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의 대상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그 대상이 예술가의 독창적인 감수성으로 어떻게 바뀌었느냐, 바로 이 점이 예술의 핵심이다. ㅡ(p.72)
작가의 글쓰기는 밝은 탁자 위에서 이뤄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상과의 단절, 고독이라는 깊은 어둠을 거쳐야만비로소 그것은 나타난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문장들은 단숨에 우리의 시선을 낚아채지만 어떤 문장들은 서서히 그 속에 스며들 것을 요구한다. 그런 세계에 들어서기 위해 우리가 견뎌야하는 것은 어둠이라는 시간이다.이처럼 어둠은 사랑의 권리이고 꿈꾸는 사람, 이미지를 보는 사람의 권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십사 시간 불 켜진 상점들로가득한 빛의 도시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권리를 파기한다. 이곳에서는 거꾸로 이미지의 소멸, 사랑의 소멸이 일어난다.철하학자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반딧불의 잔존》을 통해 말한다. 오늘날 반딧불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어두운 곳에 있지 못한 거라고, 그러니 반딧불을 보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당연하게도 반딧불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이상한 말이었다. 어떤 것을 바라보기 위해 우리가 충분히 어두워져야만 한다는 것은. 그렇지만 뒤늦게 도착한 극장의 어둠 속에 서 있을 때면, 이해하지 못한 영화 앞에서 잠들고 난 다음이면, 왠지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어쩌면 태어나지 않은 사람, 또는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만난 적 없는 사람의 언어를 받아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강렬한 감정을 느낄 때, 그것은 사실 내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그이에게서 온 것인지도 모른다.우리는 투명한 각주로 된 아가미를 양쪽에 매단 마리오네트인형처럼 누군가의 손에 의해 움직여지고 또 실로 연결된 다른존재를 움직이게도 하면서 걸어간다. 그런 일들이 너와 나에게 동시성이란 이름으로 나타난다. 만나지 않은 우리 사이를 관절처럼 접합하며 이 세계가 나아간다.
남자들에게는 이상한 습관이 있다. 자기가 남성이기 이전에‘보편적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이다. "세계 평화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까?" 묻는 남자에게, 버지니아 울프 Virginia Woolf 는 대답 대신 이렇게 되물었다. "당신은 왜 ‘우리‘라고 말하는가?"어쩌면 남자들은 ‘백마 탄 기사‘ 라는 스테레오타입에 묶여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남자는 여자에게 기사 역할을 빼앗길까 불안해하다 여성혐오에 빠진다. 반면 어떤 남자는 여성혐오라는 괴물에 맞서 여자를 돕고 싶어한다. 하지만 여자들 눈에는 이 역시 백마 탄 기사 역할놀이로 보이지 않을까.
존 버거의 글을 모두 다 잘 읽을 수는 없지만 어떤 부분의 통찰은 탄식을 자아내게 아름답다. 긴 러닝타임을 버티다 반짝이는, 그러나 잊을 수 없는 장면을 선사하는 어떤 예술영화들처럼. 이책에선 ‘노래에 관한 몇 개의 노트‘가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