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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웰즈의 죄 ㅣ 판타스틱 픽션 골드 Gold 5
토머스 H. 쿡, 한정아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로레타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사진을 찍었을 때 줄리언 오빠가 어떤 상태였다고 생각해?”
“모르겠어.” 내가 솔직하게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 로레타가 말했다. “단지 줄리언 오빠가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의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
“근데 무슨 죄로?”
“그게 문제다, 그렇지?” 그녀는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줄리언 웰즈의 죄.” 그녀가 덧붙였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갑자기 그녀는 오랜 비행의 피로를, 더 나아가 아들이 죽은 뒤로 오래도록 무미건조했던 삶의 일부를 떨쳐내버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p, 216

아 - 이렇게 푹 빠져 정신없이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추리소설 정말 좋아요.
따뜻해진 날씨와 일찍 피어버린 벚꽃 덕에 안그래도 마음이 두둥실 떠있었는데, 얼마 전 읽은 달달한 에세이 <당신이
좋아진 날>로 그 마음이 가라앉을 생각을 안하고 있었어요. 해야 할 일들은 손에 안잡히고 ‘이런 걸 보고 봄을 탄다고 하는거구나’ 하고
있는 와중에 표지부터 어두침침하니, 무거워보이는 분위기의 책 <줄리언 웰즈의 죄>를 골라 잡았네요.


스토리에 반하고, 흡입력에 반하고, 구성까지 반한 소설이었답니다. 이 작품에 대한 평을 보니 토머스 H. 쿡은 어마어마한
작가임에 분명한데, 부끄럽게도 전 이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어요.
‘아이들은 장난 삼아 개구리를 죽이지만, 개구리는 진짜 죽는다.’ 라는 이 한 문장이 소설을 야무지게 요약해주고 있는 듯
합니다.

이 소설은 작가인 줄리언 웰즈가 자살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잔인한 고문을 행하고, 아무 이유 없이 쾌락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등 악한 짓을 행하는 사람들에 관한 소설을 쓰는, (소설이었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평범하지 않은 작가였습니다. 젊은
나이에 자살을 택한 것에 의심을 품은 그의 친구 필립과 줄리언의 여동생인 로레타가 그의 행적을 좇게 됩니다.
줄리언 웰즈가 썼던 작품들의 제목들이 각 챕터를 이루고 있는데, 이 작품 속에서 줄리언 웰즈는 이미 죽은 사람임에도 그가
계속 살아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했고, 마치 그의 소설을 제가 직접 다 읽은 듯한 기이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북리스트의 서평에 따르면 ‘토머스
H. 쿡은 유혹적으로 글을 쓰는 방법을 알고 있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이 백 번 이해가 될 정도입니다.

잔인하게 고문을 하거나 살인을 저지르는 이야기가 언급이 되어서 그런지 얼마 전 읽었던 <양심을 보았다>라는
책이 자꾸 생각나기도 했어요. 언뜻 보면 한없이 무겁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만큼 흡입력이 강력한 소설이니, 이런 추리소설에 푹 빠져보고 싶으신
분들께 추천해드릴게요.
지금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이루지 못한 야망, 특히 예술가의 이루지 못한 꿈이 남긴 재만큼 차가운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완전히 달성한 야망이라는 것도 없지 않은가? 알렉산더 대왕은 스물세 살 때 더 이상 정복할 세계가 없다고 한탄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모두는 어떤 면으로든 만족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좌절한 알렉산더 대왕 같았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선택한 직업에 만족하지 못하며, 경제 형편에 불만을 갖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내 경우에는 자식이 없다는 것과 홀아비가 된 것이 최대의
불만이었는데, 이젠 하나뿐인 진정한 친구를 구하지 못했다는 것이 추가되었다. -p, 15, 16
세상에는 되돌아 건너갈 수 없는 다리들이 있다. 그런 다리를 만나면 자신이 선택한 강기슭에 최대한 적응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p, 26
나는 아버지의 의자 옆에 있는 작은 나무 탁자 위에 보기 흉한 주황색 혹처럼 옹기종기 모인 약통들을 흘끗 쳐다보았다.
인간은 그냥 늙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왜소해지고 불편해지면서 늙는 거구나 싶었고, 앞으로 개선될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늙는 것이 더 고통스럽게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맞이할 그 어떤 날도 지난날보다 더 밝은 태양이 떠오르진
않을 것이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이런 슬픔은 더욱 깊어진다. -p, 36
그는 《조용한 미국인》에 나오는 에이든 파일처럼, 특권을 누리는 미국인의 질서정연한 삶을 넘어서는 다른 것에는 전혀
경험이 없는 청년이었다. 줄리언 웰즈, 세상의 정복자, 수많은 재능에 의해 보호를 받고 위대한 인간이 될 운명을 타고난 사람. 천하무적 그의
조국처럼. -p, 46
나는 내 방으로 가서 잠자리에 들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눕기 전에 창밖을 내다보았다. 7층 밑에 있는 그 카페에 줄리언이
그대로 앉아있었다. 내가 떠날 때와 똑같은 자세로 여전히 산마르띤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서 보더라도 뭔가 괴로운 게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줄리언에게로 내려갔어야 했다. 인생에 해피엔딩만 있다면, 친구라면 마땅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창문에서 내려다보다가 어스름한 불빛 속에 앉아있는 자신의 친구를 발견했다면, 그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친구는 자신의 침대를 바라보며 당장 그 안으로 들어가 눕고 싶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부드러운 베개와 시트를
그리워했을 것이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피로감에 단잠과 꿈을 갈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다시 내려가 괴로워하는
친구를 마주 보고 앉아 “얘기 좀 해봐.”라고 말했을 것이다. 젊고 경험도 별로 없지만 때로는 그런 몸짓만으로도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삶이란 게 인간에게 우호적인 얼굴을 보여주도록 설계된 거라면, 이 친구는 이런 것들을 알고 행동으로 옮겼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p, 129, 130
“줄리언은 소련 강제 노동 수용소의 죄수들이 감방 벽에 다른 어떤 단어보다 더 많이 써놓은 단어가 있다고 했네. 우리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단어, 어머니나 아버지, 하느님 같은 단어가 아니라고 했지.” 에두아르도는 또 내 오랜 친구와 함께 있으면서 그의 심각한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자쳄’이라는 단어였네.”
“자쳄이 무슨 뜻이죠?” 내가 물었다.
“‘왜’라는 뜻이지.” 에두아르도가 대답했다. 당혹스럽고 침울한 표정이었다. “이 말이 줄리언의 마음에도 쓰여져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군. 배신이 적어놓은 단어라는 생각도 들고.” -p, 151
내가 무솔리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백마를 타고 뽐내며 돌아다니다니 참으로 우스꽝스럽고 놀라울 정도로 유치하다고 말했을
때였다. 줄리언은 내 말을 듣고 기분이 우울해진 것 같았고, 아주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어도 에티오피아인들에게는 우스운 존재가
아니었어.” 그러고는 부드럽게 고개를 가로젓더니 덧붙여 말했다. “힘을 가진 자들이 어린애같이 행동해서는 안
되지.” -p, 191, 192
“한 민족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겪어보지 않으면 그 민족에 대해서 안다고 할 수가 없는 걸세.”
그가 말했다. -p, 196
로레타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사진을 찍었을 때 줄리언 오빠가 어떤 상태였다고 생각해?”
“모르겠어.” 내가 솔직하게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 로레타가 말했다. “단지 줄리언 오빠가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의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
“근데 무슨 죄로?”
“그게 문제다, 그렇지?” 그녀는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줄리언 웰즈의 죄.” 그녀가 덧붙였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갑자기 그녀는 오랜 비행의 피로를, 더 나아가 아들이 죽은 뒤로 오래도록 무미건조했던 삶의 일부를 떨쳐내버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p, 216
모든 문학작품은 인류의 언어가 매우 다양하다는, 다른 식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문제를 살짝 피해간다. 허구 속
등장인물들은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맞닥뜨리는 모든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기적을 행한다. 런던에서 이스탄불로 가는 도중 어느 도시의
기차역에 내려도 현지인들이 영어로 말한다. 허구의 세상에서는 바벨탑은 폐허가 되었고, 우리의 주인공이 아프리카 오지 주민이나 배두인 상인을 처음
만날 때에도 모든 해독불가능성은 홀연히 사라지고 만나자마자 삶과 죽음과 영원이라는 심오한 주제를 놓고 토론을 벌인다. 현실에서는 가장 가까운
술집 하나 찾는데도 고생깨나 할 텐데 말이다. -p, 217
“언젠가 줄리언이 했던 말이 생각나서요.” 내가 대답했다. “실은 소로의 말이죠. 아이들은 장난 삼아
개구리를 죽이지만, 개구리는 진짜 죽는다는.” -p, 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