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 이데올로기 - 수저 계급 사회에 던지는 20가지 질문
조돈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젠가부터 경제면 기사를 잘 보지 않게 되었다. 보더라도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만 눈을 질끈 감고 심호흡을 크게 한 뒤 재빨리 쓱쓱 읽은 뒤에 덮어두고 다시금 숨을 고르는 식이다. 첫째 이유는 속된 말로 빡쳐서...고 둘째는 이 "경제"가 누구 입장에서의 "경제"인지가 너무 뻔해 도무지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항상 의문이었다. '떨어질 콩고물도 없는 자들이 똘똘 뭉쳐도 모자랄 판에 왜 저렇게 재벌에 이입하지 못해 안달인가'? 다시금 시작되는 질문. 어째서 이 극심한 빈부격차의 사회에 저 비논리적인 믿음이 일종의 진리 내지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 자리하고 있는가?

조금 돌아가보자. 한국 태생의, 이주배경이 없는 환경에서 자라나 한국 바깥의 삶, 비주류의 경험을 하지 않았던 이라면 '다름'을 상상하기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 실질적으로는 섬인 국토, 인접국의 그것과 소통이 어려운 언어, 비교적 "단일한" 인종을 상정하는 전체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이념 교육. 그 모든 것들이 다양성을 경험하고 체화할 기회를 가로막는다.

사회 구성원들이 다양한 배경과 사회경제적 계급에 속한 이들과 뒤섞이는 경험이 부족하다. 징집대상 집단은 "군대에서 온갖 사람 다 만난다"고 여겨지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환경이다. 삶의 전반에서 마주치고 알아차릴 기회 자체가 적고, 있다고 한들 실제적인 경험으로 와닿지 않는다.


이것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파편화된 사회' 라든지, '개인주의 세대'나 '좁은 식견' 따위로 치환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 사회적 안전망과 공생을 생각할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불평등한 계급체계 바깥을 상상할 능력마저 잃은 꼴이 작금의 우리 사회인 셈이다.

전국각지에 공실이 남아도는데도 "내 집 마련"이 인생 목표인 사회, 평생을 벌어도 노후를 장담할 수 없는 사회, 아무리 발버둥쳐도 "타고난 수저"를 뛰어넘을 수 없는 사회, "어린이 재벌"의 이자소득이 평생을 노동한 숙련공의 전재산을 뛰어넘는 사회는 분명 제대로 돌아가는 사회가 아니다. 이것은 능력의 문제도, 실력과 자격의 문제도 아니다.

p.38 반세기 동안의 고속 경제 성장을 통해 1인당 GDP가 미국 달러 명목 가치 기준 30배나 상승했지만 생활 수준이 그만큼 상승했다고 실감하는 국민은 많지 않다. 국민소득 총액은 크게 팽창했지만, 소득 분배가 불평등하다면, 경제적 풍요의 혜택은 일부 고소득층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불평등은 주관적 판단이 아니라 객관적 실태의 문제다.

p.83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수의 지배계급이 다수의 피지배계급을 상대로 지배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피지배계급이 수용하여 사회 전체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도록 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배계급은 기존의 계급 역학관계와 함께 자원의 분배•재분배 구조를 유지하며 불평등을 재생산한다.


현대와 같은 형태의 자본주의-시장경제의 역사는 생각만큼 길지 않다. 사유재산의 범위가 기초인권과 생존, 사회적 안전망까지도 침범하는 횡포의 뿌리는 기대만큼 깊지 않다. 그 말은, 이 체제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뜻이다. 타들어가는 도화선에 모른척 눈 돌리고 있는 사회는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다. 분노는 힘이 세다. 공분이라면 더더욱.

"못 살겠다. 갈아보자". 익숙한 구호다. 그러나, 가능한가? 지금 우리 사회는, "기회는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운"가? 국가는 정의의 편인가? 그 "국가"는 누구의 목소리로 말하는가? 다시금, 우리 사회는 진실로, '이렇게는 못 살겠으니 갈아볼' 준비가 되어있는가?

p.84 이데올로기적 호명은 호명자와 피호명자 사이의 사회적 관계와 각자의 위치•역할을 확인해주고 사회 질서의 지시와 요구를 수용하게 한다. 그 과정에서 피호명자는 불평등 체제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며 불평등한 분배•재분배 구조를 수용하게 된다.

p.336 불평등과 불공정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은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편, 경험 속에서 형성된 시민들의 평등 감수성과 공정 감수성은 불평등 이데올로기가 불평등을 공정한 것으로 정당화하기 어렵게 한다.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에 대한 기대와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현실 사이의 괴리는 시민들에게 박탈감을 안겨주며 시민들의 불만을 증폭시킨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당연하지 않음에 대해 고민해온 이에게 제목이 실마리가 될 수 있겠다. "불평등 이데올로기". 이미 사회체제 전반에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해버린 지배논리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 책은 답이 아니다. 틀렸기 때문이 아니다. 어떤 문제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한, 단일한 해답으로 마침표를 찍을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문제제기다. 이러다간 정말 다 죽는다는 절박한 호소이자 이해를 도울 하나의 길이다. 독자에게는 응답하고 질문할 책임이 있다. 어째서 이렇습니까? 언제까지 이렇게 살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이러고도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p.285 한국 재벌은 경제적 수탈로 이득을 취할 뿐만 아니라 온갖 불법•비리 악행으로 명백하게 상호성 원칙을 위반하고 있다. 상호성 원칙을 위반하는 재벌들은 시민들의 마음속에 신뢰와 존경이 아니라 불신과 질시의 정서가 자라게 한다. (...) 재벌들이 상호성의 원칙을 위반할 때 국가 권력은 상호적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역할도 수행하지 않았다.

p.329 사회 서비스의 상품화가 아니라 공공성을 강화하여 사회적으로 제공하고, 공기업을 사유화하지 않고 공공재를 위한 국가•지자체의 정책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며, 기업 지배 구조를 주주 지배 방식이 아니라 노동자, 협력 업체와 지역 공동체 등 이해 당사자가 지배하는 방식으로 바꾸고, (...) 노동자 중심 주체 형성 전략과 소득 재분배 과제가 잘 진행되어야 이행 주체와 폭넓은 지지 기반이 형성될 수 있어서 시장경제 모델의 제도 개혁도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