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는 이름이 없는데, 이는 우리의 어휘가 가난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들을 큰 소리로 전하는 것은, 이야기꾼이 그렇게 이야기를 전하는 행위를 통해 이름 없는 어떤 사건을 익숙하고 친숙한 것으로 바꾸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는 친밀함을 가까움과 연관시키는 경향이 있고, 또한 가까움은 함께 나누었던 경험의 양과 연관시키곤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완전히 낯선 사람들이 서로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은 상태에서도 친밀함을 공유할 수 있다. 주고받는 눈빛에 담긴 친밀함, 끄덕이는 고개, 미소, 어깨를 으쓱하는 행동에 담긴 친밀함. 몇 분 동안 노래 한 곡이 불리고, 거기에 함께 귀를 기울이는 시간 동안 지속되는 가까움. 삶에 대한 어떤 합의, 아무런 조건도 없는 합의, 노래 주위에서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들 사이에 자발적으로 공유되는 어떤 결론.
대부분의 공식 담론과 논평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겪고 상상하는 일들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 미디어는 그렇게 생겨난 침묵을 채우기 위해 보잘것없는각적인 여흥을 제공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침묵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살고 있는 부당한 세상에 대해 서로 질문을 던지게끔 자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지도자나 미디어에 등장하는 논객들은 우리가 겪고있는 일들에 대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이야기한다. 그건 무슨 닭들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 고급 금융용어들이다.
오늘날 살아있음, 혹은 무언가 되어 가고 있음을 산문으로 표현하거나 정리하는 일은 어렵다. 담론의 형식으로서 산문은 최소한, 확립된 의미의 연속성이 있을 때 가능하다.산문은 주변의 서로 다른 관점이나 의견들 사이의 교환이며, 공통의, 설명적인 언어를 통해 표현된다. 그리고 그런 공통의 언어는 대부분의 공적 담론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일시적이지만, 역사적이기도 한 상실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노래는 이러한 역사적 순간에 살아 있는 경험, 혹은 무언가 되어 가는 경험을 표현할 수 있다. 심지어 옛날 노래라고 해도 가능하다. 왜일까. 노래가 자족적이기 때문이며, 노래는 역사적 시간을 두 팔로 감싸 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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