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여자 - 소녀가 어른이 되기까지 새로운 개인의 탄생
임경선 지음 / 마음산책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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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일은 불안에 떨거나 불확실성에 몸서리치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이 나를 제대로 깊이 충족해주는지를 차근차근 알아가려는 필요한 과정이었다. 예측 가능하게 안정된 상황에 처하는 것, 그것은 비현실적이었다. '이게 정말 내가 원하는 게 맞아?'라고 자꾸 스스로를 들볶을 것만 같았다. 그 흔들림이 싫어서 손쉬운 행복을 택했다 해도, 그런 쉬운 행복은 어느덧 싱거워졌다. 내가 나일 수밖에 없는 기쁨과 한계를 동시에 느끼는 것이 좋았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당연하다는 듯이 편안하게 다루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나 신기하다. 어떻게 저렇게 행복이라는 개념에 편안할 수가 있지? 애초에 나는 너무 삐딱하고 비관적인지도 모르겠다. 전형적인 행복감 혹은 성취감을 느낄 때면 그것을 오래오래 느긋이 즐기기보다도, 성질이 급해서인지 이 느낌이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가장 먼저 의식했고, 지금 얻은 이 행복이 이내 시시해지리라는 것을 미리 시무룩하게 받아들이며 스스로 찬물을 끼얹었다. 하지만 또 반대로 남들이 고통스러워하는 전형적인 불행이라는 감정을 느낄 때면 그 누구보다도 먼저 내 마음을 깊숙이 들여다보며 희망의 불씨를 발견했다. 더불어 내게 여전히 욕망이 있음을 확인할 때 느끼는 그 격정적이고 예민한 감각은 '불행'이 아니라 '결핍'에 가까웠고, 그 결핍을 채우려고 속에서 울컥하는 본능이 바닥을 치고 다시 올라갈 때 진정한 천국의 맛을 보았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삶의 모든 측면에 회색주의적인 부분이 있었다. 항상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며 중간 어디에선가 흔들리는 태도. 어떤 식으로든 고착되는 것에 굉장히 숨막혀했던 것 같다. 유동적이고 흔들리는 가운데 가지게 되는 안정감이 좋았다. 온몸의 세포를 예민하게 곤두세우며 스스로의 상황을 조금씩 움직여가고 있다는 확실한 감촉이 들 때, 가장 충만하고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p, 206~208 















늦게 잠들게 될거라는 걸 알지만 모두 잠든 이 시간에 글을 적는게 좋다. 조용하고 날이 밝기 전까진 당장 끝내야 할 일이 없으니 마음이 여유롭고,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고맙게도 정신없던 오후보단 시간이 느리게 느리게 가주는 것만 같다. (비록 줄어든 수면시간으로 내일 하루 정신이 몽롱할지언정)

항상 새로운 글을 적기 전엔 항상 이전에 썼던 글들을 살펴본다. 아니 구경한다는 말이 맞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 다시 보면 낯 간지러워지는 글들이 많아서 오랜 시간 두고 볼 순 없고, 돈이 없을 때 옷가게 밖에서, 화장품가게 밖에서 아이쇼핑하듯 힐끗 힐끗 그저 구경하는 것이다.

예전에 적었던 글을 쭉 보다보면 드는 한 가지 생각은 '너무 어두운 이야기, 내 상처였던 이야기들을 적은걸까..' 인데 그럴때마다 심하다 싶은 글들은 비공개로 돌려두어야 하나 여러번 생각하다가도, 이내 '이런 모습도 나야' 라며 내버려두길 반복한다.

임경선 작가님의 《나라는 여자》를 읽고 이제 그런 고민은 그만두기로 했다. 이렇게 힘들다, 지친다, 이 길이 맞는걸까 적어놓은 수많은 이야기들은 그녀의 말에 의하면 '흔들리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일은 불안에 떨거나 불확실성에 몸서리치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이 나를 제대로 깊이 충족해주는지를 차근차근 알아가려는 필요한 과정'(p, 206) 인 것이니까.

  







임경선 나라는여자.JPG








어린 시절,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던 그녀,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프리랜서로 생활하고 있는 그녀이다. (트위터에 오늘의 작업공간이라며 올라오는 예쁜 카페, 예쁜 공간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한 곳에 머물러 지겨울만큼 지겨워진 나와는 상반된 모습에 부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24년을 살아도 전주의 구석구석을 알지 못하는데,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여기저기 떠돌며 마음 둘 곳 없었던 그녀의 삶은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측은한 마음도 머물고,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그녀이지만 살펴보면 갑상선암 때문에 긴 투병생활과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그 후에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아야 했던 그녀였다.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런 상처들을 꽁꽁 숨기지 않고 이 책에 담아냈다. 책을 보면 그녀는 이렇게 상처를 가지고 있었지만 여기저기 떠돌며 마음 둘 곳 없었던 상처로 인해 빠른 눈치와 사람의 심리를 잘 파악해내는 여자가 되었고, 갑상선암이라는 상처 때문에 지금 그녀가 정말 좋아하고 잘하는,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여자가 되었으니 그 상처들이 그녀가 멋진 '어른 여자'가 될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지금 내가 안고 있는 상처들도 분명 내 안에서 내가 더 성장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되어줄 것이다. 그런 믿음을 가진 채, 내 상처들을 숨기지 않고 계속해서 이 공간에 기록해나가려 한다. 언젠가 내가 정말 스스로 멋지다고 생각할 수 있는 여자가 되었을 때 내 상처를 함께 보고 위로해준 많은 분들께  '잘했다!' 는 칭찬과 축하의 말을 들을 생각을 하니 설레는 새벽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그냥 '묵혀내야' 하는 시간이 있다. 살기 위해 죽은 듯이 살아내야 하는 시간. 
-p, 56


딸에게 있어 아빠가 인생의 첫 남자라면, 딸은 그런 아빠와 언제쯤 한번은 춤을 춰볼 수 있을까? 외국 영화의 결혼식 피로연 장면에서 새 신부와 그녀의 아버지가 댄스 플로어에서 파티의 시작을 알리는 첫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정작 먼 훗날, 나의 결혼식에서 현실의 아빠는 갓 결혼한 딸과의 춤이나 포옹은커녕, 하객들의 눈을 피해 피로연장 밖으로 슬그머니 빠져나가 혼자 눈시울을 적셨다고 친구들이 일러주던데…. 그럴 줄 알았다면 그날 밤 브라질리안 댄스파티에서 나는 그의 손을 잡아 댄스 플로어로 초대했어야 했다.
-p, 74~75


굳이 순순히 죄를 인정한다면 내가 상대를 처음부터, 혹은 도중부터라도 '더' 사랑했다는 점이다. 적당히 나 좋다는 괜찮은 남자와 '사귀어주는' 것보다 너무너무 좋아하는 남자가 생겨 온몸과 온 정신의 예민함을 끌어 모아 최선을 다해 그를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 더 깊은 충만감을 주었다. 물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애태우고 마음 닳고 차일 가능성은 높지만 어쩔 수 없이 항복하는 감정을 가질 수 있는 것, 상대 앞에서 자신 있게 무력해지는 것마저도 행복했다.
어차피 상대를 진심으로 좋아하면 그 어떤 연애라도 백 퍼센트 상처 받게 되어 있다. 사실, 연애를 '잘'하는 여자들은 그만큼 자주 차일 각오를 한 여자들이었다. 남자에게 늘 먼저 이별을 고하는 대단한 여자들이야말로 자기 좋다는 남자와 '사귀어주기만 한' 불쌍한 여자들일 것이다.
-p, 92


연애가 정말 그렇게 좋은 것일까라는 의심도 함께 들었다. 사실 연애는 위태위태하고 불확실하기만 하다. 연애를 안 하고 있는 사람들은 연애 못한다며 불안해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 상태가 더 자유롭고 평화롭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통감하고 있다. 연애하는 여자들은 어쩌면 이리도 적응과 변화에 더딜까? 좀 '드라이'하게 살아볼까 다짐해봐도, 다시 말하지만 원래가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이것은 놓인 정황에 따라 때로는 축복이 아닌 저주가 된다. 저주임을 알면서도 또 한 번 강을 건너고 만다.
그 모든 환희와 파멸의 과정을 강 건너에서 '드라이'하게 지켜보는, 연애 안 하는 여자들은 이런 질문을 던질지도 모른다.
"그럼 왜 또 연애해?"
혹자는 운명론을 논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연애하는 여자들은 운명적인 사랑을 믿을 만큼 또 순진하지는 않다. 그 대신 그녀들이 직접 목격하고 만지고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운명적인 사랑의 '순간들'이었다. 그 찰나의 황홀경을 느끼게 해준 몇 번의 운명적인 순간들이 그 다음 사랑을 낙관적으로 꿈꾸게 할 만큼 깊고 강렬했던 것이다.
사랑이 어떤 형태로든 가시적인 결실을 가져다줄 수 없음을 그녀들은 어느 순간부터 눈치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운명을 느끼게 하는 그 충만한 순간들이 자신의 마음속에 깊은 흔적을 만들어놓고 갔다면 '그것으로 된 거다' 라는 자연스러운 체념이 슬픔을 대신했다.
-p, 94~95


사람을 좋아하는 느낌을 한 단어로 표현해보라고 한다면 나의 대답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Fuzzy : 애매모호한, 불분명한, 흐릿한
나에게 연애 감정이란 명료함 속에서 생기지 않고 애매함과 몽롱한 분위기, 즉 짙은 안개와도 같은 공기감 속에서 생겨났다.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상의 공기 농도가 짙어지면 아뿔싸 그것이 시작됐음을 알았다.
사랑에 빠지면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흔들려'보인다. 눈빛은 언제라도 와락 울음을 터뜨릴 것 같고, 심장은 오랜 시간 달달 끓인 양 부들부들 언제라도 상대의 말 한마디에 홈이 파일 지경이다. 이렇게 시야가 흔들리고 흐려지는데 감각만이 한층 더 예민해지는 느낌은 오로지 두 경우, 사랑에 빠졌을 때와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뿐이다. 그것은 아마도 행복감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어버릴 정도로 압도적이라 어딘가 호흡이 뭉개지고 흐트러지는 것이리라.
사랑에 빠지면 감정의 결이 보송보송한 털처럼 하나하나 살아나 금방 흥분하고 아리고 울기도 참 잘 운다. 기쁨만큼 슬픔도 자주 찾아와 그 절망적인 공기감은 심장을 돌로 누르는 것만 같다. 평소보다 호흡도 잘 안 되고 소화도 안 된다. 연애의 즐거움은 보이지 않는 상대 마음을 상상하며 느끼는 스릴에 있는데, 상대의 언동 하나하나에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서서 그 사람이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말풍선이 생기는 것이나 많은 감정을 담은 침묵 어린 눈동자의 응시도 fuzzy한 감정에 한몫한다.
Fuzzy한 기운이 극대화되면 '쟤랑은 언젠가 자겠구나……'라는 막연한 직감이 스멀스멀 부끄럽게 올라오기도 했다. 신은 가만히 엿듣고 있다가 절묘한 기회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윽고 그 영롱하고 따뜻한 느낌이 가시고 시야가 선명해지기 시작하면 다시 혼자가 되어야 할 때임을 알았다.
사랑이 식은 후 그 사람의 표정이, 몸짓이, 말투가 달라지는 것을 보며 어떻게 이렇게 하루아침에 변할 수 있느냐고 나는 통탄했다. 그러나 사실 그 사람이 변한 게 아니었다. 사람의 정신과 감각을 뒤흔드는 바이러스가 어느 날 저절로 빠져나가 본래의 상태로 돌아온 것뿐이었다. 잠시 우리는 감염되었고 사랑이 그 사람에게 그림자처럼 아우라를 드리웠다. 아름답고 눈부시게 빛나는 사람으로 만들어서 내 앞에 가져다준 것이다. 그러니 사람은 죄가 없고 차라리 사랑에 감사하기로 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랑은 얼마나 자의적인가. 사실 사랑이라는 것은 혼자서 겪어가는 감정에 불과한 것 아니던가.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각자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알고 보면 사랑이란 혼자서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사랑으로 서로를 바꿀 수 있다는 데에 애초에 비관적인 것일까. 그 사람이 그랬던 건 많은 경우 내 탓이 아니었다.
가령, 우리를 가장 괴롭게 하는 온도의 차이, 열정의 차이.
'그래, 난 그 사람만큼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 이렇게 흔들리는거야.'
'그는 나를 나만큼 좋아하지 않아.'
서로에 대한 감정의 깊이가 다른 경우도 있겠지만 나는 점점 이것은 상대적인 문제가 아닌 절대적인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그와 나는 열정의 포용 범위가 애초에 다른 것이다. 기질적으로 열정이 없으면 못 살 것 같은 사람이 있고, 머리로는 열정을 원하지만 막상 다가오면 그 소용돌이에 말려드는 것에 겁먹는 사람도 있다. 각자가 가지고 갈 수 있는 감정의 한계점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직접 겪어보지 않는 이상, 아무도 그 지점을 알려줄 수 없다. 사람들은 종종 '내가 상대를 그만큼 사랑하지 않아서 그래'라며 이게 상대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무언가 상황이 바뀌면 또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쪽의 기초체온이 낮은 것을 두고 상대방을 탓할 수는 없다. 
열정적인 연애를 하던 사람은 늘 열정적이었고, 담백한 상대를 골라놓고도 그를 상대로 열정적이었다. 담백한 사람들은 열정적인 상대를 앞에 두고도 늘 담백함 이상의 것을 주지 못했다. 늘 나만, 나 혼자만 그 당연한 사실을 못 보고 있었다.
-p, 118~121


학교에서 주로 도망 다닌 곳은 도서관이었다. 책은 지식을 넓히고 생각주머니를 키우거나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에게 책은 외로움을 달래고 현실의 고통을 삭히거나 잠시나마 잊게 하는 친구 역할을 해주었다.
서가의 비좁은 책장 사이에 몸을 깊숙이 숨길 때 마음이 가장 편안했다. 미국 종이책 특유의 오래된 나무 냄새가 배어나왔다. 알파벳 순서로 정리된 작가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집어넣어가며 인사를 나눴다. 영어를 썩 잘하진 못했지만, 표지 그림이나 제목이 마음에 드는 것부터 차근차근 조심스럽게 책장을 열었다. 그렇게 한 친구 한 친구 도서관에서 빌려 가 자기 전까지 침대에 누워 교제를 시작했다. 그것은 다음 날 학교에 가야 하는 고역감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게 해주었다. 때로는 딱 한 권만 꽂혀 있는 작가의 책이 어쩐지 더 친근감이 들어서 집에 품고 오기도 했다.
나는 나에게 맞는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나에게 맞는 책을 찾는 데 더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남들의 추천보다는 나에게 와닿는, 나에게 진정한 즐거움을 주는 책들을 어느덧 첫 느낌만으로 잘 찾아내게 되었다. 읽다가 재미없다 싶으면 가차 없이 새 책을 집어들어도 되었다. 의리니 뭐니 불평하는 일이 없으니 사람보다 얼마나 공정하고 정직한가. 완독을 해야 인내심 있는 인간이 되는 양, 억지로 쓴 약 먹듯 읽을 필요가 없었다. 책은 내게 무리하도록 요구하질 않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유대감을 느꼈다. 애초에 그들이 책을 사랑하게 된 계기는 짧든 길든 심리적으로 외톨이였던 시절이 있어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또한 외롭지 않을 수 있도록 책의 힘을 빌릴 수 있을 만큼 강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월급날이 되면 그간 사려고 별렀던 책들을 장바구니에 한가득 담아가는 사람들이 참 사랑스럽다.
내가 지금 책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은 어렸을 때 책이 나에게 베풀어준 관대함에 내가 할 수 있는 미미한 보담에 다름 아니다. 글을 쓰다 보면 불현듯 내가 쓴 책들이 서가에서 서성이는 외톨이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줄 모습이 떠올라 조금 더 힘을 내게 된다.
-p, 145~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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