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을 용기 (반양장)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생에 있어 의미 같은 건 없다. 하지만 내가 그 인생에 의미를 줄 수 있다. 내 인생에 의미를 줄 수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밖에 없다. -p, 316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책은 제목 덕을 참 많이 본 책이라 생각한다. '살아가면서 용기를 내야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제는 미움을 받는 일까지 용기를 내야한다니, 세상에나!' 하면서도 우린 모두에게 예쁨받고 인정받고 싶은 어찌보면 한없이 여린 사람들이기에 이 책을 집어들게 된 게 아니었을까 싶다.


고맙게도 난 이 책을 친구로부터 건네받았다. 고등학생때 알게되어 그땐 딱 붙어 떨어질줄 모르던 우리였는데 요즘은 각자 자기 일로 바빠 여러 계절이 지나고나서야 오랜만에 만난 날이었다. 친구가 책을 좋아하는 걸 알기에 내가 읽고 괜찮았던 책들을 바리바리 챙겨갔고, 내가 책을 건네주자 그 친구도 이 책을 건네주었다. "내가 밑줄그어놨는데 괜찮아?" 하며 세심한 배려의 말과 함께. 책에 밑줄을 긋거나 접는걸 싫어하는 나였는데, 친구가 빨간 볼펜으로 그어놓은 밑줄은 읽는 내내 기분 좋게 다가왔다. '난 이 부분이 괜찮았는데, 넌?' 하면서 옆에서 재잘대는 느낌이었달까.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의 학설인 '개인심리학'을 청년과 철학자가 나누는 대화로 알기 쉽게 풀어쓴 글인데, 제목인 '미움받을 용기'는 이 학설의 내용 중 요즘 우리가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을 겨냥한 듯 하고 무엇보다 난 '행복해지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라는 글을 보고 머리가 뎅- 했다. 우리는 과거에 겪었던 큰 일, 그 큰 일에 대해 우리가 '트라우마'라고 이름 붙여놓고 그 트라우마 때문에 지금 이렇게 행복하지 않은거야. 라며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이라며, 우리는 행복해질 용기가 없기 때문에 그 트라우마를 도피처로 삼고 있다는 식의 글을 읽고 내가 트라우마라고 여겼던 것들을 하나씩 지워갈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을 받은 날도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무엇보다 주변의 친구들이 하나 둘씩 취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요즘, 나 혼자 뒤쳐지는게 아닐까 두려움이 가득해 '누구 어디 취업했대!'라는 말에도 축하와 기쁨의 감정보단 질투와 부러움, 나 자신에 대한 무능력함이 앞선다는 이야기들.


베스트셀러라는 타이틀 때문에 더 부풀려져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적절한 시기에 읽게되어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어 고맙다.         









아들러의 목적론은 "지금까지의 인생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앞으로의 인생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다"라고 말해주는거지.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지금, 여기' 를 사는 자네라고 말일세. -p, 67~68



자신의 불행을 '특별'하기 위한 무기로 휘두르는 한 그 사람은 영원히 불행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네. -p, 103



유대교 교리를 보면 이런 말이 있네. "내가 나를 위해 내 인생을 살지 않으면, 대체 누가 나를 위해 살아준단 말인가?" 자네는 자네만의 인생을 살고 있어. 누구를 위해 사느냐고 하면 당연히 자네를 위해 살아야겠지. 만약 자네가 자네를 위해 살지 못한다면 대체 누가 자네의 인생을 살아준다는 말인가? 우리는 궁극적으로 '나'를 생각하며 사는 거라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 이유가 없지. -p, 154~155



공부하는 것은 아이의 과제일세. 거기에 대고 부모가 "공부해" 라고 명령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에, 비유하자면 흙투성이 발을 들이미는 행위일세. 그러면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지. 우리는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 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할 필요가 있네.


모든 인간관계의 트러블은 대부분 타인의 과제에 함부로 침범하는 것―혹은 자신의 과제에 함부로 침범해 들어오는 것―에 의해 발생한다네. 과제를 분리할 수 있게 되면 인간관계가 급격히 달라질 걸세.


누구의 과제인지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네. '그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만약 아이가 '공부하지 않는다' 라는 선택을 했을 때 그 결정이 가져올 결과―이를테면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거나 지망하는 학교에 불합격하는 등―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은 부모가 아니야. 아이란 말이지. 즉 공부는 아이의 과제일세. 


세상 부모들은 흔히 "너를 위해서야" 라고 말하지. 하지만 부모들은 명백히 자신의 목적―세상의 이목이나 체면일지도 모르고, 지배욕일지도 모르지―을 만족시키기 위해 행동한다네. 즉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이고, 그 기만을 알아차렸기에 아이가 반발하는 걸세.


여기에는 주의가 필요하네. 아들러 심리학은 방임주의를 권하는 게 아닐세. 방임이란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태도라네. 그게 아니라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는 상태에서 지켜보는 것. 공부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이 본인의 과제라는 것을 알리고, 만약 본인이 공부하고 싶을 때는 언제든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사를 전하는 걸세. 단 아이의 과제에는 함부로 침범하지 말아야 하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이래라저래라 잔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거지. 


물론 곁에서 최선을 다해 돕기는 하지. 하지만 끝까지 개입하지는 않아. 어느 나라에 "말을 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지만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라는 속담이 있다네. 아들러 심리학에서 하는 상담, 혹은 타인에 대한 지원 전반이 그런 입장에 있다고 생각하게. 본인의 의향을 무시하고 '변하는 것'을 강요해봤자 나중에 반발심만 커질 뿐이지.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네. -p, 160~163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는 것과 타인의 과제를 떠안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무겁게 짓누른다네. 만약 인생에 고민과 괴로움이 있다면―그 고민은 인간관계에 있으니― 먼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는 내 과제가 아니다" 라고 경계선을 정하게. 그리고 타인의 과제는 버리게. 그것이 인생의 짐을 덜고 인생을 단순하게 만드는 첫걸음일세. -p, 166~167



자신의 삶에 대해 자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믿는 최선의 길을 선택하는 것', 그뿐이야. 그 선택에 타인이 어떤 평가를 내리느냐 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이고, 자네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일세. -p, 168



유대교 교리 중에 이런 말이 있네. "열 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 중 한 사람은 반드시 당신을 비판한다. 당신을 싫어하고, 당신 역시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열 명 중 두 사람은 당신과 서로 모든 것을 받아주는 더없는 벗이 된다. 남은 일곱 명은 이도저도 아닌 사람들이다." 이때 나를 싫어하는 한 명에게 주목할 것인가, 아니면 나를 사랑해주는 두 사람에게 집중할 것인가, 혹은 남은 일곱 사람에게 주목할 것인가? 그게 관건이야. -p, 280



분필로 그어진 실선을 확대경으로 보면, 선이라고 여겨진 것이 실은 연속된 작은 점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 선처럼 보이는 삶은 점의 연속, 다시 말해 인생이란 찰나(순간)의 연속이라네.


그래. '지금'이라는 찰나의 연속이지.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살아갈 수밖에 없어. 우리의 삶이란 찰나 안에서만 존재한다네. -p, 301



이렇게 생각해보게. 인생이란 지금 이 찰나를 뱅글뱅글 춤추듯이 사는, 찰나의 연속이라고. 그러다 문득 주위를 돌아봤을 때 "여기까지 왔다니!" 하고 깨닫게 될 걸세. -p, 302~303



자네가 극장 무대에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게. 그때 극장 전체에 불이 켜져 있으면 객석 구석구석까지 잘 보일 거야. 하지만 자네에게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바로 앞줄조차 보이지 않게 돼.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라네. 인생 전체에 흐릿한 빛을 비추면 과거와 미래가 보이겠지. 아니,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겠지. 하지만 '지금, 여기'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과거도 미래도 보이지 않게 되네.


우리는 좀 더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야하네. 과거가 보이는 것 같고, 미래가 예측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자네가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지 않고 희미한 빛 속에서 살고 있다는 증거일세. 인생은 찰나의 연속이며,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아. 자네는 과거와 미래를 봄으로써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려하고 있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지 간에 자네의 '지금, 여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미래가 어떻게 되든 간에 '지금, 여기'에서 생각할 문제는 아니지.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고 있다면 그런 말은 나오지 않을 걸세. -p, 307~308



인생에 있어 의미 같은 건 없다. 하지만 내가 그 인생에 의미를 줄 수 있다. 내 인생에 의미를 줄 수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밖에 없다. -p, 3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