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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푸른 상흔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권지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사강 뿐이다_프랑수아즈 사강, 《마음의 푸른 상흔》
사실 내가 섬기는 유일한 우상, 유일한 신은 시간이다. 오직 시간만이 나에게 심오한 기쁨과 고통을 줄 수 있다. 이 포플러가 나보다 더 오래 살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대신 이 건초는 나보다 먼저 시들겠지. 나는 집에서 사람들이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나무 밑에서 한 시간 정도는 거뜬히 머물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서두르는 것은 굼뜬 것 만큼 어리석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삶도 마찬가지다.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이 과학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단지 운 좋은 순간일 뿐이라는 것을. 나로서는 그것만이 진짜다. 여기서 '진짜'란 '배울 것이 있는 것'인데, 그 또한 바보 같다. 나는 충분히 알지 못할 것이다. 완벽한 행복에 이를 만큼, 나를 충만하게 할 추상적인 열정을 가질 만큼, '무'를 추구할 만큼. 그러나 잘 기억해보면 그 행복했던 순간들, 삶과 일체가 되었던 순간들이 일종의 담요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독에 떠는 우리의 헐벗고 야윈 몸에 덮어주는 포근한 패치워크가 된다는 것을. -p, 42~43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로 유명한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의 책인 《마음의 푸른 상흔》 을 읽었습니다. 여러 서평단 활동을 하면서 가장 좋은 점은 관심 있는 신간을 빠르게 읽어볼 수 있다는 점인데요. 반면, 서평을 써야하기 때문에 읽는 걸 미룰 수 없다는 단점이 있죠.
프랑수아즈 사강의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에 대한 긍정적인 평을 많이 들어왔고, 또한 언젠가 찾아본 사강 그녀의 거침없는 삶 자체도 매력적으로 느꼈던지라 (두 번의 결혼과 이혼, 약물 중독, 도박, 스피드 광 등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고, 마약 혐의로 법정에 섰을 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말을 남긴 일화도 유명해요.)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관심을 계속 두고 있었답니다.

하지만 《마음의 푸른 상흔》을 펼쳐들고 읽는 순간, '아, 사강의 다른 작품들 먼저 읽고 나서 이 책을 읽어야 할 것만 같다.' 라는 생각이 확 스치더라구요. 이 책은 형식부터가 독특한 '에세이 소설'입니다. 프랑수아즈 사강이 1960년에 발표했던 희곡 '스웨덴의 성'에 나왔던 주인공들을 이 책에서 다시 등장시켜 소설을 썼고, 그 뿐만 아니라 소설 중간 중간에 사강이 주인공들에 대한 이야기,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 조국 프랑스에 대한 이야기 등을 담담하게 늘어놓기 때문이죠. 즉 '스웨덴의 성'에 나왔던 주인공들이 재등장한 소설과 프랑수아즈 사강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에세이가 결합된 독특한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강의 작품을 처음으로 접하는 저는 이런 독특한 형식에 놀라면서 '원래 이렇게 글을 쓰는 작가였나.', '왜 이렇게 어렵지.'라는 생각을 내내 하며 글을 읽었는데요. 제가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을 다 읽었기 때문에 에쿠니 가오리에 대해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느낌이 있고, 그래서 에쿠니 가오리가 자신의 이야기를 다룬 이야기인 에세이를 읽을 때 낯설지 않고 익숙함을 느끼듯이. 프랑수아즈 사강의 다른 작품들을 미리 읽고 그녀가 어떤 작가인지 미리 짐작해볼 수 있었다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마음의 푸른 상흔》 자체는 붕 뜨지 않고, 소설과 에세이가 결합된 독특한 형식에도 잘 흘러간답니다. 스웨덴에서 프랑스로 건너 온 매력적인 남매, 여동생 엘레오노르와 오빠 세바스티앵의 이야기.
관리인이 잠에서 깨라고 아주 진한 커피를 가져다주고는 짐을 정리해주겠다고 나섰다. 그녀는 24시간이 지났는데도 반 밀렘 부인의 황홀한 옷들이 뒤엉긴 채 가방에 쑤셔 넣어져 있는 건 안 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에 감각이 있고(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 따라서 품위를 지킬 줄 아는 여자로서 그런 걸 보고 본능적으로 거슬렸던 데다가 다소 걱정 섞인 배려와 자발적인 충성까지 곁들여지기 시작했다. 반 밀렘 남매가 둘이서만 여행할 때 만나는 사람들은 항상 그런 감정에 빠져들었다. 관리인 쉴러 부인도 벌써 아파트의 난방이며 석탄, 전기 문제에 발 벗고 나섰다. 어느 날 갑자기 뒤떨어진 아이 두 명이 품 안에 들어온 것처럼 기뻤다. -p, 91
그들은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빌붙어 살기를 자연스럽게 여기는 남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놀면서 빌붙어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들 조차도 이 남매를 도와주는 걸 당연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반 밀렘 남매의 매력이 있는데요. 이 남매의 매력에 프랑수아즈 사강 그녀의 매력까지 더해진 이 책은 사강의 팬이라면 더 할 나위 없이 소장하고 싶을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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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견해입니다.
만약 사강의 작품으로 이 책을 처음으로 접하실 생각이라면 다른 작품들을 먼저 읽어보시라고 조심스레 권해드리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