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인문학 -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
얼 쇼리스 지음, 이병곤.고병헌.임정아 옮김 / 이매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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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citizens)은 언제나 부유하다
얼 쇼리스(Earl Shorris), 『희망의 인문학 -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 이매진, 2006.


 가난한 어미는 가난으로 죽은 딸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다. ― “순아 오늘도 에미는 네가 보고 싶어 / (…) / 남들은 다 배우러 간다는데 / 원수놈의 돈을 벌어보겠다고 / 이른 새벽 종지불 밝혀서 쑥국밥을 먹고 / 네가 고향을 떠나던 날 / 웬놈의 진눈깨비는 그렇게 뿌렸는지 / (…)”(정호승, 『서울의 예수』, 민음사,1982.) ― 시인 서정주의 가난은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모녀의 가난에는 낭만적인 수사나 대책이 없다. 그렇다고 김수영처럼 “돈이 없다는 것도 오랜 친근(親近)이다”(「후란넬 저고리」, 『김수영 전집 1』, 민음사, 1981.)라며 빈곤을 아랫목에 뉘일 수도 없다. 매 끼니 걱정에는 그 어떤 낭만도 없으므로.
 우리 ‘순이’는 왜 이토록 가난할까. 어떻게 하면 치마저고리보다 쉽게 가난을 훌렁 벗어 버릴 수 있을까. 이 두 가지 물음은 ‘순이와 가난’보다 훨씬 오랜 세월동안 짝을 이룬 채 답을 기다려왔다. 그리고 동화 「개미와 배짱이」처럼 단순화 되어 그럴듯한 모범답안이 만들어졌다. ― 가난한 사람은 게으르다. 가난한 사람에겐 ‘교육’이 아닌 ‘훈련’이 필요하다. ― 이것이 ‘순이와 가난’에 접근하는 방법이었다. 미싱사 보조인 순이가 하루 네 시간씩 아껴 잠들며 미싱을 줄창 돌렸지만, 그럼에도 가난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순이는 아직 게으른 걸까.
 하지만 ‘얼 쇼리스(Earl Shorris)’는 도덕적 가치가 제거된 ‘노동 그 자체’의 착취 요소를 지적한다. 지독한 노동을 ‘항상 선한 것’으로 강변하며 목구멍에 풀칠만 해주는 것은 지독한 폭력이다. 이 최저임금은 ‘부(富)의 게임’ 속에서 ‘자연적인 평등’이라는 환영과 만나 ‘순이’를 밑바닥에 결박한다. 하지만 어디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 없다. 이력서에 쓴 것보다 부모님은 훨씬 더 근면하셨고, 순이의 옷장엔 작업복 한 벌이 걸려있을 뿐이었다. 이 “물질적 결핍과 숱한 도덕적 좌절”의 기원은 ‘순이의 저편’ 어디에서 잉태된 것일까.
 저자는 빈곤으로 인해 가장 먼저 빼앗긴 ‘정치성’에 관심을 기울인다. “남들은 다 배우러 간다는데” 자신의 정신과 노동력을 저렴하게 묶음 판매한 순이. 순이는 ‘정치’를, ‘합법적인 힘’을 착취당한 것이다. 만약 순이가 절대·상대적인 빈곤이 생산하는 ‘도덕적 좌절’을 극복하고 부당한 ‘무력(force)’의 포위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인문학’은 희망이다.

 감히 말하자면, 인문학은 정치에 선행한다. 만일 인문학적 토양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평등’과 ‘자유’ 역시 광장 처형대에 목이 매달렸을 것이다. ‘영혼을 고취시키는 삶’과 ‘음미하는 삶’의 중요성에 대해서 역설하다 처형당한 소크라테스처럼. 하지만 그의 부당한 죽음을 곁에서 지켜본 플라톤은 ‘철학자(philosopher)―시민(citizens)’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순수하고 참된 섭리에 따라, 개인과 국가에게 선(善)의 지표를 제시한 것이다. 이렇듯 인문학은 ‘조용한 투쟁’이다. 언제나 가치중립적인 지식은 빛나는 ‘의지’로 탈바꿈되어 ‘공적 세계’로 나아가게 한다. 사회적 약자의 진지한 ‘성찰’이 윤리적인 이상을 목표로 하고 실현하는 ‘정치성’으로 거듭날 때, 강제적인 무력(force)이 긍정적인 힘(power)으로 정신에 깃들 때, 느린 걸음이나마 세계는 스스로를 재창조한다.
 이 시대에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 그 자체가 부를 재분배하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무력의 포위망’ 안에서 빈민들이 정치성을 갖기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또, 헤게모니를 장악한 이들은 빈민들에게까지 고귀한 인문학의 성문을 열어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들은 오직 빈민을 ‘위험하지 않은 상태’로 유지시키길 바랄 뿐이다. 대학은 부동산학과나 소방학과를 늘리고, 인문학을 축소시키고 있다. 이 상태에서 어떻게 우리가 평등과 자유에 대해서 논의하는 일이 가능할까. 우린 스스로를 구해야 한다.
 빈민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클레멘트 코스’의 기적은, 그들에게 “고대 아테네에서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성찰적 사고와 자율성을 몸에 익히고 공적 세계와 관계를 가질 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 순이도 인문학을 통해서 ‘정치적 주체’, 즉 ‘진정한 시민’이 되어야 한다. 이것의 장점은 ‘배제’를 벗어나 합법적 힘을 행사하는 집단에 진입하고, 정치적 기술을 통해 무력의 포위망을 뛰어넘는 것이다. 이것이 공적 삶, 즉 행동하는 삶이다.

 우리 ‘순이들’이 ‘클레멘트 코스’를 밟는다. 뜨거운 강의실에 앉아 소크라테스의 산파술(産婆術)을 통해 비판적 사고를 소유하고, ‘누군가를 위한’ 역사·사회·정치를 배우고, 삶과 지독하게 밀착 된 문학·미술의 주제를 짚어가며 정치적 삶으로 출발한다. 이 긴 여정(얼 쇼리스가 기획한 “하나의 실험”)은 빈민들이 위험하다는 것을, 순이가 “사랑스러운 여러분들의 전체의 일부”(1969년 12월9일 전태일의 편지)라는 당연한 앎을 끊임없이 보여줄 것이다. 물론 빈민들에게 이것은 자칫 소모적인 모험이 될 가능성이 있다. 마주 앉은 빈곤과 끼니를 함께 거르는 사람에게 알콩달콩한 인문학적 낭만은 한 줌 푸성귀보다 나을 바가 없을지 모른다. 그들에게 타협할 수 있는 힘은 결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것을 얻기 위해 일어설 때, 위험을 무릅쓰고 추구할 때, 우리는 함께 ‘인문학의 희망’을 믿어야 한다. 그때야말로 기적은 반드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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