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편지
이용범 지음 / 바움 / 2002년 8월
평점 :
품절


 

 

가장 이상적인 남녀 사이라는 것은 결국 말없는 나무와 같은 것이 아닐까요. 한마디 말이 없어도 항상 의지하고, 마주 서서 바라보기만 해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 진실한 사랑이 아닐까요. 그러나 인간이란 결코 나무와 같은 존재가 될 수는 없는 모양입니다. 붙들어두지 않으면 불안하고, 가까이하지 않으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여기니까요.

 

그래서 인간은 두 다리를 가질 때부터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것인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를 찾기 위해 끝없이 방랑하는 존재니까요. 차라리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말 것을……. -p, 121

 

 

 

 

 

 

 

이 책을, 이별을 경험하자마자 읽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네요.

 

서로 미워하지 않는데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억지로 받아들여야만 했던 그 때, 이 책을 읽었다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비록 상대에게 전해주지 못하는 가슴 아픈 사연을 지닌 편지였지만 이 편지를 통해 화자의 심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어요. 어찌나 문체가 섬세하고 나긋나긋하던지 당연히 작가가 여자인 줄 알았는데 남자인걸 알고 정말 놀랐어요.

 

그러고보니 연애편지 뿐만이 아니라 손편지 자체를 안쓴지 꽤 오래 되었네요. 예전엔 친구랑 하루가 멀다하고 편지를 주고받았던 적이 있었는데 요즘은 특별한 날에도 편지보단 카톡으로 안부를 묻는게 당연해진 것 같아 슬프네요.

 

이런 생각이 든 지금, 오랜만에 손편지를 써보는 시간을 가져야겠어요.

 

 

처음 생일선물을 전해주던 날, 당신은 내게 말했지요. 사랑을 시작할 때는 언젠가 그를 미워하게 될 것이란 걸 염두에 두고, 누군가를 미워할 때는 언젠가 그를 다시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말예요. 그때만 해도 당신은, 내 사랑의 표적이 당신이 되리란 걸 몰랐겠지요. -p, 15, 16

 

하지만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당신보다 먼저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으니까요. 투정이나 일삼던 나를 다소곳한 숙녀로 만들어 버린 것, 철없이 날뛰던 말괄량이에게 기다림의 인내를 가르쳐준 것,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라곤 눈곱만큼도 없던 못된 계집애를 이렇게 침묵하게 만든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란 걸, 나는 알아버리고 말았으니까요. -p, 44

 

신은 우리를 채찍으로 다스리지 않고 시간으로 길들인다지요. 시간 앞에서 인간은 무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영화롭던 시절도, 무엇이든 녹여낼 것 같던 청춘도 결국엔 시간 앞에 무릎을 꿇고 말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늘 허망한 꿈을 꾸며 살아갑니다. 내일이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데도 우리는 날마다 내일을 기다리지요. 그러나 우리가 미래라는 이름 앞에 늘어놓는 수많은 내일은 영영 우리 앞에 다가오지 않습니다. 내일이 다가왔을 때 이미 내일은 오늘이 되어 있을 테니까요.

 

지나간 시간은 늘 기억을 남겨놓습니다. 기억이란 고통의 다른 이름이지요. 아물지 않는 화인(火印)만이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아프게 새겨지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아마도 인간의 역사 전체를 통해서 기억보다 무섭고 섬뜩한 것은 없었을 것이다. 어떤 것이 기억에 남으려면 그것은 달구어져야 한다. 부단히 고통을 주는 것만이 기억에 남는 것이다.’

 

하지만 기억이야말로 내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일 겁니다. 기억이 없는 나를 상상한다는 것은 너무나 끔찍한 일이에요. 상상해보세요. 내게 기억이 없다면 내가 ‘나’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어요.

 

지금 거울에 비친 얼굴조차 내가 어제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나’라는 걸 알게 되는 것이지요. 때문에 내게서 기억이 사라진다면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날마다 낯선 내가 있을 뿐이지요.

 

잊을 줄 아는 것이 행복이란 걸,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이란 얼마나 야속한 것인가요? 우리는 오히려 쉽게 잊고 싶은 것들과 빨리 잊어버려야 할 것들을 가장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기억은, 내가 그것을 필요로 할 때 비열하게 나를 떠날 뿐 아니라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 교활하게도 맨 먼저 나에게 다가오곤 하지요. -p, 50, 51

 

하지만 이 세상에 위험하지 않은 사랑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의 위험을 알면서도 그곳에 쉽게 뛰어들지요. 사랑이 고통의 뿌리가 된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 사랑할 사람이 없다면 모든 사랑은 그냥 스쳐지나버리지요. 오직 누군가를 사랑할 때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만 사랑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랑을 만나기는 어렵겠지요. 그래서 사랑은 늘 실패와 고통 속에서 열매 맺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p, 61, 62

 

세월은 상처를 아물게 합니다. 치유되지 않을 것 같던 가슴속의 상처에서도 새살은 돋고, 아무리 깊은 상처에도 딱지는 내려앉는 법이에요. 누군가 뾰족한 손톱으로 다시 긁지 않는다면, 세월은 모든 것을 덮어버리죠.

 

망각이란 얼마나 고통스럽고, 또 얼마나 많은 부끄러움을 감추고 있던가요. 하지만 잊혀짐이란, 한때의 아픈 기억과 부끄러움까지 무력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세월은 생살에 박힌 거스러미까지 묻어주고, 마침내 가시가 박혀 있던 자국까지 깨끗하게 지워주지요. 그리고 고통마저 추억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먼 과거 속으로 사라지게 만들어버립니다. -p, 93

 

그러나 누구나 겪는 이별이 아니던가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이별을 겪고, 그것을 통해 한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지요. 결국 이별은 사랑의 끝이 아니라 시작인 셈입니다. 한 사람을 잃은 내 안의 공간은 영원히 비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다시 채워지게 마련이에요.

 

당신에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당신의 빈 공간을 고통과 회한으로 채우지 말고 그냥 비워두세요. 누군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만일 그곳을 비워두지 않는다면 또 다른 사랑이 당신의 마음을 두드릴 때 기꺼이 그를 맞을 수 없을 거에요. -p, 95

 

사랑도 결국은 지긋이 낫살이나 든 뒤에야 둥글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그 이전까지는 달콤한 사랑마저도 가슴이 다 타버리도록 서럽고 괴로운 것이지요. 하지만 사랑과 이별이 반복되고 아픔을 묻어둘 줄 알만큼 성숙해지고 나면, 영원한 이별도 운명의 일부처럼 편안히 맞을 수 있겠지요. -p, 105

 

가장 이상적인 남녀 사이라는 것은 결국 말없는 나무와 같은 것이 아닐까요. 한마디 말이 없어도 항상 의지하고, 마주 서서 바라보기만 해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 진실한 사랑이 아닐까요. 그러나 인간이란 결코 나무와 같은 존재가 될 수는 없는 모양입니다. 붙들어두지 않으면 불안하고, 가까이하지 않으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여기니까요.

 

그래서 인간은 두 다리를 가질 때부터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것인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를 찾기 위해 끝없이 방랑하는 존재니까요. 차라리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말 것을……. -p, 121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사랑이란 서로에 대한 절대적인 자유와 서로에 대한 무소유 속에서 함께 사는 것이라고, 사랑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슴이며 자유라고……. 아, 누가 그런 바보 같은 말을. 아마 그는 세상에 태어나 한 번도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했거나 인생을 꿰뚫는 성자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사랑이란 결국 갖고 싶은 것이며, 구속하는 것이며, 또 갈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싫다면 사랑을 포기해야지요. 한 사람조차 사랑하지 못하면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구원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p,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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