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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깨물기
이노우에 아레노 외 지음, 양윤옥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4년 7월
평점 :
처마 밑에서 담배를 피우는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시나는 불안했다. 이 순간이 과거가 되는 것을 미처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그걸 어떻게도 붙잡을 방법이 없었다. 시간이 자신을 버려두고 휙휙 가버리는 것 같았다. -p, 39 <에쿠니 가오리, 《늦여름 해 질 녘》 中>

얼마 전 오빠랑 이야기를 하다 오빠가 "난 달달한 걸 싫어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른같다고 생각을 했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나 또한 그런 생각을 안해본 것이 아니었기에 그 주제로 한참을 이야기했던 게 생각이 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까지는 몸에 좋은 건강식보단 과자, 초콜릿, 빵을 더 좋아하는 '애기 입맛'을 소유하고 있다.
뜨겁고 칼칼한 국물을 마신 후에 "아~ 시원하다!" 라는 말을 하면 "너도 이제 어른 다 됐네." 라는 말을 자연스레 듣게 되고, 달달한 음료 대신 쓴 아메리카노를 마시게 되면 "뭔가 어른 같아." 라는 말을 듣곤 하는데, '애기 입맛'과 '어른 입맛'을 나누는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새 나부터가 자연스럽게 '애기 입맛'과 '어른 입맛'을 나누고 있었다.
이렇게 입맛이 변해도 우리가 먹은 음식이나 그 음식에서 느낀 맛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는데 《기억 깨물기》라는 이 책은 '초콜릿'에 얽힌 사랑의 기억에 대한 단편들을 모아놓은 단편소설집이다. 총 6편의 글이 있고 일본 대표 여류 작가들의 글이라고 소개가 되어있지만 솔직히 개인적으로 난 에쿠니 가오리에 대한 애정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알라딘 신간알리미 서비스를 통해 '에쿠니 가오리'의 신간이 출간되면 문자로 신간 소식을 받아보고 있는데 《기억 깨물기》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받아보고 처음엔 에쿠니 가오리 혼자만의 작품이 아니라 다른 작가들의 작품도 함께 있는 단편집이라고해서 얼마나 서운함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읽은 지금은 오히려 에쿠니 가오리의 글보다 다른 작가들의 글 덕에 이 책이 더 빛을 낼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달까? (에쿠니 가오리의 글은 솔직히 좀 난해해서 두 번이나 읽어야 했다.)

지금은 글쓰기가 익숙하고, 글쓰는 일을 좋아하지만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글쓰기를 못 견뎌했다. 왜 그런가 의아해하고 있었는데 지금에야 이유를 찾았다. 난 내가 직접 경험한 일상을 녹여낸 글을 쓰는 건 자신이 있었지만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글을 쓰는 건 참 힘들어했던거다. 예를 들면, 이 소설처럼 학교에서 '초콜릿'에 대한 글을 자유롭게 써오세요. 라고 한다면 누구나 자신이 경험한 글을 써낼 수 있을 테지만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글을 써오세요. 라던가 '임진왜란'에 대한 글을 써오세요. 라고 한다면 무엇을 써야할지 처음부터 막막함을 느끼는 것이다.
'초콜릿'에 대한 내 기억을 적자면 아무래도 지금 남자친구와 썸(?) 탈 때를 떠올릴 수 밖에 없는데, 우리 오빤 사귀기 전부터 내가 초콜릿에 약하다는 걸 알았던 건지 뜬금없이 '초콜릿'이나 과자 선물을 그렇게 해줬더랬다. 시험을 망치고 우울해하고 있을때 갑자기 손에 종이가방을 쥐어주었는데 (사귀기 전이었음에도) 그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초콜릿이 가득 들어있었다. 킨더 초콜릿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그걸 찾으러 돌아다니기까지 했다는 말에 감동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을까. 그래서인지 연애를 시작한 후에도 초콜릿이 떨어지지 않게 마트에 데려가서 일명 '초콜릿 쇼핑'을 하곤 한다. "세니 초콜릿 떨어졌겠다." 라는 말이 정말 달콤하게 들린다. 이런 속물적인 여자....
이야기꾼인 그녀들이 그려낸 '초콜릿'에 얽힌 달콤하고도 씁쓸한 사랑에 대한 기억은 생각보다 더 매력적이었고 그래서인지 계속해서 곱씹게 됐다. 특히 각 소설이 시작할 때마다 보이는 일러스트들이 참 예쁘다. 소설의 전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일러스트에서 초콜릿을 찾아보는 재미도 이 책의 매력에 한 몫 한다.
문득 드는 생각인데 앞으로도 '초콜릿'에 대한 나의 기억이 지금처럼 여전히 달콤하게만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 이노우에 아레노, 《전화벨이 울리면》 中 >
물은 교코 씨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모래보다 물 쪽이 더 비슷하다. 물은 나를 감싼다. 물은 나를 뒤덮는다. 나는 흠씬 젖어 지쳐버리고 물에는 아무 영향도 끼칠 수 없다. -p, 28
< 에쿠니 가오리, 《늦여름 해 질 녘》 中 >
처마 밑에서 담배를 피우는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시나는 불안했다. 이 순간이 과거가 되는 것을 미처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그걸 어떻게도 붙잡을 방법이 없었다. 시간이 자신을 버려두고 휙휙 가버리는 것 같았다. -p, 39
"이타루 씨를 먹고 싶어."
말 그대로의 뜻으로 대답했다. 남자는 어라, 하는 표정이었다.
"아니, 그런 거 아니야."
당황해서 시나는 설명했다.
"침대로 청하는 것도 아니고 키스해달라는 것도 아냐. 실제로 당신을 먹어서 소화시키고 싶단 얘기."
스스로 한 말에 흠칫 놀랐다. 무서운 소리를 덜컥 내뱉었다는 마음과 그것을 어떻게든 전하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있었다.
"당신을 먹으면 당신은 내 일부가 되잖아? 그러면 항상 함께 있을 수 있으니까 세상 무서울 게 하나도 없을 것 같아."
남자는 놀라지 않았다. 담배 연기가 매웠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시나를 보고 있었다.
"응."
응, 그런 얘기구나, 라는 듯 간단히 대답하고 담배를 휴대용 재떨이에 비벼 끄더니 호주머니에서 빨갛고 작은 것을 꺼냈다. 그것이 무엇인지 시나는 알고 있었다. 접이식 포켓나이프. 노점에서 산 복숭아를 깎아준 적도 있고 급한 대로 사서 입은 카디건의 태그를 잘라준 적도 있었다. 코르크 따개도 달려 있어서 참 편리하겠다고 생각했었다.
처마 밑에 선 채 방금 전에 담뱃불을 붙이던 것과 똑같은 무심한 동작으로 남자는 자신의 왼손 피부를 얇게 얇게 벗겨냈다. 엄지손가락 옆에서 손목 방향으로.
그러지 말라고 시나는 말하지 않았다. 주인이 주는 먹이를 기다리는 개처럼 숨을 죽이고 지그시 기다렸다. 공작 놀이에 빠진 소년처럼 자신의 손가락 끝에 집중하는 남자를 응시하면서.
한이 없다고 생각될 만큼 시간을 들여 남자는 천천히 그것을 벗겨냈다. 반투명한 얇은 피부. 방금 전까지 남자 몸의 일부였던 것.
"와아."
절로 탄성이 터졌다. 시나 스스로도 놀랐을 만큼 그 목소리는 통통 튀듯 신이 나 있었다. 좋은 것, 재미있는 것, 맛있는 것을 보았을 때 어린아이가 문득 표정이 환해지면서 내는 듯한 소리.
허공에 대롱거리는 모양새로 남자는 그것을 내밀었다. 자신에게 내밀어진 그대로 시나는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예상 밖으로 메마른 감촉이었다. 그리 큰 것도 아니었는데 깨물어도 녹지 않고 씹어보니 약간 짭조름한 맛이 났다. 바다의 풍미.
시나는 삼키기 아깝다고 생각했다. 생각은 했지만, 삼켰다. 그리고 빙긋 웃었다. -p, 39~41
어떤 종류의 먹을 것은 마음을 강하게 만들어준다. -p, 42
< 고데마리 루이, 《호수의 성인》 中 >
다만 나 자신에게 항상 다짐해온 것이 있었어.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직감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라서 충동적으로 '이 사람이다'라고 정해버려도 괜찮지만, 이별에는 충분히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p, 108
고토코, 부디 그 사람과의 이별에 충분한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만일 아직도 그 사람이 마음속에 있다면 그 마음을 억지로 닫아걸거나 잘라내려고 하지 않았으면 해. 왜냐하면 사람과 사람은 결혼이니 이혼이니 하는 제도로 그리 쉽게 맺어지거나 헤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사람의 인연이란 어떤 형태나 제약에 끼워 맞춰지는 것도 아니고 속박당하는 것도 아닌, 바람 같고 물 같고 빛 같은 감정이자 마음이고, 서로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야. 아마도 그런 것이 사랑이 아닐까. 건방진 소리 같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해. -p, 110, 111
< 노나카 히라기, 《블루문》 中 >
타인의 영역에 들어서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내 마음을 활짝 여는 것은, 한 번이든 두 번이든 진짜 연애를 경험한 적이 있다면―그 끝에 소중한 누군가와 헤어져버린 일이 있다면― 겁이 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쉽사리 타인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사랑의 달콤함 속에는 실은 지독히 복잡하고 번거로운 배합의 향신료가 뒤섞여 있다. 그 하나하나를 맛보는 데는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p, 130
"어른이 되면 뭐가 되고 싶어?"
시시한 질문이다. 하지만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입 밖으로 나왔다.
"어른이 되면?"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뺨을 괸 채 노에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뭐가 되고 싶지……?"
노래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녀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본 뒤에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유코 이모는?"
"응? 나?"
아이, 난 이미 어른인데, 뭘.
그렇게 말하려다가 어른이라고 할 만큼 어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숨이 나오려고 했다. 서른두 해와 네 달, 거기에 며칠 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흘려보낸 시간이다. 생각해보면, 노에의 여섯 배가 넘는 세월을 살아온 셈이다. 하지만 이 아이는 나를 어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걸까. 아직 나이 어린 소녀 특유의 시선으로, 채 어른이 되지 못한 나의 미숙함을 간파한 것일까.
식어가는 홍차를 마시고 있으려니 노에가 다시 물었다.
"이모는 뭐가 되고 싶었어? 어렸을 때."
아, 그렇구나. 나만의 착각임을 깨닫고 피식 웃음이 터질뻔했다. 실제로 킥킥 웃었더니 노에도 덩달아 이유 없이 웃는다.
어린아이였던 시절에 내가 되고 싶었던 것.
뭐였을까. 뭐였더라.
노에도 나도 서로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채, 과자를 다시 입에 넣었다. 새콤한 무화가 설탕 절임, 우유가 듬뿍 들어간 커스터드 크림, 버터 맛이 풍성하고 식감 좋은 타르트 받침이 함께 어우러진 소박한 맛이다. -p, 137, 138
지금 다시, 그녀는 사랑에 빠졌다.
한 번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나 누군가를 믿어보려 하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용기를 다해서 누군가를 믿어보는 것, 어쩌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믿는 일이기도 했다. -p, 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