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황금방울새 - 전2권
도나 타트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6월
평점 :
품절








나는 그림을 보면 항상 똑같은 한 지점에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지금도 존재하고 언제까지나 존재할, 쏟아지는 찰나의 햇빛이었다. 방울새의 발목에 달린 사슬이 눈에 띄는 것은, 혹은 잠깐 파닥이다가 항상 늘 같은 절망의 자리에 내려앉아야만 하는 것이 살아 있는 작은 생물에게 얼마나 잔인한 삶인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주 가끔뿐이었다. -p, 414 (1권 中)










   

 











1,000페이지 정도의 분량만큼이나 오래 붙잡고 있어야했던 소설이었다. 이렇게 긴 소설은 자칫하면 쉽게 지쳐버릴 수 있어 속도감이 빠른 걸 선호하는데 기대와는 다르게 느릿, 느릿.. 읽으면서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페이지에 조금은 힘들었다고 서두에 밝혀두고 싶다. 그럼에도 읽기를 좀처럼 멈출 수 없었던 건 중간중간 속도감이 붙는 짜릿함. 급경사, 급커브가 한 4-5번 반복되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 때문이었달까.


이 책의 작가인 도나 타트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이미 꽤 유명한 작가인 듯 한데, 나에겐 《황금방울새》가 그녀와의 첫 만남이 되었다.


《황금방울새》는 완독률 98.5% 라는 걸 중요한 마케팅의 포인트로 내세우고 있는데, 호킹지수(완독률이 낮다는 스티븐 호킹의 책 때문에, 호킹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것으로 호킹지수가 높을수록 끝까지 읽은 책이라고 한다.) 라는게 독자들이 밑줄 친 부분을 보고 완독률을 측정한 거라고 하니, 이 책을 읽고나니 왜 이 책이 호킹지수가 높은지 알 것만 같다. 바로 소설의 끝무렵에서야 밑줄 칠, 멋진 말이 두두두두 쏟아져나오기 때문. 









 

황금방울새.jpg



 


▲ 도서관 반납 직전에야 사진을 안남겨둔걸 알아서, 이렇게 도서관 앞에서 급하게 부랴부랴 찍었다 :<









미술관 폭발 사고로 엄마를 잃고, 현장을 빠져나오면서 주인공 시오가 우연히 들고 나온 문제의 '황금방울새' 그림. 세상은 이 '황금방울새' 그림을 찾고, 돌려줄 타이밍을 놓쳐 계속해서 불안감에 시달리면서도 이 그림에 매혹되어버린 시오의 모순적인 모습.


소설의 80%가 이 어린 주인공의 성장 소설같은 느낌이 가득한데, 작가가 이 어린아이에게 부여해준 환경이 어찌나 열악하고, 불행한지 소설을 읽다보면 내가 마약에 찌들고, 술에 취한 채, 비릿하고 퀴퀴한 냄새로 가득한 방에 축 늘어져 있는 간접경험을 하고있는 것만 같았다. 


타인에게 쉽게 추천해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긴 분량도 긴 분량이거니와 추천해줘도 책 읽는 걸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읽다 중간에 포기해버릴 것 같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높게 평가해주고 싶은 것은, 성장소설을 읽고있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황금방울새 라는 그림이 얽혀있기 때문에 지루해질 떄 즈음 해서 스릴있는 장면들을 하나씩 터뜨려준다는 점이다. 위에서 설명한 것 처럼 마치 쉽게 추천해주긴 힘들지만, 막상 떠밀려서 타면 그 짧고 강렬한 짜릿함에 계속해서 찾게되는 롤러코스터와 같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했다가 퇴각하려고 할 때 노트르담 성당을 부숴버리려고 마지막 남은 병사에게 폭발 장치를 누르라고 명령했으나 노트르담 성당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버린 병사가 결국 그 명령을 따르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영화에서 본 적이 있다. 이처럼 우리는 살아있지만 결국엔 늙고 병들기에 유지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예술작품을 통해서 간직하려한다.


어린 시오가 겪어야했던 어려운 현실, 이러한 현실을 벗어나 비상하고자 했지만 그때마다 발목이 묶여있어 날아갈 수 없는 그림 속의 황금방울새처럼 마약에 찌들고, 술에 취한 채 계속해서 어두운 현실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시오. 시오는 이 소설의 말미에서 이러한 간극을 통해 '아름다움'이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현실과 현실을 내모는 지점 사이의 간극에서. 


힘든 현실 속에서도 더 나은 환상같은 곳을 꿈꾸며 견디고, 돌보고, 애쓰며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만들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 같은 소설이었다. 










모든 인간이. 심지어는 가장 행복한 인간들도 끔찍한 끝을 맞이한다는 사실을. 모두 결국에는 전부 잃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렇게 잔인한 게임을 즐겁게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일까? -p, 475 (2권)



정말 끔찍하지만, 나는 이해한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원하지 않을지 선택할 수 없다. 그것은 쓸쓸하고 힘든 진실이다. 가끔 우리는 어떤 것이 우리를 죽음으로 내몰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원한다. 우리는 스스로에게서 달아날 수 없다.


나는 환영 뒤에 진실이 있다고 정말 믿고 싶지만, 결국 환영 너머에 진실은 없다고 믿게 되었다. 왜냐하면, 마음이 혐실을 내모는 지점과 현실 사이에는 중간 지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곳은 아름다움이 만들어지는 곳, 두 가지 다른 면이 뒤섞이고 흐릿해져서 삶이 주지 못하는 것을 제공하는 무지개의 가장자리 같은 곳이다. 바로 모든 예술이, 모든 마술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나는 모든 사랑이 존재하는 곳이라 주장하고 싶다. 혹은,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중간 지대는 사랑의 근본적인 어긋남을 설명한다. 가까이서 보면 검은 외투와 대비되는 주근깨 박힌 손, 옆으로 넘어지는 종이 개구리가 보이지만 한 발 물러서면 환상이 다시 끼어든다. 실제보다 더 실제 같고 결코 죽지 않는 환상. 피파의 존재 자체가 그러한 것들―사랑과 사랑이 아닌 것, 그곳과 그것이 아닌 것―의 놀이다. 벽에 걸린 사진들, 소파 아래에서 나온 동그랗게 말린 양말 한 짝. 내가 손을 뻗어 피파의 머리카락에 붙은 보풀을 떼어내자 그녀가 웃으면서 내 손길에 몸을 움츠리던 순간. 음악이 음과 음 사이의 공간이듯이, 별들이 아름다운 것은 그들 사이의 공간 때문이듯이, 태양이 특정한 각도로 빗방울에 닿아서 하늘에 색을 내뿜는 프리즘을 드리우듯이, 내가 존재하는 공간, 계속 존재하고 싶고 솔직히 말하면 그곳에서 죽고 싶은 공간은 바로 이 중간 지대, 절망과 순전한 '다름'이 만나서 숭고함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내가 이 글을 이런 식으로 쓴 것은 그렇기 때문이다. 중간 지대에 들어서야만, 진실과 진실이 아닌 것 사이에 존재하는 색색의 경계에 발을 들여야만 이 세상에 살면서 이 글을 쓰는 것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혼잣말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은 무엇이든 중요하다. 우리가 절망 속에서 스스로에게 노래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무엇이든 중요하다. 하지만 그림은 또한 우리가 시간을 초월하여 대화를 나눌 수 있음을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나는 당신에게, 존재하지 않는 나의 독자에게 아주 진지하고 다급하게 할 말이 있는 듯한 기분, 내가 당신과 같은 방에 있는 것처럼 급히 말을 해야 하는 기분이다. 삶은―그것이 무엇이든― 짧다고 말이다. 운명은 잔인하지만 제멋대로는 아니라고, 자연(즉, 죽음)이 항상 이기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굽실거려야 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항상 기쁘지만은 않다고 할지라도, 어쨌든 삶에 몰두하는 것, 눈과 마음을 열고서 세상을, 이 개똥밭을 똑바로 헤쳐나가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그리고 우리가 죽어갈 때, 우리가 유기체에서 생겨나 굴욕적이게도 다시 유기체로 돌아갈 때, 죽음이 건드릴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영광이고 특권이다. 지금까지 이 그림에 재앙과 망각이 뒤따랐다면―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사랑이 불멸인 한 (그것은 불멸이다) 나는 그러한 불명성에서 밝게 빛나는, 변치 않는 작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하며, 계속 존재하고 있다.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고, 돌보고, 불 속에서 구해내고, 사라졌을 때는 찾으려 애쓰고, 보존하고, 구하려고 노력하면서 그 아름다운 것들을 문자 그대로 손에서 손으로 전달하고 시간의 폐허 속에서 다음 세대를 향해, 또 그 다음 세대를 향해 큰 소리로 멋지게 노래를 불러온 사람들의 역사에 나 자신의 사랑을 더한다. -p, 479~181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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