈 너머로, 조금 슬픈 듯 그가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나는 느낀다. 이 에너지는 앞으로 십 년쯤 나를 살게 할 거라는 믿음이 마음을 휘감는다. 충분해, 충분해, 중얼거리며 나는 숨을 삼킨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물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늦게 시작하기 위해.

-p, 252 


(추억의 에너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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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팬, 팅커벨, 빨강머리의 앤, 플란다스의 개 등 어릴 적 보던 동화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미니엽서를 잔뜩 샀다. 미니엽서가 들어있던 작은 틴케이스를 보며 여기엔 무얼 담을까 하는 '별 생각없이 하는, 아무 의미없는 고민'을 해본다. 팬시점에 가면 쭉 진열되어 있는 스티커 앞에 서서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손에 든 스티커 여러 장을 들고 계산대로 간다. 그렇게 쓸데없는 물건들이 방 여기저기에 늘어져있는 모습을 보고 엄마는 항상 '어린애도 아니고 이런걸 왜 사~' 하고 놀리곤하는데, 그럴때마다 난 '어른답지 않은 귀여운 소비'를 한 것에 그렇게 만족스러울 수가 없다.

내 앞에 스스로 선택해야 할 문제들이 많아질수록, 내 어깨에 기꺼이 책임져야 할 존재들이 많아질수록, 어리광으로는 어떤 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갈수록, 시간의 속도가 너무 빨라 따라가기 버겁다고 느끼는 날이 잦아질수록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을 때의 에너지(p, 252)'를 찾곤한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을 때의 에너지'가 필요할 때마다 어른답지 않은 귀여운 소비를 하기도 하고, 과자와 초콜릿, 아이스크림 등 군것질거리를 입에 잔뜩 문 채 아이처럼 정신없이 새콤, 달콤하고 짭쪼름한 자극적인 맛에 취해보기도 하는데 이런 행위들로 충전된 에너지는 하루를, 이틀을, 일주일을, 한달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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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신 작가의 쾌활하면서도 순수한, 이 짧은 글들을 읽고 '어른답지 않은 소비'와 '군것질'을 한동안 미뤄두어도 좋을 만큼 순수한 에너지를 받았다. 

그녀의 글을 통해 '우리가 어른이 된 후 버려진 세발자전거가 살아갈 세상', '쓸모없어진 인형들이 밤새 노는 작은 바', '크리스마스의 빨간 양말', '산타클로스', '밤이면 돌아다니는 동물원의 동물들' 등 어린 시절 머릿 속에서 그려보았던 동화같은 존재들을 만나다보니 한동안은 이 현실이 동화처럼 느껴져서 힘들지 않을 것만 같다. 아이로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물고 싶은, 어른이라는 세상으로 가는 발걸음을 조금이라도 더 늦게 내딛고 싶은 '어른'을 위해 쓰여진 동화책을 찾는다면 바로 이 책이 아닐까. 

나는 어른이 되어버렸기에 내 몫인 일인분의 인생을 혹은 그보다 더 많은 인생을 책임지며 살아가야 한다. 여전히 아이처럼 여리고 순수하고 철 들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은 나와 아직은 무섭고 너무 커다란, 그럼에도 잘 살아내야 하는 현실 속의 내가 부딪힐 때마다 《초콜릿 우체국》처럼 세상을 동화처럼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글이나 때로는 어른답지 않은 소비, 입안 가득 문 군것질 등의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을 때의 에너지'를 받을 수 있는 것들을 기꺼이 찾아내며 살아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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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순수한 언어로, 순수한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는 이야기 속에서도 어른의 모습을 찾고, 어른의 감정으로 공감하곤 했지만 분명한 건, 이 책을 읽고나니 그런 어른의 시선마저 동화같이 느껴졌다는 것.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삶…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잖아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호랑이 우리를 지나가는데, 문득 저 호랑이가 정말 저 우리를 빠져나오지 못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호랑이는 우리가 보지 않을 때, 사람들이 하나도 없을 때, 그러니까 이를테면 이런 깊은 밤… 빠져나와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돌아다니다가… 그러다가 새벽에 다시 우리로 돌아오는 게 아닐까… 밤새 돌아다니느라 너무 피곤해서, 낮에는 저러고 있는 게 아닐까…"

"왜 돌아오지요?"

남자가 묻는다.

"갈 곳이 없으니까요. 시멘트 바닥에다가 딱딱한 건물들… 그리고 야생을 잃어버린 동물들이 사냥할 수 있는 곳도… 그걸 알면서도 매일 밤 나가보고, 또 돌아오고…"

"갈 곳이 없는 건 사실입니다. 아프리카도 북극도 너무 멀지요. 바다에 이르는 강은 댐으로 막혀 있고, 산에는 어린 나무들뿐입니다. 새들은 날아다니기도 하지만… 뭐 어쨌든 우린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입니다. 귀하니까 가둬놓고 보는 거지요. 그만큼 바깥에서는 잡힐 위험이 높은 거고. 재수가 나쁘면 잡히는 과정에서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습니다. 밀렵군에 의해 박제가 되기도 해요. 우린 죄다 겁쟁이가 됐습니다. 그게 동물원에서 배운 거지요."

가슴 끝에서 기묘한 통증이 느껴진다. 두렵지만, 그건 인간으로서 교육받은 두려움이라고, 나의 본능이 나를 향해 소리치고 있다. 나는 가까스로 침묵을 지킨다.

"매일이 힘들고 실망스럽지요. 하지만 오늘 밤에는 혹시라도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동물원을 떠납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도 될 거라고 기대하면서. 그러나 새벽이 되면 지친 몸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러니 우리가 당신 앞에서 뛰어다니지 않는다 해도 너무 원망하지 말아요. 좌우지간 당신은 철장 밖에 있고, 우리는 철장 안에 있으니까. 그리고 이제 잠을 좀 자두도록 해요."

남자는 말을 마치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서, 곧 사라진다.

-p, 45~47 (한밤의 동물원 中)



어떤 사랑은 그렇게 시작된다. 오로지 나를 통해 가치 있는 무엇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음을 알게 될 때, 나의 가치가 그로 인해 빛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시작되는 사랑이 있다. 한번 시작된 사랑은 모든 종류의 의심 속에서도 자라날 수밖에 없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무엇과 비할 바가 없어진다. 나의 자아는 점점 더 성장하여 그의 습관, 그의 의식, 그의 독특한 문체를 습득하기 시작했다. 오 년이 지나자 그의 시를 모방할 수 있게 되었고, 십 년이 지났을 때는 그의 시 속으로 침투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나 외의 다른 것으로 시를 쓸 수 없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p, 70 (거기 아무도 없나요 中)



감정을 숨기기에는 너무 오래된 존재가 있다. 언제나 나를 향해 정면으로 걸어오는, 부딪치면 상처를 받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피할 수 없는 존재. 나는 그에게 그런 존재였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는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힘겨운 무엇이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기에는 너무 긴 세월이었다.

-p, 72 (거기 아무도 없나요 中)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누군가가 자신을 믿는 것이 두려운 거야."

달의 유령이 빙긋, 웃었습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의 웃는 입매를 본 것 같았어요.

"절망의 친구는 절망, 희망의 친구는 희망… 그리고 가끔은 절망과 희망이 사랑에 빠지는 거야."

그가 다시 말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되죠?"

내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될까?"

그가 말했습니다.

"희망은 사랑하는 절망이 불행하니까 불행할 테고, 절망은 계속 불행할 테고…"

나의 대답에, 그가 다시 한 번 빙긋, 하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내 몸은 텅 비어 있어서, 절망이든 희망이든 마음대로 들어왔다 나갈 수 있어. 어느 쪽도 나에겐 상관이 없지. 나는 어차피 비어 있고, 내 속에 무엇이 들어온다 해도 나를 바꿀 수는 없으니까."

"나에게도 상관은 없어요."

내가 대답했습니다.

"나 같은 유령이 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서늘한 바람이 불고, 그는 사라졌습니다. 숲에는 이미 한 조각의 달빛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고, 작은 동물들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세상이 천천히 깨어나고 있었습니다. 깊은 숲 속에서,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p, 245~246 (달의 유령 中)



"이것으로 괜찮겠어?"

그의 걱정스러운 손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응, 충분해." 내 심장은 만족한 듯 조그맣게 두근거린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을 때의 에너지가 필요했던 것뿐이야."

감은 눈 너머로, 조금 슬픈 듯 그가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나는 느낀다. 이 에너지는 앞으로 십 년쯤 나를 살게 할 거라는 믿음이 마음을 휘감는다. 충분해, 충분해, 중얼거리며 나는 숨을 삼킨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물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늦게 시작하기 위해.

-p, 252 (추억의 에너지 中)



내가 살아 있어도 괜찮을, 시시하지 않은 이유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던 건지도 몰라, 나는 생각했다. 살아가는 것은, 계속해서 살아 있고 싶은 것은, 사소하고 시시한 이유들 때문인지도. 하지만 그런 것들이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거라면, 시시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 이를테면 몇 년 만에 갑자기 그리운 이름을 떠올리며 내일은 전화를 걸어봐야지, 하고 결심하는 일. 올해의 보졸레 누보는 어디서 누구와 마실까, 고민하는 일. 어떤 종류의 절망과 고통이 점점 희미해져가는 것을 기다리는 일. 그리고 따뜻한 붕어빵 하나를 굽는 데 열중하는 일.

-p, 282~283 (붕어빵 편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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