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1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지난번에 티베트 승려가 분신자살한 뉴스를 봤어. 죽을 만큼 싫은 마음이란 대체 어떤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 무지 분하다거나 슬프다거나 한심하다거나…… 그런 간단한 심정은 아닌 거잖아. 난 진심이라는 거잖아. 진심으로 화가 났다는 거잖아. 그렇지만 죽지 않고 그런 마음을 상대에게 전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하지만 무리겠지. 그 진심이라는 걸 전하는 게 가장 어려울 거야, 틀림없이. 진심은 눈에 안 보이니까……." -p, 240~241 (1권)

 

 








 

분노.jpg


 









 

어렸을 때 즉, 주로 10대의 나를 생각해보면 친한 친구의 기준은 '내가 가진 비밀을 말할 수 있느냐 없느냐' 였다. 그땐 친한 친구라면 내가 어떤 비밀을 말하든지 그 말을 옮기지 않고 간직해줄거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내 생각이 항상 옳았던 건 아니었다. 친구에게만 말했던 내 비밀을 반 아이들 모두가 알게 되버린 적도 있었고, 그 비밀이 내 약점이 되어 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난 친하다 생각하면 조금씩 내가 가진 비밀들을 말하곤 한다. 물론 여러 경험들을 통해 정말 알려선 안될 것 같은 비밀들은 여전히 내 안에 꽁꽁 숨겨두고 있지만, 친구가 나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기 위해 필요한 비밀들은 나도 모르게 넋두리처럼 꺼내놓게된다. 내 비밀을 말하는 그 순간에 내가 그 비밀에 감추어 전하고 싶은 말은 사실 '나는 너를 믿고 있어.'라는 말이겠지만.






이미 추측하셨겠지만, 염두에 두었던 것은 이치하시 다쓰야 사건(영국인 여강사를 살해한 후, 수차례 성형을 거듭하며 2년 7개월 동안 도피 행각을 벌인 일본판 페이스오프 사건)이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나는 2년 반에 걸친 그의 도주 행보나 사건 자체보다는 공개수사 후에 물밀듯이 밀려든 수많은 제보 쪽에 더 큰 관심이 쏠렸습니다. 길에서 비슷한 사람을 봤다는 정도라면 몰라도 자기와 친밀한 사람까지 의심하게 되는 '사건의 원경'에 마음이 어수선하고 술렁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에는 처한 입장이나 관계가 다른 설정을 10여 개 정도 떠올렸지만, 아무래도 다 쓸 수는 없어서 범위를 좁힌 결과 세 가지 이야기가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 세 명 중 범인을 누구로 할지 결정하지 않은 채, 그들의 정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주변 인물들의 다양한 양상을 써나갔습니다. 

-p, 287~288 (옮긴이의 말 中 요시다 슈이치 인터뷰 내용>






 

이처럼 요시다 슈이치는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을 믿지 못하고 살인자로 의심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이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 내가 위에서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바로 이때문이었다. 


연인, 친구 혹은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가족을 제외하고는(때론 가족까지도) 우리가 이 사람들과 만난 시점 이전에 그들이 겪었던 일들은 우리가 직접 본 게 아니었기 때문에 당사자나 그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나온 말들만 듣고 믿을 수 밖에 없다. 만약 공개수배 중인 살인자의 몽타주와 우리 옆에 있는 사람이 닮았다면? 혹은 아주 자잘하지만 결정적인 특징들이 (오른쪽 뺨에 있는 점 3개나 왼손잡이, 흉터 등)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서 보인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게 될 것인가?


그의 제목인 '분노'에 얽힌 살인사건의 실마리는 개운하게 풀리지 않는다. 대신 이 살인사건을 우리의 뇌리에 남겨둔 채 끊임없이 출처가 불명확한 캐릭터들을 등장시켜 '이 사람이 살인자가 아닐까?' 계속해서 의심하게 만든다. 소설 밖에서 바라보는 우리도 의심하고, 소설 속에서 불명확한 캐릭터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도 끊임없이, 끊임없이 그들을 의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자신을 믿어주길 바라는 사람과 그 믿음을 주지 못한 사람. 가만히 생각해보니 난 믿음을 바라는 편이었지, 내가 상대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과연 내 지인들은 나를 얼마만큼 믿고 있을것인지, 내가 그들에게 보여준 나의 믿음의 크기는 어느 정도였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점점 서로를 믿는게 힘들어지고 있는 요즘같은 시대에 일침을 가하는 소설이 아니었나 싶다.     





 








  




"으음, 이해 못하는 사람한테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유마가 물었다.

나오토는 한동안 침묵하다 웃었다. "그 벽은 상당히 두껍겠지."

유마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피곤한데도 전혀 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속 시원하게 울었어?"

나오토가 불쑥 물어서 "어?"라며 유마가 머리를 들었다.

"우는 게 좋아. 참아봐야 언젠가는 결국 울게 될 테니까." -p, 283 (1권)



결국 소중한 사람이 생긴다는 의미는 지금까지 소중했던 것이 이제 소중하지 않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소중한 것은 늘어나는 게 아니라 줄어가는 것이다. -p, 35 (2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