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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 없어지기 1초쯤 전에
무라야마 유카 지음, 양윤옥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제삼자가 본다면 정말 우스꽝스러운 코미디일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심각한 고민이란 대개는 그런 것이다. -p, 45

겨울 막바지에 여름바닷가가 배경인 소설이라니.
추위에 약한 제가 겨울을 견뎌내고 있기에 작품 속 주인공들도 독자인 저와 같이 (어쩌면 저보다 더 혹독한) 겨울을 견뎌주길 바라는 못된 심보가 있지만 저와 다르게 따뜻한 여름을 지내고 있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네요.
‘무라야마 유카’는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와 함께 일본의 3대 여류작가라고 역자 후기에 쓰여있었지만 저는 그녀의 작품을 처음으로 접해봅니다.
그녀에 대한 저의 첫 느낌으로 말하자면 촉각, 후각, 시각 등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에 대한 뛰어난 묘사와 너무나도 야해서(이런 것들에 대한 생생한 묘사 또한) 당황스럽게 만들더니 그것마저 감성적으로 느껴지도록 만드는 묘한 매력을 가진 작가였달까요.
마치 저도 여름 바닷가 모래사장에 앉아 땀으로 범벅되어 찐득거리는 몸에 달라붙은 모래, 짠 냄새를 직접 느끼며 서핑을 하는 남자 주인공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던 독서였어요.
이 소설에 대한 전반적인 해석이랄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역자 후기를 통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뭔가 더 많이 알아야 할 것 같다. 혹은 이미 지나치게 많이 알아버린 것 같다. 청춘은 그 격차 사이에서 늘 불안하게 뒤흔들린다. 자신 속에서 모자람이나 넘침을 느끼는 것은 기성 사회의 기대치에 자신을 견주어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모자람이나 넘침이라기보다 단지 ‘다름’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수없이 많은 고뇌와 조정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청춘이란 기성사회의 기대치와 나 사이의 ‘다름’을 깨닫고 그것을 스스로 감당해가며 진지하게 마주하고 싸워나갈 때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젊음의 그러한 치열한 고뇌를 통해 한 사회에 형성된 기성의 틀이 좀 더 새로워지고 확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 역자 후기 中
성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며 성적인 욕구가 남들보다 넘쳐나지만 착한 딸, 모범생의 가면 뒤에 숨어 지내는 후자사와 에리와 오는 여자는 막지 않고 개그감이 뛰어난 서퍼, 하지만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나 집을 나간 어머니와 암에 걸려 곧 돌아가실 아버지가 있는 야마모토 미쓰히데. 그 외의 여러 캐릭터들이 (역자 후기에 드러나 있듯이) 기성세대의 기대치와 나 사이의 ‘다름’을 깨닫고 그것을 감당하고 마주하며 싸워나가는 모습을 그려내는 작품입니다. 무거운 주제일 수 있겠으나 한편으로는 로맨스 소설로 느껴질 만큼 가볍게 다가옵니다.
‘나’ 자신에 대한 고민이 제일 많을 시기인 10대의 끝자락. 저맘때쯤 저도 이 아이들처럼 ‘자신’에 대한 고민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여전히 자기 자신에 대한 고민은 끝나지 않았지만 이런 고민을 함께 순수하게 나눌 친구들이 있었던 건 아마 그때가 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제삼자가 본다면 정말 우스꽝스러운 코미디일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심각한 고민이란 대개는 그런 것이다. -p, 45
“내가 요즘 절실히 생각하는 건데 인간이란 정말 재미있어. 그렇잖아? 한 가지만 보고 판단할 일이 아니라고 할까, 이론만으로는 다 알 수 없는 거라고 할까. 설마하니 아들딸 버리고 집을 나간 어머니의 남자와 한밤중에 번화가를 어슬렁거리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어.”
캬캬캬 재미있다는 듯 웃더니 그는 수평선으로 시선을 돌렸다.
“남들이 보기에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부자연스러운 일도 막상 본인에게는 자연스럽다고 할까, 가장 마음 편한 일인 경우가 많아. 누구나 당사자밖에는 알지 못하는 사연이 있다는 게 바로 그런 거겠지? 그러니까…… 너무 걱정할 거 없어, 에리.” -p, 64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의외로 태연히 일어나는 게 이 세상인지도 모른다고. -p, 101
‘상상하는 것’과 ‘실행에 옮기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큰 차이는 없다. -p, 105
어떤 사람에게든 결코 입에 올려서는 안 될 말이라는 것이 있다. 평소에 심한 농담을 연발할 때도, 혹은 진짜로 말다툼을 할 때도 나는 그것만은 지키려고 노력해왔다. 생각해보면 이것도 아버지의 가르침이다. 이른바 ‘마지막 도주로는 막지 말라’는 것. -p, 192
감춰야 할 일이 있을 때일수록 감춰야 할 일 따위는 아무것도 없다는 듯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p, 204
죽음이란 심장이 멈추는 것이 아니었다. 죽음이란 이렇게 타인과의 관계를 잃어가는 것이다. -p, 347
“나도 지금만 괜찮으면 다 좋다는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솔직히 나는 지금 내 코앞에 닥친 일만으로도 힘에 부쳐.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이 옳은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반드시 옳은 일만 골라서 할 수 있을 만큼 나는 강하지 않아.” -p, 369
“나한테……. 어때, 괜찮잖아?”
“뭐가?”
“나한테 허락해줘도 괜찮지?”
“글쎄 뭘?”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한테 다정하게 구는 거.”
제 입으로 말하고서도 엄청 부끄러웠는지 그는 마치 화가 난 것처럼 난폭하게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이마를 세게 비볐다.
뜨거웠다.
너한테 다정하게 구는 거…….
이윽고 나는 무거운 팔을 들어 미쓰히데의 머리를 껴안았다. 그의 어깨와 등에서 긴장이 풀리고 그 대신 내 위에 덮쳐드는 묵직함이 커졌다. 그의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손끝으로 빗어 내렸다. 그가 웅웅거리는 소리를 흘렸다.
달래듯이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러고 있으려니 어쩐지 내가 그를 낳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p, 370, 371
어떻게 해서든 ‘지금’을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된다. 미래고 개똥이고 간에 우리에게는 지금 이 순간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p, 3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