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스 버틀러 읽기 - 젠더의 조롱과 우울의 철학 여이연이론 13
임옥희 지음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내 안에 너 있다
임옥희, 『젠더의 조롱과 우울의 철학, 주디스 버틀러 읽기』, 여이연, 2006.


 다수의 사람에게 젠더(Gender)의 발명은 망사콘돔 이상으로 불필요하다. 이건 어디에 쓰는 연장이지? 하지만 남/여로 범주화가 불가능한 자아를 이해해야 한다면, 섹스(Sex)의 견고한 감옥이 만져진다면 심리학자 ‘로버트 스톨러’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는 1968년 ‘사회· 문화·심리적 영역에 속하는 성 = 젠더’를 발명했다. 이로써 심리적으로 이성을 정체화 한 경우를 설명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당시 섹스/젠더의 불일치는 심리학적 병증으로 규정됐다.
 그리고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에 이르러 섹스/젠더는 필연적인 문화적인 구성물서의 위상을 획득한다. 즉 ‘나’의 성적 정체성은 오랜 반복수행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젠더의 수행이 사실이라면, 섭리로 여겨져 온 이성애는 위기를 맞게 된다. 더불어 남성 지배구조를 정당화하고 성차별의 유전적 근거를 제시했던 ‘생물학적 결정론’ 역시 큰 상처를 입는다. 한때, 사회구성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유토피아적인 여성성을 추구함으로서 남성 헤게모니 담론과 사회생물학에 몸을 의탁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하지만 버틀러는 대신 기존의 담론과 문화에 의해 오염된 섹스, 섹슈얼리티의 좁은 빵틀이 찍어낸 섹스를 문화적인 공간에서 폐기한다.
 여성의 순결함과 유토피아적인 섹스에 대한 선망(羨望)은 ‘역사 이전에 기원을 둔 이야기’인 신화 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카오스(Khaos)’·‘타르타로스(Tartaros)’와 함께 ‘천지 창조의 원초신(原初神)’으로 꼽히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Gaia)’는 흔히 여성성을 상징한다. 신화 속에서 그녀는 ‘홀로’ 하늘의 신 ‘우라노스(Uranus)’, 산맥의 신 ‘오레(Ore)’, 바다의 신 ‘폰토스(Pontos)’를 낳는다. 이는 여성의 본질이 창조와 구원의 은유로 여겨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은유는 여성을 ‘여성다움’에 감금하고 제약하기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버틀러의 망치는 이 어두운 낭만을 해체한다.
 그렇다면, 섹스와 젠더의 일치는 어떤 공정(工程)을 통해 이루어질까. 생물학적인 남·여아는 ‘문화적 젠더규범’을 획득해야 남·여성이 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가질 패와 버릴 패를 선택하는 ‘욕망’·‘동일시’ 과정을 겪는다. 그리고 섹슈얼리티가 착색되면 성적 정체성이 완성된다. 이때 동사무소 행정을 마비시킬 정도로 다양한 성적 정체성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대체로 섹스·젠더·섹슈얼리티에 혼란스러워하지 않는다. 왜? 이는 강제적인 이성애와 근친상간금지의 반복수행 결과다. 이 근친상간의 금지는 가이아의 뒷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다.
 가이아는 자신의 아들이자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교합(交合)을 한다. 그 결과 티탄족과 많은 괴물을 출산하게 된다. 외눈 ‘키클롭스(Kyklops)’와 100개의 팔·50개의 머리를 가진 ‘헤카톤케일’ 등이다. 훗날 키클롭스는 제우스에게 번개를 만들어준다. 이 번개는 태초에 자웅결합체였던 세 종류의 인간(남녀·남남·여여)을 제우스가 잘라 놓는데 이용된다. 그녀는 폰토스와도 교합하여 괴물을 낳았다. 그중 남매사이인 ‘케토(Cetus)’와 ‘포르키스(Phorkys)’의 근친은 대표적인 괴물이 탄생시킨다. 그중 한명이 바로 ‘메두사(Medusa)’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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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친상간을 신화 속 끔찍한 상징(괴물의 출산)으로 금지한 이유는 ‘여성교환’과 ‘이성애 족외혼’을 위한 것이다. 여성의 족외교환이 영속적인 친족을 구성한 덕분에 혈족 간에는 의사소통 회로와 기지국이 만들어진다. 이런 여성의 가치는 방출을 통해 남성사회를 결속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버틀러는 근친상간금지와 이성애의 강제가 여성의 재생산권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동성애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 “이게 다 이성애 근친상간금지법 탓이다!”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신화를 근친상간금지와 거세불안으로 깔끔하게 요약했다. 아들과 딸은 모두 어머니를 사랑한다. 그중 아들에겐 아버지의 여자에 대한 금지된 욕망이 거세불안으로 이어진다. 대신 아들은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하지만 딸은 동성인 어머니에 대한 애정을 접고 동일시 과정을 거쳐, 아버지를 대상화해야만 여성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프로이트는 생각했다. 하지만 버틀러는 이성부모에게 끌리는 욕망이 동일시보다 우선이 아니라, 이성애근친상간금지법의 결과로 인해 동일시가 진행된다고 여겼다. 버틀러의 뒤집기는 남성성·여성성의 획득과 이성애·동성애의 경향이 금지와 체념으로 이뤄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반대로 체념하지 못한 욕망은 젠더를 탁탁탁 흔들어 놓는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젠더에 타고 있는 양심은 급기야 자아에게 ‘가책(呵責)’이라는 폭력을 휘두른다. 개인이 주체로 탄생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의 ‘호명’을 받아야 가능한데, 남성/여성을 생산·이분하는 섹슈얼리티 규제로부터 이탈한 개인은 호명에 실패하고 ‘비체’로 구분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버틀러는 비체의 역설에 주목한다. 폭력적인 이데올로기와 법의 호명에 실패한 이들이, 보다 도덕적이고 전복적인 존재라는 사실은 매혹적이다. 그리고 상징질서 교란의 역할과 더불어, 비체들의 ‘애도(哀悼)의 공동체’가 타자를 내재화 할 수 있으리라는 새로운 정치성을 품기에 이른다.
 오랜 세월 이성(理性)에 의해 핍박 받아온 감성(感性), ‘애도’는 타자의 고통과 연대하는 것이다. 이웃뿐 아니라 인류를 포용하기 위해서 버틀러는 타인이 곧 ‘나’임을 인식하는 지점에 이를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한마디로 ‘내’ 안에 ‘너’ 있고 ‘너’ 안에 ‘나’ 있다는 혼재가 ‘우리’를 구성한다. 애기야, 가자! 이제 인류에게 감성의 영역은 더 이상 극복대상이 아니며, 윤리적 책임감의 뿌리로서 함께 성장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화적인 세례와 담론, 호명에 응답하지 않은 비체들은 가면을 쓰고 모든 경계를 지우기 위해서 춤을 추고 있다. 가면의 아래에서 젠더/섹슈얼리티는 마구 뒤섞이고 전복된다. 고유한 여성도, 섹스·젠더·섹슈얼리티를 재단해 얻은 정체성의 강박증도 가장무도회장 안에는 없다. 그리고 국가의 순결을 위해 버려진 ‘구성적인 외부’ ― 이방인·이교도·고아·범죄자·이주노동자 등은 유쾌한 기만과 농담을 나누면서 교란을 기획하고 있다. 그/녀들은 어디에선가 애도 중이거나, 남근중심주의를 조롱 중이다. 가이아의 뒷이야기처럼.
 (……) 우라노스는 가이아가 낳은 괴물 헤카톤케일과 키클롭스가 보기 싫어서 저승에 던져버렸다. 그러자 가이아는 강철로 커다란 낫을 만들고 복수할 기회를 엿봤다. 어느 날 가이아는 아들딸을 모아놓고 말했다.
 “저 발칙한 아비와 이 어미 사이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아, 내가 하는 말대로 한다면 우린 아비의 비정한 짓에 복수를 할 수 있단다.” 그러나 아이들은 아버지가 두려워 나서지 못했다. 침묵. 그리고 막내 ‘크로노스(Kronos)’가 용감하게 나섰다. 가이아는 기뻐하면서 예리하게 날이 선 큰 낫을 건네주고 우라노스가 나타날 장소에 크로노스를 숨겼다. 곧 아버지가 나타나자 숨어 있던 크로노스는 재빨리 아버지의 페니스를 잘라, 던져 버렸다. 이 잘림/단절로 인해 우라노스의 ‘페니스’는 대체 가능한 단순 기표, ‘팰러스(Phallus)’로 재영토화된다.
 거세불안과 페니스 선망으로부터 자유로운 ‘팰러스(Phallus)’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아득한 신화와 현재의 경계도 허물어 버리고, 더 많은 이야기가 애도의 공동체에서 다른 문법으로 쓰이고 있다.

 이 책은 몰이해 혹은 ‘못이해’를 이데올로기로 우기며 비생산적인 이야기를 찍찍 흘려대는 ‘마초(macho)’와 심층의 본질인식은 공백으로 놔두고 남/여성의 대립구도로 물어뜯기를 일삼는 “가짜 ‘페미니스트(feminist)’ = 여성숭배자” 에게 내미는 지혜로운 손길이다. 하지만 개인을 금지와 규제로 정체화해 온 국가·가족·젠더·섹슈얼리티의 해체가 이루어진다면 우린 자유로워질까. ‘철학의 타자’ 주디스 버틀러는 모든 토대를 조롱하고 있다. 그/녀가 어떻게 젠더를 넘어 친족·법·국가까지 기만하는지 꼭 확인해 보자. 이 책은 최소한 불편하거나 해가되거나 위험하지 않다. 오히려 인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이 담겨있다. 그 방법은……. 나도 버틀러와 함께 주체의 외곽이 아닌 비체에게 희망을 품어본다. 혹 틀린 점이 있다면, “오독은 아름다운 필연이다.”라고 믿자.
 그리고 『오늘의 페미니즘, 세계 여성운동』(문원출판)에서 ‘장미경’의 말을 덧붙인다. “여성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남성에 대해 분리주의적 시각을 갖지 않으면서도 남성의 억압적 측면을 고발, 폭로해야 하는 모순적 현실을 대하게 된다. 남녀 차별에서 오는 불평등을 지적해야 하지만, 또한 남녀공동체적인 시각을 견지해야 하는 어려움에 시시각각 부딪쳐야 하는 것이다.”모군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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