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인 동주
안소영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평점 :
바로 이러한 절망의 시대, 사람들의 지성과 감성이 모두 무너진 폐허와도 같은 시대, 더 이상 아무도 시를 쓰려 하지 않는 시대에, 동주의 시는 새로이 움트고 있었다. 한때 동주도 문인이라는 빛나고 아름다운 이름을 갈망한 적 있었다. 공들여 쓴 작품으로 세상과 문단의 눈길을 끌고도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이름이나 평가가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고, 주변의 자연과 사물들도 그곳까지 데려가, 일렁이는 감성들을 충분히 무르익게 하고, 때로는 예리한 지성의 바늘로 톡 건드리기도 하면서, 마침내 정제되고 아름다운 우리말의 체에 걸러, 노트 위에 한 편의 시로 옮겨 적는 길고도 진실하고 순정한 시간. 그것이면 충분했다. 동주의 새로운 시는 절망의 어두운 그늘 속까지, 슬픔의 웅덩이 깊은 곳까지 닿아 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시였다.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맑고 고요한 눈을 잃지 않은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이기도 했다. -p, 161~162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 윤동주, <별 헤는 밤> 中
시인 윤동주의 짧은 생을 그린 소설을 읽었다.
안그래도 짧은 생, 그 중에서도 그의 22살부터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29살까지의 짧은 생을 들여다보자니 마음이 퍽퍽하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우리나라가 일본의 통치 하에 있던 30년이라는 시기. 중고등학생 때 역사를 공부하는 동안에는 1910년대, 20년대, 30년대의 각 특징만 달달달 외우느라 그 시기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지는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해보니 30년이라는 시간은 한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고, 그 어른의 아이가 어느정도 자라서 학교에 다닐, 그런 긴 시간이더라.
한컴타자연습을 통해 타자연습을 했던 내 또래들은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 친근할지도 모르겠다. 타자 속도 500을 넘기기 위해서 타다다닥 빠르게 쳐내려가던 그 글을 교과서에서 볼 땐 다들 '어? 이거 한컴타자' 했을텐데. 이렇게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윤동주는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일제 치하에 있는 우리나라를 겪었고, 29년이라는 짧을 수 밖에 없었던 생의 원인도 여기에 있었다는 걸 이 책을 읽다보면 알게되며 울컥울컥 감정이 치밀어오르고 만다.
외국 문학을 공부하고 도서관의 책들을 두루 읽다 보니, 새삼 발견되는 게 있었다. 연전에 있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말과 글이 다르고 지내는 곳이 달라도, 사람들이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하다는 점이다. 자신이 놓인 시대와 사회의 제약 속에서도, 사람들은 삶이 던져 주는 질문을 붙들고 열심히 해답을 찾으며 살아간다. 어떻게 살 것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더불어 행복한 삶을 어떻게 누릴 것인가……. 자신의 삶에서 다 풀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혹은 다음 세대에게 넘겨준다. 이 세상에 사유하는 인간이 스러지지 않고 남아 있는 한, 그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시대를 이어 가며, 좀 더 많은 사람들을 거쳐 가며, 더욱 깊어지고 풍부해질 것이다. 남의 것을 빼앗고, 남의 나라도 빼앗고, 사람이 사람을 차별하고 모욕하는, 심지어 다른 사람의 자유와 생명마저 빼앗아 버리는 야만의 시대라해도……. -p, 252~253
시대적 상황 탓에 나이보다 더 철이 들었던 그였지만,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지금의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는, 그저 20대일 뿐이라 더 안타까웠다.
안소영 작가님의 프로필을 보니 이 책 <시인 동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이덕무, 정약용 등 역사적인 인물의 삶을 그리는 책을 참 많이 쓰셨더라. <시인 동주> 밖에 읽어보지 못했지만 이 작품만을 보고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소개하려는 인물에 대하여 얼마나 철저하게 분석을 하는지. 역사적인 사실 뿐 아니라, 성격이나 행동까지도.
어떤 상황에서 어떤 감정을 가지고 어떤 시를 썼는지, 자연스럽게 묻어나있는 소설이어서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어 윤동주 문학을 공부하는 중고등학생들이나, 일제시대의 상황이 당시의 지성인, 학생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알고싶은 학생들에게 아니,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이 책을 권해준다면 좋겠다.
책상 위에 펼쳐진 노트에는 마무리하느라 한창 고심 중인 시 한 편이 적혀 있었다. 동주는 시를 종이 위에 쓰고, 고치고, 다듬는 과정이 별로 없었다. 마음에 고이는 생각들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관찰하다가, 어느 순간 넘실넘실 차올라 오면 언어로 빚어 몇 번이고 입 속에서 되뇌고 공글리며 운율을 입혀 보다가, 이만하면 되었다 싶을 때 비로소 노트 위에 단정한 글씨로 또박또박 써 나갔다. 한 편의 시가 완성될 때까지, 동주의 마음속에서는 무수한 격랑이 일건만 좀처럼 밖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번에 시가 흘러나오는 것만 같아 벗들은 감탄했다. 그래도 머릿속에서 구성한 시와, 노트에 정리하여 눈으로 보는 시는 가끔씩 차이가 있어 또 고치곤 했다. -p, 24
앞날을 그려 볼 수 없다면 현재의 불안한 삶에라도 충실할 수밖에……. -p, 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