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침대 위에 부는 바람 - 야하고 이상한 여행기
김얀 지음, 이병률 사진 / 달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한낮의 섹스는 처음이었다. 빛은 모든 걸 숨김없이 내보였다.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내 위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너. 목 아래로 작은 점 두 개가 보였다. 그 아래론 탄탄한 가슴근육과 옅은 커피색 유두. 그리고 조용히 숨어 있던 배꼽과 그 옆에 난 작은 상처도 보였다.

거친 숨소리와 신음과 떨림이 엉킨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우리는 다시 나란히 누웠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돌려 너를 봤다. 한낮의 해가 비추는 너의 적나라한 몸과 얼굴을. 너 역시 내 모든 걸 보았을까? 뭉클하게 네 손에 잡혀 있던 가슴, 너는 그 안에 있던 내 마음까지도 볼 수 있었을까? 얕은 잠에 빠진 탓에, 네 가슴이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나는 네 가슴에 귀를 갖다댔다. 이렇게 하면 혹시라도 너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규칙적인 심장박동만이 내 머리를 울렸다. 정리가 필요했다. 그러나 우리는 정리가 필요한 사이일까?

 

커튼을 활짝 열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강하게 빛이 들어왔다. 살짝 벌어진 네 입술을 보며 차라리 네 연락처를 파리 길거리에서 잃어버렸으면 더 좋았을걸 하는 생각도 했다. 무방비 상태로 누워 잠든 네 곁에 나도 다시 누웠다. 눈을 감고 우리가 함께 봤던 반짝이는 밤의 에펠탑을 떠올려보았지만 잘되지 않았다. 발밑에 있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덮고 깜깜한 공기를 삼키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때의 반짝이던 에펠탑과 차가운 밤공기와 너의 얼굴을 떠올려보려 노력했지만, 역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한낮 이불 속의 너와 나. 그 암흑 같은 침묵. 이제라도 나는 너를 잃어버려야겠다. 오늘이야말로 정말 너와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너와 나는 다시 서로의 이름을 모르던 여행자가 되었다. -p, 90, 91

 

 

 


 




 

 

 

 

‘섹스칼럼니스트가 쓴 야하고 이상한 여행기’라는 말에 냉큼 찜목록에 넣어두곤, 드디어 보았어요. 시험이 끝나자마자 처음으로 집어든 책입니다.

 

생각보다 야하지는 않았지만(그래서 좀 실망스러웠지만..), 여행은 사람을 무모하고 용감하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한 번 더 깨닫게 해주었어요.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낯선 곳에서 만난 남자와의 잠자리라니.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니고 가볍게 만나고 쿨하게 헤어지는 모습들을 보며 내가 외국으로 여행을 간다 해도 이렇게 쿨한 만남을 가지게 될까, 이런 무모한 여자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책의 작가인 섹스칼럼니스트 김얀은 자신이 좋아하는 걸 곰곰이 생각해본 후 여행, 섹스, 책 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쓰게 된 ‘야하고 이상한 여행기’. 13개국의 낯선 도시와 13명의 남자들에 관한 이야기. 그 중엔 상상 속의 남자도 있지만 읽다보면 정말 빠져들만큼 매력적인 남자들입니다.

 

덤으로 이병률 사진작가님의 멋진 사진들까지 볼 수 있어요. 읽다보면 사진보다 글에 집중하게 되는 건 사실이지만, 사진이 없었다면 심심했을지도 몰라요.

 

또 하나, 이 책을 읽고나서 타투가 꼭 하고싶어졌어요. 원래 하고싶은 타투 문양까지 생각해뒀었는데 잘 해주는 곳을 찾지 못해서(이건 핑계일지도. 그냥 귀찮아서..) 아직까지 못하고 있었는데 요번에 꼭 할거여요.

 

 

남자는 이틀 전 싱가포르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 호텔에서 보는 야경이 아주 아름다워 잠들기 아깝다는 문자를 보내왔었다. 나 역시 남자에게 호감은 있었지만 사실 여기에서까지 만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낯선 나라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건 자신도 모르게 평생 각인되어 버리는 일이라 신중해야만 한다. 뉴스에서 혹은 신문이나 여행책에서 낯선 나라의 이름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그 나라의 공기와 냄새와 함께 그 사람이 떠올라버리기 때문이다. 그것도 평생.

 

Y를 만나러 온 건 신중한 선택이었을까, 죽고 싶은 마음의 끝에 왜 Y를 떠올렸을까, 아빠에겐 뭐라고 답장해야 할까 생각하며 의미없이 휴대폰 버튼만 누르고 있을 때, Y가 왔다. 한 손에는 서류 가방, 다른 한 손에는 지갑. 택시에서 바로 내려 지갑을 주머니에 넣을 틈도 없이 로비로 뛰어들어온 듯했다. 이상했다. 낯선 도시, 날선 언어들 사이에서 나를 만나기 위해 뛰어오는 익숙한 얼굴을 만난다는 것은. 이미 익숙해져버린 남자의 얼굴을 보며 앞으로 싱가포르와 함께 떠오를 누군가는 이 남자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p, 55

 

한낮의 섹스는 처음이었다. 빛은 모든 걸 숨김없이 내보였다.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내 위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너. 목 아래로 작은 점 두 개가 보였다. 그 아래론 탄탄한 가슴근육과 옅은 커피색 유두. 그리고 조용히 숨어 있던 배꼽과 그 옆에 난 작은 상처도 보였다.

거친 숨소리와 신음과 떨림이 엉킨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우리는 다시 나란히 누웠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돌려 너를 봤다. 한낮의 해가 비추는 너의 적나라한 몸과 얼굴을. 너 역시 내 모든 걸 보았을까? 뭉클하게 네 손에 잡혀 있던 가슴, 너는 그 안에 있던 내 마음까지도 볼 수 있었을까? 얕은 잠에 빠진 탓에, 네 가슴이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나는 네 가슴에 귀를 갖다댔다. 이렇게 하면 혹시라도 너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규칙적인 심장박동만이 내 머리를 울렸다. 정리가 필요했다. 그러나 우리는 정리가 필요한 사이일까?

 

커튼을 활짝 열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강하게 빛이 들어왔다. 살짝 벌어진 네 입술을 보며 차라리 네 연락처를 파리 길거리에서 잃어버렸으면 더 좋았을걸 하는 생각도 했다. 무방비 상태로 누워 잠든 네 곁에 나도 다시 누웠다. 눈을 감고 우리가 함께 봤던 반짝이는 밤의 에펠탑을 떠올려보았지만 잘되지 않았다. 발밑에 있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덮고 깜깜한 공기를 삼키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때의 반짝이던 에펠탑과 차가운 밤공기와 너의 얼굴을 떠올려보려 노력했지만, 역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한낮 이불 속의 너와 나. 그 암흑 같은 침묵. 이제라도 나는 너를 잃어버려야겠다. 오늘이야말로 정말 너와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너와 나는 다시 서로의 이름을 모르던 여행자가 되었다. -p, 90, 91

 

눈을 떴을 때 휴대폰에는 현호와 현호 친구의 부재중 전화가 나란히 찍혀 있었다. 나는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괜찮은 여자가 되지 못했다. 어쨌든 연애란, ‘내가 나를 바라보게 하는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 이번 사건도 두 번째 ‘연애’라 부르겠다. -p, 99

 

오늘은 시엠레아프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내내 고민하던 ‘나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이번 여행은 그 남자와 자지 않은 것만으로도 괜찮았던 것 같다. 한때 나의 연인이었던 S는 ‘나의 문제’가 모든 남자와 섹스로 관계를 유지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S의 오해였다. 나는 매번 그렇지 않다고 반박했지만, 그는 매번 믿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헤어졌다. 그뒤로 S에게서 종종 전화가 왔지만 만나지 않았다. 섹스로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던 사람은 그였다. 헤어지고 나서야 나를 믿게 되었다던 그가 안타까웠다.

어쨌든 내일 아침이면 이곳과도 이별이다. 내일의 나는 조금 슬플 것 같기도 하고, 조금 기쁠 것 같기도 하다. -p, 127

 

아까 가게에서도 한 이야기였다. 했던 이야기를 또 하는 남자를 보고 있으니 우리가 오늘 처음 만났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오늘 처음 만난 우리는 모든 얘기를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아무런 얘기도 할 수 없는 사이였다. 남자는 자꾸만 우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침묵을 깨뜨렸다. 함께 있을 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가 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p, 135, 136

 

다시 기차 안에서의 여섯 시간. 가지고 있던 책을 뒤적거리고, 노트를 끄적이다가 문득 그 남녀가 다시 생각났어. 과연 그 둘은 어떻게 되었을까? 남자친구가 있다던 여자는 결국 프라하에서 만난 그 남자의 마음을 받아줬을까? 여행 계획을 다 뒤집고 자신을 보러 돌아왔다는 남자를 어떤 여자가 거부할 수 있을까? 게다가 거기는 프라하였으니까. 없던 사랑도 마구 샘솟게 하는 마법의 프라하. 그러고 보니 아침에 현관을 들어올 때부터 계단을 오를 때까지 그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있었던 것도 같아. 애인이 있던 여자는 한국에 돌아가서 후회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곳에서만큼은 그들은 정말 근사한 연인이었을 것 같아. 공기부터가 사탕처럼 달콤한 프라하에서는 뭐든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았거든.

 

응, 프라하는 정말 그런 곳이야. -p, 214

 

너는 알고 있을까? 너라는 사람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를.

수많은 골목을 돌고 돌아 너를 만났고,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차라리 사랑이 털실로 짠 목도리라면 좋겠네. 그러면 한 코 한 코 정성스레 엮어 네 목에 걸어 보여줄 텐데. 결국 차가운 날이 되어 나를 베고 가는 칼이라 해도 반짝반짝 정성들여 갈아 보여줄 텐데.

열여섯 첫 키스에서 시작한 남녀관계 이후로 나는 늘 ‘사랑이란 건 뭘까?’ 하고 고민했었어. 사랑의 시작은? 그렇다면 끝은? 대체 사랑은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것인지, 어떻게 소멸하는 것인지.

그동안은 사랑에 무지해서 사랑을 불신해서 아니, 사랑을 두려워해서 이제껏 단 한 번도 즐기지 못했지만 이번엔 확실히 느낄 수 있어.

빼곡한 일정, 피곤한 하루의 끝에서도 네 생각에 펜을 잡은 지금. 너만 생각하면 어떤 재미있는 책도 진도가 나가지 않고 멍해져버리는 지금.

 

나는 지금 이렇게 너를 생각하고 있어.

나는 지금 이렇게 너를 사랑하고 있어. -p, 2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