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하루 100엔 보관가게
오야마 준코 지음, 이소담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손님은 하루에 한 사람이 올까 말까. 주인은 기다림을 일이라 여겨 그 자리에서 책을 읽으며 오전 일곱 시부터 열한 시까지 손님을 기다리다가 점심시간에 잠깐 가게를 닫고요, 다시 오후 세 시부터 일곱 시까지 자리를 지킵니다.
벽시계가 여덟 번 울렸어요.
"안녕하세요."
아침 일찍부터 손님이네요. 손님은 빨간 가방을 등에 멘 여자아이예요. 가방에 달린 부적 방울이 딸랑딸랑 울립니다.
"어서 오세요."
주인은 웃는 얼굴로 손님을 반기며 방석을 권했어요.
여자아이는 선 채로 어깨에서 가방을 내리더니 안에서 종이를 한 장 꺼냅니다.
"이걸 보관해주세요."
주인은 종이를 받아 들고 손바닥으로 두 번 쓰다듬으며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한 후 여자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나요?"
"가키누마 나미요."
"가키누마 나미 양. 며칠 동안 보관해드릴까요?"
"일주일요."
"알겠습니다. 보관료는 하루 100엔이므로 700엔입니다."
여자아이는 가방에서 토끼 귀가 달린 분홍색 지갑을 꺼내 500엔 동전 하나와 100엔 동전 둘을 주인의 손 위에 올려놓았어요.
주인은 손가락으로 동전을 확인하고 말했어요.
"일주일이 지나기 전에 찾으러 오셔도 돈은 돌려드리지 않습니다. 일주일이 지나도 찾으러 오지 않으면 보관품은 제 것이 됩니다. 괜찮으신가요?"
여자아이는 "네"하고 대답하며 가방을 멨습니다.
"잘 다녀와요."
주인이 말했습니다.
그러자 여자아이는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고 한참 주저하다가, 우물거리는 목소리로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인사하며 나갔습니다. 딸랑딸랑 방울 소리가 서서히 작아지더니 사라집니다. (p, 10~11)
보관함을 이용해본게 언제더라,
그러고보니 먼 곳으로 여행을 갔을때마다 숙소를 잡기 전 제일 먼저 했던 일은 역이나 터미널에 있는 보관함을 찾는 일이었다. 평소에는 관심도 안가던 보관함이 양 손에 짐이 가득할때만 꽉 차있어 빈 보관함을 찾기가 힘들었던건지. 나에겐 보관함은 이처럼 무게를 덜어주고 편히 돌아다닐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가능성을 위해서 주인은 여기에서 기다립니다.
보관가게는 기다림이 일이니까요.
분명 이곳은 모두가 돌아올 장소입니다.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장소입니다.
(p, 55)
여기 하루 100엔만 내면 어떤 물건이든 보관해주는 보관가게가 있다. 간판 대신 '사토(설탕)' 라는 둥글둥글한 히라가나 문자가 물들어있는 소박한 쪽빛 포렴이 달려있어 밖에서 보면 가정집인지 가게인지 구분하기 어렵지만, 안으로 들어서먼 약간 어둑한 마루 구석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주인이 있는 곳, 정갈한 모습이지만 눈이 보이지않는 이 주인은 목소리로 찾아온 손님이 누구인지 알아채곤 그 손님이 내민 물건을 아무 이유도 묻지 않고 하루 100엔에 소중하게 보관을 해준다.
그 보관품들은 부모님께 숨기고 싶은 0점짜리 시험지일 수도 있고, 버리기는 쉽지 않지만 간직하기도 힘든 지나간 애인과의 추억이 담긴 물건일 수도 있고, 잠시 눈에 보이지 않았으면 싶은 물건일 수도 있다. 손님들은 자신이 간직해온 미련, 추억, 기쁨, 슬픔을 그 물건과 함께 보관가게에 보관한다. '보관기간이 지나도 찾으러오지 않으면 그 보관품은 돌려주지 않는다.' 라는 규칙 아래, 다시는 찾기 싫은 물건을 일부러 맡긴 채 영영 찾으러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 보관가게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난 사춘기를 심하게 앓았을 때 적었던 일기장을 맡겨두고 싶다. 다시 들춰보진 않지만 버릴 순 없고 가족에겐 보여주기 싫은 내 부끄러운 글들이 가득 담긴 일기장. 기간은 하루, 하루가 지나면 '찾으러 가기 귀찮아!' 라는 핑계를 대며 찾으러가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을 읽은 날, 새벽엔 영화 심야식당을 보고 잠들었다.
힘이 들때, 하루를 끝낸 고단한 시간에 찾아가서 내가 먹고싶은 음식을 주문하면 아무 말 없이 만들어주는 주인 아저씨가 있는 심야식당.
하도 세상이 밀어내기만 해대서 한 곳에서 변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장소, 힘들때 언제든 찾아가면 마음을 달래주는 장소가 고픈 우리들에게 이런 책과 영화는 때로 큰 위로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