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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조이도우슨 / 예수전도단 / 199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싫어하지 않는 편이다. 많은 책이 내 옆에 있었고, 감사하게도 그 책들을 난 그렇게 멀리하지 않았다. 가정교육을 잘 받은 탓인지, 아님 딱히 다른 할 일이 없는건지 나이가 들수록 ‘활자’에 대한 집착은 중독화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여기까진 비교적 ‘좋은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책을 좋아한다는 말은 중독이라는 어느 사회건 기분좋게 받아들이니까 말이다. ‘불행의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기독인으로서, 소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나이지만 성경을 제외한, 신앙서적은 나에게 애지중지의 대상이 아니다. 그네들은 이상하게 기억에 오래 남지 아니하고 심지어 끝 페이지를 다 읽은 것들도 수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이다. 다행히 점점 많은 내 구미에 맞는 책들이 나오는 탓인지 제법 이젠 손이 가지만 여전히 주저하는 건 사실이다.
이 얇은 책은 대표적인 예수전도단의 '교과서’중에 한 권이 아닐까 싶다. 캠퍼스에서 예전단을 섬기면서 수 없이 들었던 책 제목들 중에 하나이고, 덕분에 읽지 않아도 마치 읽은 것 같은 착각을 던져줄 정도로 익숙하다. 게다가 특이함이란 전혀 찾아 보기 힘든 제목은 유사 제목들과 혼란성까지 던져준다.
얼마전 500 쪽짜리 책을 단숨에 해치웠던 ‘내공’이 있는지라 150쪽도 안되는 이 얇은 책은 차라리 얇은 브로셔에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한주가 넘도록 책을 지니고 다니고 덕분에 책은 절판된 책마냥 낡아지고 점점 안 쓰러워 졌다.
책을 쉽게 쉽게 읽어 내려가지 못했던 이유는 실천에 대한 두려움이다. 아는 지식들이지만 다시한번 맥을 짚어주며 강권하는 저자의 목소리에 난 주눅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이 책은 부담덩어리이다. ㅜㅜ)
책을 읽을 때마다 저마다의 목적이 있다.
문학 작품을 통해서 난 대리 만족을 느끼며 감정을 쇄신하고, 흥분에 사로잡히며, 그 글들이 탐이난다. 자서전을 읽으며 난 지나간 나태한 삶을 반성하고 하나라도 실천을 계획들을 살펴보며 내 자신을 돌아본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문학작품이 아닌 삶에 대하여 변화를 요구하는 실천집에 가깝다. 새해 마다 서점 판매 상위 순위를 차지하는 자기 개발서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하면 실례일까. 하지만 적어도 ‘변화’를 요구하는 측면에선 동일선상에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읽으며 사실 눈에 휘둥그래 질만한 새로운 사실을 접하지는 않은듯 하다. 하지만 그 말이 이 책이 가치가 없다거나 의미가 없다고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문제가 나를 더욱 옭아매고 있다.
죄를 짓는 행위 자체에서 죄의식을 느끼진 않는다. 그 ‘죄’가 ‘죄’이냐고 고백을 할때 그 죄의 무게와 정죄감이 시작이 된다. 하나하나 책 가운데 말씀을 통해서 전해져 내려오는 권면은 여전히 부끄러움의 원인이 된다.
“내가 알고 있는 바 이 세상에서 제일 큰 과제,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는 가장 확실한 길을 단호하게 성경말씀의 기준대로 살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기준이 최고의 기준임을 인정한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영적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마찬가지일 때가 있다.”(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갖기)
한 단원마다 결코 쉽지 않는 요구들을 하던 저자의 거룩한 속셈은 결국 이렇게 드러난다. 저자는 이 책을 단순히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교양서적으로 머물기를 원치 않음을 분명히 했다.
나의 모습의 수준은 하나님과 하나님과 친밀하기에 부족함이 넘치고 흘러 넘친다. 예수님의 가난한 자의 친구이며 세리들을 품으셨지만 그들이 결코 그 단계에서 머물기를 원하지는 않으셨다. 저자는 서문에서 ‘하나님과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된다. 생각만 해도 설레는 일이다...’라고 말을 한다. 사실이다. 이건 설레는 정도라고 표현하기에도 부족하다. 연예인을 개인적으로 알아도 자랑거리가 되는 세상인데 하나님이라는 창조주를 감히 친구라 부르는 건 엄청난 ‘빽’이다. 뭐가 두려워질까. 하지만 변하지 않는 진실 중에 하나는 ‘끼리끼리 논다.’였다. 세상은 부자들은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만들고 혼인으로 가족이 되어 간다. 내가 주와 친구가 되기 위해선 그분의 성품에 따라가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그분의 창조물과 죄인인 백성을 넘어 친구가 되려면 나의 죄성의 회개는 선택이 아닌 필수 조건이 된다.
강대상에 있는 소똥이 좋아 미치겠다는 책 속에 나오는 예문처럼 나는 나의 죄를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절망적인가? 그렇지 않다.
나같은 이를 배려함으로 저자는 다행히 위로의 장을 첨부했다. (비록 단 세쪽이긴 하지만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갖지 못할까 봐 절망할 필요가 없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에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사실 그게 어렵다.ㅜㅜ)”
위로의 말씀은 늘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