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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메티가 사랑한 마지막 모델
프랑크 모베르 지음, 함유선 옮김 / 뮤진트리 / 2014년 4월
평점 :
품절
그날 밤, 파리에는 가랑비가 내린다. 프랑스 서부 항구 도시 어디엔가 있다는 착각을 주는 그런 안개비 같은 비다. 까롤린과 자코메티는 서로 팔짱을 끼고 몽파르나스 거리를 걸어 다닌다. 다시 만난 다정한 연인처럼. 그는 낡고 구질구질한 비옷을 입고 있었고, 그녀는 목이 브이 자형으로 파인 베이지 색 외투를 입고 있었다. 두 사람 중에서 누가 먼저 벤치에 앉자고 했던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은 벤치에 앉아서 서로 꼭 끌어안고 얼싸안기도 하고 키스하고 그러고는 다시 일어서서 걷는다. 그들은 어느 나무에 기대어서 멈춘다. 그러고서 한참을 끌어안고 있다. 그들은 이 카페에서 저 카페로 옮겨 다닌다. 그는 커피를 마시거나 적포도주나 또는 백포도주를 마신다. 그녀는 코카콜라와 거품이 있는 샴페인을 마신다. 밤이 점점 깊어갈수록, 그녀는 그의 매력에 사로잡힌다. 그는 그녀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준다. "어떻게 이런 남자가 나 같은 여자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을까 궁금했어요." 1958년 11월의 이 만남은 이제 끝없는 여행으로 이어진다.
새벽 네 시경에, 그들은 몽파르나스 역 근처에 있는 식당 셰 뒤퐁에서 굴과 감자튀김 한 접시를 나눠먹는다. 자코메티는 끊임없이 말을 하고, 그가 하는 숱한 말에 그녀는 마술처럼 사로잡힌다.
"밤에 산책하던 일이 생각나네요. 우리는 살짝 취해서 발길이 닿는 대로 걸어 다녔지요. 그는 모든 것에 대해서 말했어요. 나는 그저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고요. 그의 말을 듣는게 좋았어요. 끝까지 그가 말하는 걸 듣기 좋아했어요."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피로 때문에 점차 처지기는 하지만 술집에서 술집으로 옮겨 다니면서 이어진다. 처음 만나면서부터, 자코메티는 까롤린이 젊고 경쾌해서 그저 감탄을 했다. 두 사람은 사십 년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나지만, 그는 지치지 않을 것이고 까롤린은 더더욱 지치지 않는다. 두 사람은 그들 식대로, 명확하게 드러나진 않지만, 서로를 사랑할 것이다. 그들은 서로 어느 한 사람 없이는 지낼 수 없다. 자석에 끌린 것처럼. 그들은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매달린다. 그들은 오래 오래 결코 헤어지지 않는다. 자코메티가 먼저 세상을 떠날때까지는. -p, 38~40
스위스의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
그의 작품인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남자'가 역대 미술품 경매최고가인 1억 4천 130만달러(약 1천 549억 3천 545만원)에 낙찰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 외에도 그의 많은 작품들이 경매에서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낙찰되었다.
이러한 그가 마지막까지 사랑한 여인이 있는데 그녀가 바로 '까롤린'이다. (그녀의 진짜 이름은 '이본 마르그리트 프와로도') 심지어 그는 아내가 있었음에도 젊고 경쾌한 까롤린에게 정신없이 빠져들고 만다. 그때 까롤린은 20살, 젊은 나이에 '살기 위해' 술집에서 남자들을 바라보며 사는 거리의 여자였고, 자코메티는 예순살의 늙은 남자였다.'
이 책의 저자 프랑크 모베르는 현대미술관에서 자코메티의 유화작품 <까롤린>을 우연히 보게된다. 그는 까롤린의 눈빛에 빠져들게 되었고, 그로부터 시간이 흐른 후 까롤린에게 인터뷰 요청을 하게 된다. 이 책은 프랑크 모베르와 까롤린의 인터뷰 내용이라고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프랑크 모베르가 인터뷰를 위해 까롤린의 집에 찾아갔을 때, 그녀는 유화 작품 속의 빨려들듯한 눈빛을 가진 여인이 아닌 당뇨병을 앓고 있는 늙은 여인이 되어 있었다. 그녀를 그리도 사랑해주던 자코메티가 병으로 죽고, 그녀는 그녀를 막대하는 남자와 낡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늙고 병든 여자가 되어버린 까롤린은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가장 사랑스러웠던, 젊고 경쾌했던 시절을 회상한다. 그 회상 속의 자코메티와 그녀는 세상의 모든 일이 이 둘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것처럼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어떻게 하면 그녀 기분이 좋아질까 묻는다. 포즈를 취하느라 오래 기다려준 것을 고마워하면서. 한번 더 그건 잘 되지 않았음을 확신하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그녀는 그 앞에 우뚝 서더니, 팔을 크게 벌리고서 전혀 망설이지 않고 '빨간 페라리가 갖고 싶어요.' 라고 말한다. 저녁 식사 기간이 때를 넘겨서 예술가 알베르토는 배가 고프다. 그는 그녀의 대답에 그리 놀라지도않고, "그래 한번 봅시다."라고 말하며 궁지를 벗어난다. 그들은 계속 걸어서 늦게까지 문을 여는 몽파르나스 대로에 가까운 작은 식당 카멜레옹까지 간다. 식사하는 동안 그녀는 계속해서 자신이 갖고 싶은 매끈한 차 이야기를 한다. 차의 속도, 엔진 소리, 강력한 힘, 잘 빠진 선, 이탈리아 빨간 색 등을.
어떻게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이제 막 스무 살이 되었다. 그녀가 열렬히 바라는 모습, 그녀가 그렇게 즐거워하며 바라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는 매우 기쁘다. 시간이 가도, 까롤린은 계속해서 자신이 말한 페라리를 상기시킨다. 페라리를 타고 이탈리아로 여행가자는 약속도 하고 숲으로 산책가자는 말도 하면서. 그는 마침내 굴복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엠지 카브리올레에 만족할 것이다. 빨간색으로.
-p, 96~97
자코메티는 아무것도 몰랐던 까롤린을 위해 그녀를 데리고 루브르 박물관에 데리고 갔고 작품에 대해서, 그가 아는 것에 대해서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그럴때면 그녀는 그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들었다. 자코메티는 또한 까롤린을 고대 미술 전시실에도 데리고 가고, 그의 친구들에게도 그녀를 소개한다. 영국의 위대한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에게도.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에게 새로운 세상을 더 많이 보여주려고 했다.
그녀는 말했다.
"나는 그에게서 정상에서 벗어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여자였어요."
이 책에 나와있는 자코메티는 어떻게보면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지만, 까롤린과의 짧지만 강렬했던 일화를 통해 그의 인간적인 면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을 통해 느껴지는 고독하고, 때론 거칠어보이기도 하는 그의 모습이 아닌 오직 까롤린만이 알고 있었던 그의 면모.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이는 한 남자의 모습은 그녀가 그를 평생 그리워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당시 사람들이 욕했을지도 모를 정상에서 벗어난 사랑이었지만, 서로가 서로를 '정상에서 벗어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로 느끼는 것도 수많은 사랑 중 하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