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식탁 위의 책들 -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종이 위의 음식들
정은지 지음 / 앨리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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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 먹는 밥이 더 좋다. 왜냐하면 더 탐욕스럽게, 온전히 먹는 것에만 몰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좋아하는 것은 그래서 혼자 먹는다. 어떤 날은 배 속에 마늘을 가득 채워 통째로 구운 닭에 서늘한 맥주를, 어떤 날은 비계가 매콤하게 녹아드는 돼지 불고기에 밥 많이, 또 어떤 날은 생크림을 듬뿍 넣고 무쇠 팬에 구운 스콘에 싸구려 찻잎으로 독하게 끓인 마살라차이를. 나는 설거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모은 그릇들을 마음껏 늘어놓고 나 혼자만을 위한 상을 차린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서가로 간다.

 

식탁 위의 책들. 이 은밀한 쾌락을 완성하는 책은 정해져 있다. 낯선 손님은 나의 식탁에 초대받지 못한다. 수십 번도 아닌 수백 번 읽어서 이미 외운 지 오래인 책들만 올라오고, 책장이 저절로 펼쳐질 정도로 같은 곳만 계속 본다. 좋아하는 음식을 좋아하는 그릇에 담아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먹는다. 세상에 이보다 안전한 쾌락이 있을까.

 

어릴 때부터 나는 먹는 이야기에 집착했다. 주인공이야 왕위를 빼앗기건 해적에게 납치당하건 배가 난파해 무인도에 떠내려가건 내버려두고, 그들이 뇌조를 굽거나 알뿌리를 캐는 장면에만 심취했다. 오랫동안 굶주리다 간신히 발견한 굴 껍질에 칼을 밀어 넣고 억지로 비튼다. 입을 바싹대고 욕심 사납게 빨아들인다. 턱으로 흘러내리는 비릿한 냄새를 나는 맡을 수 있었다. 『죽음의 무도』에서 스티븐 킹은 말했다. 자신이 호러에 탐닉하는 것은 상상력 때문이라고. 내가 먹는 장면만, 오직 먹는 장면만 보고 또 본 이유는 그거였다. 그림이 아니라 글이기에 그 힘은 오히려 강했다. 단호히 말하지만 세상에 아직 못 먹은 음식보다 맛있는 음식은 없다. 나는 상상하고, 상상하고, 상상했다. -p, 6, 7 (작가의 말 '나는 푸드 포르노 중독자였다' 中)

 

 

 

 

 

 

 

 

 

먼저 이 책은 다이어트 중이라면 읽기를 잠시 미뤄두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 이유인즉슨,

 

어제 저녁 10시 쯤, 하루종일 먹은 건 커피 몇 잔과 초코파이 하나.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엄마가 퇴근하며 사온 빵을 무의식적으로 먹다가 '하루종일 제대로 끼니를 안챙겼으니까 라면이라도 끓여먹을까?' 생각이 들어 라면을 끓여먹었다. (그 시간에 한 개를 다 먹으면 살찐다며 엄마는 반 개를 끓여주었는데 어찌나 서운하던지.) 그러다 문득 얼마 전 빌려왔던 <내 식탁 위의 책들>이라는 이 책이 생각나서 식탁으로 들고왔는데 이 책을 읽느라 라면이 불어 반 개였지만 한 개 같은 라면을 먹을 수 있었다.

 

어? 그럼 다이어트에 좋은 거 아닌가? 싶을텐데, 이 책은 먹는 걸 행복으로 여기는 분이 쓴 책이라 여러 음식에 대한 묘사가 생생하게 상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하며, '그래, 이런 먹는 기쁨을 뒤로 미룰 순 없어!' 라며 음식에 관대해져버린다. 이 책을 읽다보면 다이어트에 실패할 것이라고 100%...아니 90% 장담한다!

 

 

 

 



 

 

 

 

 

 

 

 

사람마다 책을 읽는 이유는 다양한데, 음식을 다루는 텍스트를 좋아해서 책읽기를 하고 그 음식에 대해, 그 음식을 먹는 장면, 의미, 그 음식이 등장하는 책, 그 책의 작가에 대해 쓴 글은 처음 접해본터라 처음 먹어보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처럼 신기해하며 이 책을 뇌로 먹어버렸다.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읽고 기내식에 대한 글을 쓰고,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고 죽(그루얼)에 대한 글을 쓰며 박경리의 『토지』를 읽고 계란에 대한 글을 쓰는 작가. 그런데 그 뿐만이 아니다. 기내식에 대한 글을 쓰며 여행을 꿈꾸고, 기내식에 얽힌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고, 죽에 대한 글을 쓰며 탄수화물 중독에 대해 이야기하는 등 이리튀고 저리튀는 글을 쓴다. 그 글을 따라가며 읽고있자니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다.

 

 

 

 



 

 

 

 

 

 

 

책의 멋진 점을 또 하나 발견했다. 한 권의 책은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수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관점으로. 그렇게 다양하게 읽어지고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침에 눈떠서 빈 속으로 이 책을 읽다가 포스팅을 하고 있었을 뿐인데 벌써 저녁먹을 시간이 다가온다니, 하루 두 끼를 놓쳤다. 저녁엔 놓친 두 끼에 대한 보상으로 더 맛있는 걸 먹어야지.

 

 

 

 

1978년 4월 1일, 하루키는 진구 구장 외야석에서 맥주를 마시며 혼자 야구를 보고 있었다.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데이브 힐튼이 2루타를 때린 순간, 자신이 소설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스물아홉 살이었고 재즈바를 운영하고 있었다. 매일 영업이 끝나면 글을 썼고, 7개월 후 완성했다. 그 소설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다. 데뷔작으로 군조신인문학상을 탔지만 가게는 그만두지 않았다. 그 후로도 몇 년이나 가게를 운영하며 밤에만 글을 썼고, 가게를 그만둔 후에도 매일 정해진 시간에 책상으로 출근하고 퇴근했다. 소설 쓰기는 어디까지나 일상의 일부지, 일상을 팽개치고 매달려야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p, 20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낚인 사람 클럽'_무라카미 하루키, 『먼 북소리』)

 

 

우리는 왜 기내식에 매혹될까. 나를 홀리는 것은 여행 자체보다는 그것에 대한 기대다. 왜냐하면 환상은 언제나 현실보다 우월하며, 기만은 필연적으로 진실보다 달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대가 최고조에 달하는 것은 비행기에서 싸구려 쟁반을 받아 들고 플라스틱 뚜껑을 여는 순간이다. 사각 쟁반 위에 우주가, 자기 완결적 세계가 있다. 기내식은 여행의 완벽한 축도인 동시에 여행자의 만다라다. 빼곡하게 들어찬 플라스틱 용기들은 무의식적인 여행 자아의 상징이고, 우리의 완전한 집중을 이끌어낸다. -p, 32, 33 ('사각 쟁반 위의 만다라'_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하지만 감자의 원한일까, 그의 재촉은 결국 스스로의 운명을 재촉하고 말았다. 감자를 깎게 시켜 놓고 츠바켈만이 집을 비운 사이 카스페를은 그가 가둬 둔 요정 아마릴리스를 구해준다. 요정의 마법으로 사악한 마법사는 바닥 없는 웅덩이에 가라앉고, 마법의 성은 무너져 내린다. 덩달아 호첸플로츠도 체포되고, 무사히 돌아온 아이들을 위해 할머니는 케이크를 굽는다.

 

자신의 감자 한풀이가 이런 식으로 귀결될지 츠바켈만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미리 알았던들 어쩔 텐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식탐이란 그런 것이다.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라면 물을 올리는 것은 아침에 얼굴이 부을 줄 몰라서가 아니다. 치킨에 맥주를 들이붓고도 기어이 아이스크림까지 사 먹는 것은 아무리 배를 쓸어 담아도 바지 지퍼가 올라가지 않는 사태가 발생할 줄 몰라서 그러는 게 절대 아니다. 다 안다. 그래도 못 참는다. 불가능하다. -p, 120-122 ('식탐으로 굴러가는 평온한 세상'_오트프리트 프로이슬러, 『호첸플로츠 다시 나타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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