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세계를 스칠 때 - 정바비 산문집
정바비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어린 시절의 내가 미래에 관해서만 물음표를 띄우고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과거와 현재, 미래 모두에 물음표 모양의 묵직한 닻들을 내리고 있는 것 같다. 그 무수한 물음표 중 일부는 덧셈이 되어 무언가를 데려오고 어떤 것은 뺄셈이 되어 뭔가를 덜어간다. 돌아오지 않는 물음표도 많다. -p, 256 

 

 

 

 

 

 



 

 

 

가을방학의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라는 음악을 하루에도 몇 번씩 듣던 때가 있었다.

 

만약이라는 두 글자가 오늘 내 맘을 무너뜨렸어. 어쩜 우린 웃으며 다시 만날 수 있어 그렇지 않니?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우습지만 예전엔 미처 하지 못했던 생각도 많이 하게 돼. 넌 날 아프게 하는 사람이 아냐. 수없이 많은 나날들 속을 반짝이고 있어. 항상 고마웠어.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얘기겠지만 그렇지만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라는 가사 속에는 가사 그대로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얘기겠지만' 이별한 사람만이 느껴본 감정을 덤덤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만남을 가질 때, 나처럼 이별은 생각하지 않고 만나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이별은 너무나 많은 시간만을 남겨준다. 그렇게 많아진 시간 속에서 우리는 둘이 아닌 혼자서도 할 수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보여주려고 활동적인 사람이 되어본다. 안만나던 친구들도 만나보고, 안하던 공부를 하러 학원을 다녀보기도 하고, 영화도 보고 이런저런 생각들도 참 많이 하게 된다. 이것은 상대방을 잊기 위해 억지로 바빠짐을 겪으려 하는 행위이다.

 

 

 




 

 

 

이별을 겪지 못한 사람은 '그냥 잊으면 되는거 아니야? 똥 밟았다고 생각해!' 라는 식으로 말할지 모르겠지만, 정말 이별을 겪게 되면 가사 그대로 가끔은 상대를 용서하게 되어버리기도 한다.

 

이렇게 기가막힌 가사를 쓰는 사람들은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며 살길래,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노래를 만들 수 있는걸까 하고 매번 궁금해했었기 때문인지 가을방학의 작사·작곡을 하고 있는 정바비님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긴 산문집이 출간된다는 소식에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는 언니네 이발관, 줄리아 하트, 바비빌 로도 활동했었다.)

 

내가 대학생 서포터즈로 활동을 하고 있는 RHK에서 이 책이 출판되게 되어서 출판되기 전에 모니터링에 참여해 원고를 미리 읽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더 애착이 간다. (원고로 볼 때도 글이 좋았지만 사실 그렇게 많은 기대는 안했는데 책으로 나오니 확실하게 이건 대박이다! 생각이 들었다.)   

 

 

 







 

 

 

 

가을방학의 정바비를 생각하면 다소 당황스러울지도 모를 법한 솔직하고 직설적인 화법에 다소 민망할 수 있는, 은밀한 성적인 주제까지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면서 놀라웠던 건 나도 모르게 이 책에 있는 대부분의 내용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공감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평소에 정말 생각을 많이 하고 그 생각을 글로 옮기는 게 습관화 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게 느껴질 정도로 한 문장 한 문장이 자연스레 스치면서 와닿았다는 건 더 놀라웠다.

 

내가 들으면서 그토록 공감하던 노래를 만든 정바비님..은 (호칭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사실.) 이런 생각을 해오고 이런 글을 적어왔구나, 이런 책을 읽고 이런 영화를 보고 이런 음악을 들었구나 하며 정바비의 세계를 정말 대놓고 볼 수 있었다.

 

그나저나 시간이 많이 늦었다. 12시에 꼭 자겠다던 내 다짐은 작심하루로 끝난 듯 하고, 이왕 이렇게 늦은거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갈 수 있게 가을방학 노래를 듣다 잠들어야겠다. 행복하다.

 

 

 

 

<이 숙녀분은 그야말로 여성을 대표할 만하군 中>

 

연애에는 희한한 측면이 있다. 연애를 시작하는 순간 당신이 일종의 대표선수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 하지만 연애를 시작하는 순간 남자는 남성 대표가 되고 여자는 여성 대표가 된다.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이 어이없고 거슬릴 때마다 여자는 남자라는 성별 전체를 향한 강한 혐오와 불신을 느낄 것이다. 남자친구와 싸우고 나서 선배에게 상담할 때 그녀들은 흔히 '어떻게 그 상황에서 그럴 수가 있어요? 남자들은 원래 그래요?'라고 하소연한다. 잘못은 한 사람이 했는데 30억 남자들의 신용등급이 바뀌어 버린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우리의 연애상대는 자신의 성을 대표하기 위해 그 어떤 공인기관의 인증도 거친 적이 없다. 독점적 · 배타적 연락권과 신체 접촉의 핫라인을 획득할 때 어떤 선거도 치러지지 않았다. 성염색체의 이 신성한 외교사절은 선출직이 아니라 임명직이며 그(녀)를 성별의 대사직에 앉힌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다. -p, 21, 22

 

 

<결혼에 있어서의 합리주의 中>

 

나의 지난 모든 관계가 실패했는데 이 사람과는 성공할 것이라는 기대는 어설프기 짝이 없다. 내가 여성과의 관계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포지셔닝은 염세주의와 회의주의 사이의 어딘가다. '어차피 이 여자애랑도 잘 안될 거야, 그러니까 같이 있는 동안이라도 잘 해주고 좋은 시간을 보내자.' 이게 내가 생각하는 로맨틱함이다. 그러니까 이 로맨틱함과 합리주의는 적어도 내게는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공존할 수 없는 개념인 것이다.

 

그러자 그 친구가 합리주의와 로맨틱한 감정이 공존할 수 있다며 이렇게 얘기했다. "10년 전의 나는 지금보다 더 로맨틱한 사람이었어. 그리고 10년 후의 나는 지금보다 덜 로맨틱한 사람일 거야. 그렇다면 나는 하루라도 더 빨리 결혼하고 싶어. 이게 나의 합리주의야."

 

솔직히 말해서 근래 들었던 말 중 가장 로맨틱한 얘기였다. -p, 48, 49

 

 

<불편의점의 점장이 되고 싶다 中>

 

나는 불편의점의 점장이 되고 싶다. 하루에 한 번씩 들러서 청결 상태와 알바생의 근무태도를 점검하는 일은 나의 기쁨이리라. 내가 들어왔는데 큰 소리로 '어서오세요!'라고 외치거나 허리를 90도로 숙이는 따위 인사성 투철한 알바생에게는 혹독한 감봉조치를 내릴 수도 있다. 매대 사이가 너무 넓어서 다니기 쾌적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쓸 것이다. 초코칩 박스를 뒤져서 가장 먼지가 많이 쌓인 녀석을 찾아내 맨 앞줄로 빼낼 것이다. 단골손님인 것처럼 가장해 다른 손님이 상품을 고르는 내내 근처에서 가게 욕을 해대는 것도 즐겁겠지.

 

아, 아무리 생각해봐도 '불편의점'이란 게 하나 정도 있다 해서 나쁠 일은 없을 것 같다. -p, 98, 99

 

 

<농담을 사랑한 소년 中>

 

애당초 가정통신문을 쓰는 사람이 담임선생님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얼마 전 이 점에 생각이 미치고서 나는 무릎을 쳤다. 왜 가장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는 친구들의 생생한 의견은 반영되지 않는 걸까? 1년간의 생활상을 단 몇 줄로 그려내는 가정통신문의 의견란. 마쓰오 바쇼의 하이쿠가 이만큼 압축적일까? 여기에 내 급우들의 시선도 들어갔더라면 내 지배적인 이미지는 '주의 산만'보다는 '유머 만발'에 가까웠을 것이다. -p, 101

 

 

<좋은 택시기사 中>

 

가족이나 손에 꼽을 수 있는 친지를 제외하면 우리는 한정된 시간 동안 정해진 한두 가지의 역할로 서로를 만나게 된다. 역할로조차 만나지 않는 무수히 많은 사람이 모여 '세상'이라는, 손에 잡히지 않는 거대한 추상이 된다. 나는 더 이상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내가 한 투표가 그 일과 관계가 있는 일이었는지도 이제 와서는 잘 모르겠다. 대신 '좋은 나'가 어떤 건지는 스스로는 좀 알고 있을 거라 희망한다. 나는 좋은 나로 살고, 나머지는 내가 책임지거나 지지할 필요가 없는 어떤 이치에 맡길 수 밖에 없겠지. -p, 172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中>

 

어린 시절의 내가 미래에 관해서만 물음표를 띄우고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과거와 현재, 미래 모두에 물음표 모양의 묵직한 닻들을 내리고 있는 것 같다. 그 무수한 물음표 중 일부는 덧셈이 되어 무언가를 데려오고 어떤 것은 뺄셈이 되어 뭔가를 덜어간다. 돌아오지 않는 물음표도 많다. -p, 256

 

 

<길 위에서 키득거리다 中>

 

그렇다. 여행이 갖는 가장 큰 매력은 자유다. 그 커다란 과실을 가능한 한 제대로 음미하기 위한 3가지 선결 조건을 들어본다. 우선 시선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나를 아는 사람이 없어야 하며 모국어가 통하지 않는 곳이면 더 좋다. 다음으로는 할 일이 없어야 한다. 업무관련 전화나 써야 할 원고를 떠안고 있어서는 곤란하다. 꼭 일이 아니어도 여행 중 꼭 하고 싶은 것 따위가 있는 것도 좋지 않다. 파리에 왔으니 에펠탑 정도는 보고 가겠노라는 쓰잘 데 없는 의무감으로부터의 해방이야말로 규장각 도서 반환만큼이나 한불관계 정상화에 있어 시급한 문제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건 최소한의 금전적인 여유다. 적어도 배낭을 넣어둘 락커 이용료 때문에 고민할 정도는 넘어서야 한다. -p,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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