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빌라 - La Villa de Paris
윤진서 지음 / 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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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바랄 뿐이다. 부디 나의 삶에 사랑이 넘치기를. -p, 193

 






 








《파리 빌라》는 배우 윤진서가 쓴 소설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관심을 갖게 되는 책일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편견을 가진 채 보게되는 것도 사실인지라 몇몇 서평만 보더라도 소설 자체에 대한 평가보다는 배우 윤진서에 대한 평가글이 쓰여있어 안타까웠다. (어쩌면 나도 그런 글을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친구한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다음에 이별을 겪으면 마냥 힘들어하는 것 대신 훌쩍 여행을 가버릴거야. 그땐 내 정신이 온전치 못할테니까 이왕이면 평소에 쉽게 결정하지 못할 해외여행으로.' 라는 말을 했던 적이 있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도 이별 후 여행을 한다는 점이 내 생각과 닮아 괜히 반가웠다. 아무도 날 모르는 곳에서 혼자 청승도 떨어보고 뭐가 잘못이었을까 방해 받지 않고 떠올려보기도 하고,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며 슬픔을 잊어보는 것도 내가 생각했던 '이별 후 여행'과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내 또래 친구들은 이미 여러번의 이별을 경험한 경우가 많은데, 새로운 사람을 만났어도 그 이전의 연애에서 자꾸만 영향을 받는 모습을 많이 본다. 일단 나부터도 이전의 연애에서 경험했던 안좋은 일들을 다시 경험하면 덜컥 무서워지기도 하고, 문득 이전의 연애보다 좋지 않아도 무섭고, 좋아도 언젠가 이 좋음이 끝나진 않을까 무섭고. 이런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파리 빌라》의 주인공처럼 사랑을 할 땐 그 사람과 나밖에 보이지 않는, 영원할 것 같은 세상에서 살다가, 우리에겐 심각하지만 어쩌면 사소할 수 있는 문제로 이별을 하고나면 더이상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를 거부하게 되는 경우가 참 많다. 하지만 그녀는 긴 여행 끝에 그런 자신의 모습마저 같이 감내해줄 사람을 만나서 맞서나갈 것이라 생각했고, 그런 과정을 거치다보면 결국 언젠가는 사랑 앞에서 도망가지 않게 될 것이었다.


요즘 내 연애관은, 친구들끼리 종종 하는 말인데 '연애는 해도 지랄 안해도 지랄이니 이왕이면 하면서 지랄인게 낫다고.' 그러니 이전의 연애가 생각나 힘들어하고, 이 연애도 언젠가 끝날까 두려워하는 것보다는 이왕 하는거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과 지지고 볶고 그 순간에 충실하자는 것.


아래에 따로 정리를 해두겠지만, 이별 후 사랑 앞에서 도망치고만 있는 사람들이 읽는다면 좋을 구절들이 참 많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는 배우 윤진서의 독특한 분위기가 녹아있는 소설이어서인지 문득문득 이 소설의 주인공의 모습으로 윤진서를 떠올리며 읽고 있다가 깜짝 놀라기도 했다. 배우 윤진서의 분위기를 좋아한다면 그녀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 소설 또한 좋아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잠시 혹은 영원 사이의 시간동안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는 불안한, 사랑이라는 이름의 감정을 느끼기 위하여 여러 상태로 자신을 몰아간다. 어쩌면 그 속에서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몰기도 할 것이다. 그래야만 사랑이라는 확신이 더 강렬하게 들어서일 것이며 어쩌면 사랑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p, 28



다음번 그의 집에 갔을 때 나는 와인을 한 잔만 마시지 않았다. 그는 내가 잔을 비울 때마다 다시 잔을 채우며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물었고 싫어하는 것들에 대해 물었으며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것들에 대해 다시 물었고 결국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것들의 역사와 의미에 대해 물었다. 그렇게 더이상 우리의 식탁에는 인생의 부정적인 것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들은 미화되어 우리가 여기에 존재하기 위해 지나왔던 과거가 되었으며 그렇게 그와 나는 서로를 위해 새로운 자신을 만들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그와 나는 연인이 되었다. -p, 36~37



"있잖아, 만약에 네가 누군가에게 실연을 주었다면 아마도 그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니었을 거야. 네가 당했던 실연만이 진짜 사랑이었을 거야. 이유를 불문하고 끝까지 곁을 지키지 못한 쪽은 사랑했다고 말할 자격이 없는 거야." -p, 55



"사랑은 하나의 끈으로 이어져 있어. 그 하나의 끈을 계속해서 엮어나가는 거야. 한 번 끊어질 때마다 사랑이 없어졌다고 믿어버리면 사랑에 도달할 수 없어. 결국 네가 하는 사랑은 어떤 색도 아닌 너의 색을 띠게 되지. 원래부터 끈은 스스로 만들고 엮게 되어 있는 거야. 사랑을 마음 안에 가지고 있는 시간이 오래될수록 긴 끈을 갖게 되는 거야." -p, 105



그가 떠나고 나서부터는 달라졌다. 나의 슬픔이 떠나가고 그를 잠식했던 슬픔의 이유를 짐작하기 시작했다. 곧 두 사람분의 슬픔이 밀려왔다. 이전까지의 나는 사랑이란 상대방의 슬픔까지도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몰랐었다. 상대방의 슬픔까지도 곱씹고 나야 무엇이 잘못된 건지 내가 아는 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또 무엇이엇는지 제대로 짐작할 수 있었다. 만났던 기간의 두 배가 넘는 시간을 아파했고 영화를 볼 수도 친구를 만날 수도 마음껏 술에 취할 수도 없었다. 그의 슬픔을 곱씹는 순간 속에는 마치 그가 함께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들어 있었다. 마치 그를 실제로 보는 듯해서 가끔은 그가 떠났다는 것마저도 잊어버리는 순간이었다. -p, 117~118



원래부터 나란 인간은 척을 잘한다. 초연한 척, 관심 없는 척, 괜찮은 척. 사실 그렇게 척을 하다보면 스스로도 그렇게 믿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사람에겐 눈물이 날 일이라곤 별로 없었다. 특히나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일이라고는 인생에서 꼽을 만했다. 그렇지만 여행을 시작한 이후로 나는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듯이 자주 눈물을 흘린다. 새벽녘 와인을 마시고 창밖을 바라보다가도 그랬고 아비뇽에서 끊어진 다리를 보고 나서도 그랬고 조금 전 잠에서 깨어나서도 그랬다. 이러다가는 밥을 먹다가도 운전을 하다가도 배낭을 메다가도 눈물을 흘릴지 모르겠다. 그동안 내가 알아왔던 척을 잘하는 여자는 사라지고 최소한의 슬픔도 숨길 수 없는 여자가 되어버렸다. -p, 133



"뭐야 대체? 그렇게까지 잊고 살아가고 싶은 것이 있는 거야?"

"그런 건 아니야. 문득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고나 할까?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이 다른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었어."

"다른 인생을 살려면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닐까?"

"어디선가 그런 인터뷰를 본 적이 있어. 배우가 한 영화를 마치고 다른 영화로 넘어갈 때 다른 인생으로 넘어가는 기분이라는. 그것이야말로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이라 생각했어."

내 말을 효정이 받았다.

"사실은 그렇지 않을지도 몰라. 배우들은 한 영화를 마쳤다고 해서 그 세상을 부정하고 떠날 수 없을 거야. 우린 그 영화 속 배우를 영원히 기대할 테니까. 영화에서 한번 만들어진 세상은 영원히 그 자리에 존재한단 말이지. 네가 이전의 자신을 부정한다 해도 그 시간의 네 인생은 사라질 수 없을 거야. 지금의 네가 존재하는 한, 아니 지금의 네가 사라진다 해도." -p, 159~160



"그 사람도 참. 울부짖으며 거리에서 고래고래 화를 내고 당장 그 여자에게 전화를 하라고 소리친 여자한테 어째서 청혼했을까? 나라면 그 길로 도망갔을 거야."

"나도 똑같은 질문을 그에게 했지. 그런데 그 사람이 말하길, 지금까지 만난 프랑스 여자들은 그런 적이 없었대. 그렇게 지독하게 자신만을 사랑해달라고 말하지 않는대. 절대로 자신을 다 드러내지 않는 거지. 재미났던 건, 미친 사람처럼 따지며 울부짖는 나를 보는데 기묘하게 기분이 좋았다는 거야. 본능적으로 거부할 수 없겠더래. 그러고는 이토록 충분히 사랑받고 있으니 이 여자라면 만족하며 인생을 살아갈 수 있지않을까 싶은 마음이 들더래. 그러니 어쩌면 너도 언젠가 너의 사랑 앞에서 도망가지 않게 될지도 몰라. 이런 종류의 사랑이 요즈음 시대에 흔하지 않아서 내가 바보 같은 여자로 느껴지겠지만, 너 역시 자신이 완전히 사랑받고 있다고 확신할 때 오히려 완벽히 마음을 내주게 될지도." 

완벽한 사랑을 받는다는 말 앞에서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 말에서 바람 소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작년에 데스밸리 공원과 요세미티 공원을 유랑하듯 떠돌며 몇 개월 시간을 보낸 적이 있어. 숨이 멎을 만큼 뜨거운데다 흙과 태양, 그것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 있다보니 생각하는 것 자체가 고되더라고. 삶과 죽음의 중간 지점에 딱 들어와 있구나. 숨이 턱턱 막히며 몇 개월 지낸 끝에 느낀 거라고는 고작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어. 높이가 엄청난 큰 바위로 둘러싸인 곳을 지나기도 했어. 처음에 난 그 굉장한 광경을 보면서 무섭다고 생각할 줄은 몰랐거든. 하지만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무력하다고 느껴지면서 정말이지 두려움이 뭔지 알게 되었던 것 같아. 금방이라도 내게로 쏟아져내릴 것 같은 거대한 돌덩이 앞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무기력함이었지. 대자연 앞에 선 나의 육체의 무게가 너무도 가벼워 오히려 그쪽으로 소유되는 기분. 그리고 사랑이라는 거대한 자연 앞에 놓여 있는 인간에 대해 생각했어. 경험해보지 못한 거대한 사랑이 내게로 온다면 결국 어떻게 될까 하고. 내가 자연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무기력하게 휩쓸리고, 서로의 육체에 빨려들어가면서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겠지.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생각과 행동들이 비정상적으로 느껴지기도 할 거야. 그렇지만 어떤 면으로는 그 순간이야말로 진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을 거야. 네가 보여준 사랑의 표현들이 인간적이면서 자연스럽게 다가왔기 때문에 그 역시 너의 사랑 방식을 받아들였다는 생각이 들어. 정말 본능적이었을 거야. 넌 마치 엄마를 찾는 아이 같았잖아." -p, 163~165



굉장히 소중한 것을 발견했을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슬픈 느낌이 든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것의 소중함을 알아본다는 것은 그 순간부터 그 대상과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동시에 그것의 의미를 읽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소중하다고 느낀 시간은 아주 작은 시간임에도 강력한 힘을 지닌다. 그 힘을 위해 그만큼 아파온 것일 테니까. 지금 내가 굳이 역사라는 단어를 부여한 것은 모든 것에 종말의 순간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슬픔을 느끼면서 누군가를 알아본다는 것을 사랑이라 부르기로 했고 그와 함께 용감히 종말을 부정할 수 있는 세상 속으로 기꺼이 걸어들어갈 때 마침내 사랑의 힘이 발휘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마침내 서로를 알아본 대가로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듯이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 그것이 사랑의 대가라고.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가끔 길을 잃고 방황하며 상대방에게 이곳이 어디냐 묻기도 한다. 시간이 흘러 모든 것의 의미가 변해버린 세상에 이전의 의미로 현재를 해석하려 하는 어리석은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다. 하지만 사랑, 그것만이 신이 인간에게 준 천국이란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사랑할 때, 이전의 경험들을 지우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자세로 사람을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닐까? 마치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소중한 것을 발견했을 때 느껴지는 슬픔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 슬픔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고 그 슬픔의 에너지로 인해 심장을 다시 뜨겁게 가열시킬 것이며 가열된 심장은 더욱 붉어져 당신의 눈을 멀게 할 것이고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비교와 가치로부터 멀어지게 할 것이다. 그러면서 새로운 눈과 귀를 가지고 자신만의 가치와 의미로 세상을 해석하게 될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사랑에 동반된 슬픔은 익숙함에서 벗어나 일정 부분을 버려야 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안녕일지도. -p, 166~168



"사랑이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사랑하는 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대가가 아닐까?"

"하지만 사랑이 끝나고 나면 그 흔적들을 지우는 과정과 시간 때문에 지치는 것 같아요. 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싸움을 시작해야 하는 것 같고요. 그 시간을 보내는 게 힘들다기보다 더 힘든 것은 그 시간을 진짜로 송두리째 지워야 한다는 것 때문에 모든 것이 아프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허무함과 함께 싸우면 좋을 사람을 만나면 좋겠구만. 사라져버리는 사람 따위 말고."

"그런 걸 함께해줄 사람이 있을까요?"

"결국 세상은 보고 싶어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지 않나? 함께해줄 사람이라고 믿으면 그런 사람이 되어줄 수도 있을거야. 안 그러나 친구?"

노신사는 효정을 향해 물었다.

"그러길 바랐는데 이제는 믿지도 않는 걸 찾아서 보여줘야겠더라고요."

"그 싸움이야말로 정말 힘들겠는데? 믿지도 않는 걸 있다고 믿게 만들어야 하다니. 친구. 자네 이름이 뭔가?"

"폴린입니다."

"폴린,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걸 보여주는 게 뭔가?"

"그것이야말로 사랑 아니겠습니까?"

"자네가 나보다 낫구만. 나는 이제서야 사랑이 무엇인 줄 알았는데. 결국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고 다시 그것을 상대에게 보여줄 수 있을 만큼 증명시키고 설득해야 사랑이 된다네. 그 이전 단계까지의 것들은 시간이 흐르면 사랑이 아니거든. 하지만 세상에 태어나 한 사람에게라도 그것을 증명시키고 간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작가가 아니겠나." -p, 183~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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