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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여행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정희.남기철 옮김 / 이숲에올빼미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그는 무의식적으로 입으로는 그녀의 말을 따라 했지만, 몸은 한 걸음도 떼지 못한 채, 그녀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모습을 애틋한 눈길로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있었다.
강철과 유리가 진동하는 프랑크푸르트 역의 수많은 선로가 두 사람 위에서 그리고 왼쪽과 오른쪽에서 철커덕거리고,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담배연기 자욱한 역사의 소음을 가르며 울려댔고, 도착과 출발을 알리는 스무 개의 표지판에는 가차 없이 시각과 분이 게시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번잡과 소란 속에 오직 그녀만이 존재한다는 듯이 시간도 공간도 잊은 채 미친듯한 열정에 사로잡혀 야릇한 최면상태에 빠져 있었다. 결국, 그녀가 그에게 일러줄 수 밖에 없었다.
「루트비히, 지금 표를 사야 해요. 우리는 아직 기차표를 사지 않았어요.」
그제야 그는 뭔가에 홀린 듯한 시선을 거두고, 경외심으로 가득 찬 다정한 동작으로 그녀의 팔을 잡았다. -p, 10 (이별여행 中)

내가 좋아하는 문체로, 내가 좋아하는 느낌으로 글을 쓰는 한 분을 알게 되었다. 그저 자신을 '책 읽는 사람'이라 칭하는 그 분은 내가 그 분의 글을 몰래몰래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계시겠지.
내가 에쿠니 가오리의 글을 에쿠니 가오리 라는 이름만 믿고 좋아하듯 그 분에게는 슈테판 츠바이크가 그런 존재라 적어놓은 글을 본 적이 있었다. 동경하는 사람을 따라하고 싶어하는 마음 때문이었는지 마음 한 켠에 '슈테판 츠바이크'를 새겨두었더랬다. 시간이 흘렀고 그 이름이 잊혀졌다 생각되었을 즈음, 아무 생각없이 도서관을 돌아다니다 《이별여행》이라는 신선한 제목에 흑백의 예쁜 표지를 가진 책이 눈에 들어왔다. 책장에서 꺼내 들여다보니 크게 새겨져있는 이름, 슈테판 츠바이크.
역시나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첫번째 이야기인 《이별여행》도, 두번째 이야기인 《당연한 의심》도.
사랑을 사랑으로 인정하는 과정은 어떻게 시작될까? 그것은 사랑이 태아처럼 어두운 몸 안에서 고통스럽게 꿈틀대기를 멈추고, 숨결과 입술을 통해 감히 밖으로 나와 스스로 사랑이라고 이름하며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고치 속 번데기처럼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 완강하게 숨어 있던 그녀에 대한 감정은 어느 순간 불현듯 껍질을 뚫고 까마득히 올라갔다가 다시 무서운 힘으로 철렁! 하고 가슴 밑바닥으로 떨어져 그를 놀라게 하곤 했다. -p, 25 (이별여행 中)
이 눈부신 빛 속에서 결국 그는 자기 내면의 신경 하나하나, 조직 하나하나가 모두 그녀에 대한 사랑에서 피어났음을 알아차렸다. '사랑'이라는 그 마법 같은 말을 떠올리기가 무섭게 수많은 연상과 기억이 빛을 발하며 그의 의식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 번도 감히 인정하거나 해명하지 못했던 모든 사실이 그의 감정을 명백하게 규정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지난 몇 달 전부터 깊이 사랑에 빠져 있음을 깨달았다. -p, 30 (이별여행 中)
사랑이라는 감정이 시간이 지나도 항상 한결같이 처음처럼, 이렇게 뜨겁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작은 주체할 수 없을만큼 뜨거웠을지언정 끝은 뜨뜻미지근하거나 차갑기마련.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 두 이야기를 통해 사랑을 하며 느끼는 감정들을 정말 재치있게 표현해주었다.
《이별여행》에서 청년 루트비히와 그가 모시는 사장의 젊은 부인의 뜨거웠던 사랑이, 어쩔 수 없는 일로 멀리 떨어져지낸 9년이라는 시간으로 어떻게 변해갔는지. 그들이 느끼는 감정이 여전히 사랑인지, 과거에 느꼈던 사랑이라는 감정을 그리워하는 것인지.
《당연한 의심》에서 자신에게 한결같을 것만 같던 사랑이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게 되어 자신이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어버린 상황에서 '그'가 느끼는 감정. 단순한 서운함을 넘어 분노가 되어버린 모습. 이 이야기에서 '그'가 누구인지 안다면 다들 깜짝 놀라게 될 거라 확신한다.
여기서 명심해야할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한결같지 않다고해서, 끝이 꼭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뜨뜻미지근함도 사랑일 수 있고, 손을 대기 힘들 정도로 차갑다면 다시 따뜻한 사랑을 찾아가면 그만이니까.

이 두 이야기 뒤엔, 이 이야기를 쓴 슈테판 츠바이크의 생애에 대해 나와있다. 앞의 두 이야기를 잠시 잊을 정도로 그의 생애가 너무나도 다이나믹하고 서글퍼 원래 이렇게 뒷부분에 나와있는 작가의 생애엔 큰 관심을 갖지 못함에도 애초에 소설이 아닌 그의 전기를 빌려왔던 것처럼 한 글자 한 글자를 세세하게 읽어내려갔다.
태어나길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부유했음에도 행복을 느끼지 못했던 그, 그가 썼던 수많은 작품들이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왔음에도 늘 절망에 빠져있던 그가 결국 스스로 선택한 삶의 마지막을 이렇게 사진으로 보니,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일까 라는 물음이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 책을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빠와 카페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어떻게하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일까 에 대한 이야기까지 오게되어 슈테판 츠바이크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절망적인 삶을 살다 갔을지언정 우리가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도, 진정한 행복에 대해서도 스스로에게 수많은 물음을 던질 수 있도록 멋진 작품을 써준 그에게 고맙고 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